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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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큰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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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3월호>

성경의 기록상 “율법사”가 주님께 찾아와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계명”에 관해 질문한 사건은 적어도 두 번 있었다. 지난 호에서는 마태복음 22:36-38을 중심으로 “첫 번째로 중요한 계명”을 다뤘는데, 이번 호에서는 누가복음 10:25-29을 중심으로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을 다루고자 한다. 누가복음 10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이 끝날 무렵에 일어난 사건인데, 마태복음 22장에서처럼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했다. 즉 무언가 알고 싶어서 순수하게 질문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서 무언가 꼬투리를 잡고자 했던 것이다(눅 11:53,54). 그러나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이길 수 없다. 주님께서는 항상 대적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씀하시지 않고 성경을 인용하시면서 응수하셨기 때문이다.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눅 10:26) 그 율법사는 마음이 뒤틀린 자였지만 그래도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올바르게 대답했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눅 10:27).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그의 대답은 옳았다. 그런데 지난 호에서도 적시했듯이 이 계명은 지키기가 “불가능한 계명”이다.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다면 율법을 통해서도 생명을 얻을 수 있겠지만, 아무도 이 계명을 지킬 수 없기에 율법은 계속해서 우리를 정죄한다(갈 3:10). 장장 6천 년에 이르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이 계명을 지킨 유일한 존재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가 절대로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지키신 것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시기 위함이었다(갈 3:21,22, 롬 8:1-4).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준으로 이 두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성령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으실 때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롬 5:5).

율법은 우리에게 죄가 많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주어졌다(롬 3:10; 7:7). 그런 면에서 율법은 마치 우리 자신에게 잘못된 부분을 보여 주는 거울과 같다(약 1:23,24). 지구상의 인간들 대부분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늘나라에 가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율법을 위반함으로써(약 2:10, 롬 3:23) 이 거울을 깨뜨려 버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 보이는 반응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마가복음 12:28-34에 나오는 한 서기관은 가장 큰 계명과 관련된 대화 속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동의했고, 또 지혜롭게 답변했다. 예수님께서도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아니하도다.』(막 12:34)라고 말씀하셨다. 반면에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이 율법사는 율법과 관련하여 무언가 “틈”을 찾으려 했다(눅 10:29). 이 두 가지 반응 사이의 차이를 알겠는가? 서기관은 진리에 동의하고 올바른 길을 갔는데, 만약 그가 그 길을 계속 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율법이 그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을 것이다(갈 3:24). 그러나 율법사는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하고 싶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을 뿐이다(눅 10:29).


한편 율법사가 자신을 의롭게 보이려고 하지만 않았다면, 그의 질문은 구약의 유대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적절한 질문이었다. 구약에서 유대인의 “이웃”은 단지 옆집에 사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동족에 속한 다른 사람들, 곧 자신의 “형제들”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5)로 대답하셨을 때, 그것은 “인종적인 구분”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었다. 물론 우리는 이 비유에서 “예표적으로” 중요한 교훈들을 배울 수 있다.
먼저 누가복음 10:30에서 “어떤 사람”은 한 “유대인”으로서 주님께서 누구라고 특정하지는 않으셨다. 실제로 “어떤 사람”인 것인데, 이것은 인류의 실상을 보여 주는 그림으로서 아담의 타락한 자손들, 곧 모든 “죄인들”에 대한 예표가 된다. 그런데 그가 “예루살렘”에서 내려간다. 예루살렘은 『왕의 도성』(마 5:35)이다. 따라서 예표적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인데, 죄인들은 하나님을 떠날 때 어딘가로 내려가게 된다. 이 비유에서는 “여리코”로 내려가고 있다. 여리코는 “저주받은 성읍”(수 6:26)이므로, 이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 지옥을 향해 내려가는 것을 보여 준다. 이 내려가는 여정에서 이 사람은 “강도들”을 만난다. 강도들은 “마귀,” 곧 “사탄”을 나타내는데, 이는 사탄이 성경에서 복수 형태의 “마귀들”로 등장하는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마귀들”을 의미하는 『공중의 새들』(눅 8:5)이 “마귀”(눅 8:12)로 해석되는 것이다. 실제로 마귀는 『도둑이요 강도』(요 10:1)로 불린다. 그런데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긴다. 요한계시록 19:8에서는 성도들이 세마포를 입었다고 묘사하면서 이 세마포를 가리켜 『성도들의 의』라고 말씀한다. 따라서 강도들이 옷을 벗긴 행위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에게 했던 것처럼 사탄이 그 사람에게서 그의 의를 빼앗아 간 것을 보여 준다. 말하자면 이 사람이 처음에는 올바른 위치에서 시작했다 해도 나중에는 타락하고 만 것이다(겔 18:24). 그는 누가복음 15장의 방탕한 아들처럼 아버지의 아들로 시작했다가, 결국에는 그의 재산을 창녀들과 함께 방탕한 생활을 하며 낭비해 버렸다.


『상처를 입히고 반쯤 죽은 채로 버려 두고 갔느니라』(눅 10:30). 마귀는 우리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반쯤 죽은 모습”에 주목하라. 이것이 바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태다. 그의 몸은 살아 있지만, 그의 영은 죽어 있다. 그래서 죄인들에게는 새로운 출생이 필요하다(요 3:6,7). 요컨대 가난하고 타락하고 반쯤 죽은 이 사람은 죄인에 대한 완벽한 예표가 된다. 바로 그때 “제사장”이 지나간다. 하지만 그는 이 상처 입은 사람을 한 번 보고는 저만치 떨어져 지나갔다(눅 10:31). 왜 그랬는가? 그 사람은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아무 유익도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레위인”이 등장한다. 그는 제사장보다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갔지만 역시 그냥 지나가 버렸다(눅 10:32). 마지막으로 “어떤 사마리아인”이 다가온다(눅 10:33). 사마리아인은 절반은 유대인이고 절반은 이방인인 혼혈이다(왕하 17:24-41).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다고 말씀하신다(갈 3:26-28, 고전 12:13). 에베소서 2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뤄져 있다. 즉 이 사마리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완벽한 예표”인 것이다.


