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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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경주는 장애물 경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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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7월호>

히브리서 12:5-11에서는 고난이 가져다주는 복과 유익을 설명하고 있다. 고난은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그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는데, 고난이 주는 유익에는 군더더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고난은 어긋남 없이 잘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런 자갈처럼 보이게 된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의 목적을 세세하게 다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최소한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도하셨다는 의식만큼은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고난이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이 아니라 우리를 돕기 위한 도구이고, 또한 낙심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격려하기 위한 방법임을 알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 고난은 우리를 뒤로 물러서게 하고 주저앉게 하며 고개를 떨구도록 만드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전진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준다.

1.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는 고난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한다.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아들들로 대우하실 것이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느냐?』(7절) “아버지다운 정신”이 결여되어 어설프게 징계하는 아버지들이 많다. 그럼에도 육신의 아버지로서 마땅히 자녀를 징계해야 하거늘, 우리에게 영과 혼과 몸과 모든 것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인 우리를 더욱 징계하셔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자녀인 저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까?” 하면서 하나님께 불평하며 따져 묻는 일은 그야말로 무지의 소치이며 무가치하기까지 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아버지이신 주님께서 왜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가 아니라,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올바르게 바로잡아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현재 하나님의 자녀로서 고난에 처해 있는가? 결코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라. 오히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나 자신의 아버지가 되심을 확신하고 감사를 드리라! 고난만큼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우리의 위치를 잘 나타내 주는 방법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들들로 대하시기에 필요에 맞게 꾸짖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생아”이다!

무엇보다도 어두운 고난의 골짜기로 인도되는 아들이 자기 자신만은 아니라는 사실, 즉 “모든 아들”이 동일하게 경험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기만 특별하게 겪는 일이 아님을 안다면, 그 고통이 버겁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 5:9). 이 말씀의 진의를 깨달은 성도는 자기가 받는 고난의 무게를 이리저리 재 보면서 그것이 너무 무겁다고 섣불리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이 말씀을 큰 위안으로 삼는다. 다른 성도들이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고난을 잘 견뎌 내는 모습에 용기를 얻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혼자만 장애물을 넘고 있는 것 같은가? 다른 많은 지체들도 그렇게 뛰는 모습이 안 보이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나의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2.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는 고난이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시는 한 방법임을 확신한다. 『주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으시는 아들마다 매질하시느니라』(6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티끌과 같은 우리를 관심과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다니!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지 않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의 땅을 향해 가는 긴 여정에서 직면하는 어떤 고난에도 요동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큰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롬 8:38,39).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강력한 증거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경주자에게는 근심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걱정은 다음과 같은 속성이 있기에, 하나님의 자녀는 그런 걱정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오직 목표를 향해서만 전심전력해야 한다.

① 걱정은 순례자의 여정에 있어서 손톱만큼도 유익하지 못하다. 『누가 염려함으로 자기 키를 한 큐빗이라도 더 늘릴 수 있겠느냐?... 아주 하찮은 그 일마저도 할 수 없으면서 어찌하여 그 나머지 것들을 염려하느냐?』(눅 12:25,26) 당신은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워서 염려가 문제의 해결책이라 생각한 나머지 걱정하고 있는 것인가?

② 걱정은 해롭다. 어리석은 짓이고 불필요한 방해물이다. 어차피 실제 현실에서 겪을 일을 굳이 힘들게 머릿속으로 한 번 더 겪을 필요가 있겠는가? 한 번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그 날의 재앙은 그 날로 충분하니라』(마 6:34).

③ 걱정은 무가치한 일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음식과 옷 때문에 걱정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물으신다. “공중의 새들과 들의 백합화는 염려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시지 않느냐? 너희가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마 6:25-32) 말하자면 염려로 가득 찬 성도는 동식물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찌 그런 성도가 장차 왕국을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겠는가? 많은 걱정들로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꺼이 도와주시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주님의 영원한 사랑과 완전한 지혜를 잊은 채 고귀한 부르심을 받은 자녀로서의 본분을 내팽개쳐서는 안 된다.

④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런 모든 것이 필요한 줄』(마 6:32) 아신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에 걸맞게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는 특권과 의무를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⑤ 걱정은 땅에 속한 것들에 우리의 마음을 향하게 만든다. 음식과 옷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그것들에 마음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 위에 있는 영원한 것들을 향해 마음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창조주이신 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정해 주신 삶의 원칙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마 6:33).

⑥ 걱정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에게나 어울린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녀가 그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너희의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심이니라』(벧전 5:7). 비어 있는 지갑에서도 하나둘씩 돈을 세시고, 구름으로도 빵을 구우시는 일은 하나님께서만 갖고 계신 기술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없는 데서 만드신다. 그것도 매일매일 말이다!

3.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실수하지 않으심을 믿는다. 육신의 아버지는 아무리 노련하고 지혜롭고 자식을 지극히 사랑한다 해도 양육 방법에 있어서 착오가 있을 수 있다. 나름대로 최선의 결정을 내리려고 애쓰겠지만, 자신의 인생관과 지식, 경험, 양심의 한계를 결코 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훈육에 실수가 없으시다. 매 순간 정확하게 측정하고 계획하셔서 그분의 위대하고 완전한 목적, 즉 자녀를 자신과 같이 거룩한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려는 목적을 완벽하게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시고 또 우리로 그분의 거룩하심의 참여자들이 되도록 하시느니라』(히 12:10).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그분의 지혜와 전능하심도 신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돕기 원하실 뿐 아니라 돕는 방법도 아시고 도울 능력도 있으시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역사 속에서 종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기에, 현재의 고난은 주님의 관점에서 무슨 문젯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큰 “유익”이 된다. 고난과 시험의 한가운데서 어떤 길도 보이지 않을 때 이렇게 고백하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시니, 나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합당하게 처리하실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실 수 있나니 모든 것을 언제나 너희가 필요한 대로 가질 수 있게 하심으로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후 9:8)라고 말씀하고, 또한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히 13:5)라고 말씀한다. 전자의 구절에서는 “긍정적인 표현”이 여러 번 쓰였고, 후자의 구절에서는 “부정적인 표현”이 여러 번 사용되었는데, 이 두 구절은 서로 상반되는 표현을 통해 “똑같은 의미”를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고 선한 것을 주실까?” 그렇다! 모든 은혜와 모든 것을 모든 선한 일에 언제나 넘치게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실까?”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는 것이다.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며 신실하신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믿음의 경주에서 나타나는 장애물들을 철저히 주관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라』(막 11:22).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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