바로 그 사마리아인이 “그에게” 왔다! 이 얼마나 놀라운 순간인가!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그분의 백성을 죄들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다(마 1:21). 단순히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시어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서만 오신 것도 아니다(벧전 3: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직접” 당신과 나를 “개인적으로” 찾아오셨다. 찾아오셨을 때 그분의 성령께서는 우리 “각자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셨다(요 16:8-11). 나의 경우에는 그 일이 1949년에 있었다. 당시 나는 플로리다주 펜사콜라에서 낮에는 라디오방송국의 디스크자키로, 밤에는 댄스 밴드의 드럼 연주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성령 하나님께서는 휴 파일 목사님을 그 방송국으로 보내셔서 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게 하셨다.


이 비유의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게』(눅 10:33) 여겼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자에게 행하신 일이다!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나를 가엾게 여기셨다. 그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롬 5:8), 나를 위해 죄가 되신 것이다(고후 5:21).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요일 4:10) 예수님께서는 그저 죄인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어떤 본을 보여 주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그 죄인들을 직접 구원해 주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류의 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과거의 행위로만 끝나지 않았으며, 지금도 죄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의 혼에 대해 다루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원리들을 따름으로써 구원받으려 하는 자들은 사실 단 한 번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자들이다. 그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죽어 가는 사람에게 다가와서 이런저런 종교 행위를 하면 구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죄인에게 다가오셔서 무력한 그를 직접 구원해 주신 것이다.


또한 그 사마리아인은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싸매』(눅 10:34) 주었다.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낫게 되었느니라.』(벧전 2:24)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구원”을 의미하는 문맥이지 은사주의 가짜 목사들이 돈을 뜯어내려고 주장하는 “가짜 은사”에 관한 묘사가 아니다. 곧 “기름”은 성령님의 예표이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보혈의 예표인 것이다. 『여관으로 데려가서 그를 돌보아 주었느니라』(눅 10:34).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날은, 선한 사마리아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처 입은 나를 발견하시고 받아 주셔서 “이제는 괜찮아질 거야. 지금부터는 내가 돌봐 줄 테니.”라고 말씀하신 날이다! 시편 23:1, 베드로전서 5:7, 히브리서 13:6을 읽어 보라! 예수님께서 나를 얼마나 잘 돌보아 주셨는지 모른다! 예수님의 돌보심은 정부나 군대, 학교, 교회, 심지어 나의 부모님이 돌보아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자상하고 뛰어나다(시 27:10; 103:13, 사 66:13).

한편 선한 사마리아인은 길을 떠나야 했을 때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얼마가 더 든다 해도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으리라.’』(눅 10:35)라고 했다. 이 “여관 주인”은 성령 하나님을 예표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우리를 성령님의 돌보심에 맡기신 것이다. 성령님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시다. 또한 『내가 돌아오는 길에』(눅 10:35)라고 하신 말씀에 주목하라. 우리를 구원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돌아오신다!(요 14:3) 만일 당신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당신은 지금 밖에서 여관 안을 엿보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에게는 없는 것을 소유하고 있는데, 당신 역시 이것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영적으로 말해서 나는 “여관” 안에 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고(롬 8:39), 또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다(고전 12:13). 하나님께 지고 있던 죗값은 완전히 지불되었으며(롬 5:9), 설령 그 이후로 무언가를 빚진다 해도 나의 구주께서 돌아오실 때 그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고전 1:7,8, 빌 1:6).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원수들로 생각하듯이(요 4:9)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그분의 원수들로 생각하셨지만,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롬 5:10).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오셔서 경건치 않은 자들이요(롬 5:6) 죄인들이며(롬 5:8) 원수들인(롬 5:10) 우리를 찾아내시어 구원해 주셨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전능하신 손에 펜을 드시고 그분의 귀한 아들의 영원한 보혈을 잉크 삼아 나의 장부의 부채를 기록하는 난에 “스스로 지불할 수 없으므로 용서한다!”라고 기록하신 것이다.


이제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에게 물으신다. 『너는 이 세 사람 중에서 누가 강도들을 만난 사람의 이웃이었다고 생각하느냐?』(눅 10:36) 이에 『그가 말씀드리기를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니이다.”라고 하더라. 그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고 하시더라』(눅 10:37). 쉽게 말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자비로우시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자비로워지라는 말씀에 있다. 누가복음 6:35,36에서도 『너희는 원수들을 사랑하며』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우라.』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가? 『그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선하심이니라』(눅 6:35). 그래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도 『서로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며 서로 용서하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엡 4:32)라고 명령하신다.

당신이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롬 8:39)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는 이웃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없다. 어쩌면 당신은 지금도 반쯤 죽어 있는 죄인의 모습으로서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초청 시간에 앞으로 나가는 것조차 어려워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의 고개를 들어 믿음의 눈으로 갈보리 십자가를 보고 살라! “저는 사악하고 타락한 죄인입니다. 구원받지 못할 것 같아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눈을 감고 “하나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가 예수님을 영접하오니 저의 혼을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라. 당신이 온 마음을 다해 예수님께 나아오면 주님께서도 당신을 돌려보내지 않으실 것이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이렇게 나아오기만 한다면 당신도 “여관”에서 돌봄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셨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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