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믿음의 경기장에서 분류

경시하다 잃어버린 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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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6월호>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대와 경륜에 따라 어떤 개인이나 민족에게 여러 가지 복과 특권들을 주셨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복과 특권들 중에는, 교회 시대에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어지는 “구속받은 몸”이나 “새 예루살렘”의 유업처럼 한 번의 확정으로 변경 불가능한 것들이 있는가 하면, 그 개인이나 민족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받기도 하고 박탈되기도 하는 것들이 있다. 본 글에서는 그러한 복과 특권들 중에서 구약 시대에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던 “장자권”(birthright)의 가치를 고찰해 보고, 장자권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



■ “첫태생”에게 주어진 복 ■

『음행하는 자나,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권을 판 에서와 같이 속된 자가 없도록 하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후 그가 축복을 유업으로 받으려고 했을 때 거절당하였으며, 눈물로 간절히 구하였지만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6,17). 이 구절들은 야곱의 맏아들 에서의 행동과 그 결과를 보면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특권과 책임에 주목해야 한다고 일깨우고 있다. 우선 이 경고의 무게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에서가 차지했던 지위부터 올바르게 파악해야 한다.

이스라엘에서 첫태생에게는 “권위”가 주어졌는데, 곧 아버지 다음으로 가족의 권위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본래 “장자”는 동생들을 다스리는 “주”였다(창 27:37). 이스라엘 가정에서 지위나 나이순으로 식탁에 앉은 모습을(창 43:33; 48:14,17-19) 통해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맏형이 동생인 다윗에게 베들레헴에서 있을 가족의 희생제에 참석하라고 “명령”할 수 있었고, 이에 다윗은 그런 연유라면 사울 왕조차도 그의 신하가 왕과의 식사에 나오지 못할 만한 사유로 인정할 것이라 충분히 기대할수 있었다(삼상 20:27-29).

첫태생에게는 그 가정에 한하여 “제사장직”이 주어졌다. 그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은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첫태생”이 되었다(출 4:22). 동시에 모든 민족들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 즉 “제사장들의 왕국”과 거룩한 민족으로 지명되었다(출 19:5,6).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쓸어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첫태생을 진멸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이집트의 첫태생들을 죽이시겠다는 결심으로 응수하셨다(출 4:22,2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던 날 밤 이스라엘의 첫태생들을 살려 주신 후에, 모든 유대인 장자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의미로 바쳐진 존재들로 여기라고 명령하셨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하나님께 바치는 것”과 “장자권”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장자권을 가진 사람은 거룩하게 섬기는 제사장직을 위해 분리됐어야 했다. 그 후 광야에서 금송아지 숭배 사건이 일어났을 때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편에 서 있었던 “레위 지파”에게(출 32:26-29) 주님께서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이스라엘의 첫태생의 의무이자 특권이었던 제사장직을 옮겨 주셨다(민 8:17-19; 3:12,45). 레위 지파가 제사장 직분을 갖게 된 이런 독특한 역사적 연관성 때문에 성막과 성전에서는 오직 그들만 섬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은 “가족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첫태생에게는 “두 배의 몫”이 주어졌다. 이스라엘의 아버지는 그의 장자에게 두 분깃을 줘야 했다. 그가 힘의 시작이고, 장자의 권리는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신 21:15-17). 일례로 아들이 “네 명”일 경우, 유업을 다섯 등분해서 첫태생에게는 “두 몫”을, 나머지 아들들에게는 한 몫씩 주었다. 그런데 르우벤은 야곱의 맏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치스러운 죄로 인해(창 35:22) 장자권을 빼앗겼고, 결국 그의 지파에서는 메시아께서 나오실 수도 없게 되었다(대상 5:1,2). 그는 모든 특권을 박탈당했고 “탁월”하게 될 수도 없었다(창 49:3,4). 그다음 순서인 시므온과 레위도 세켐에서 격분하여 저지른 일(창 34:25) 때문에 장자의 권리를 잃었다(창 49:5-7). 결국 장자권은 요셉에게로 넘어갔고(대상 5:2) “두 몫”(에프라임, 므낫세)이 그에게 주어졌다. 한편 왕권은 넷째 아들인 유다에게 주어지면서 그는 메시아와 연관된 지파가 되었다(창 49:10).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주관하심과 일련의 상황들의 결과로 메시아께서는 “르우벤 지파의 사자”가 아니라 “유다 지파의 사자”가 되셨다(계 5:5).

이처럼 “이스라엘의 장자권”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기초가 되었다. 말하자면 일시적으로 개인이나 가족 또는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 영감, 예언, 메시아께서 통치하시는 왕국과 관련하여 보편적이고 영원한 원칙들을 실현하는 시작점이 되었던 것이다.



■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복 ■

영적인 견지에서 보면 신약의 그리스도인도 구약의 첫태생이 받은 복과 특권을 모두 누린다. 오히려 구약의 첫태생보다 더 온전하게 복과 특권을 누린다. 구약의 첫태생이 받은 복과 특권은 “가장의 권위 대행,” “가족의 제사장직,” “두 배의 유업”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와 비교하여 신약의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복과 특권은 훨씬 더 높고 귀하다. 우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왕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전파한다. 즉 가장의 권위를 대신했던 구약의 첫태생의 권위보다 더 높은 차원의 권위를 가지고 전파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영과 진리로 경배를 드린다. 이것은 구약의 제사장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죄를 덮게 했던 것보다 더 온전한 제사장직에 따른 행위이다. 마지막으로 두 배의 몫이 주어졌던 구약의 첫태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온전한 유업을 받는다. 구약의 첫태생의 복이 인간 아버지의 유업을 분배받는 것에 불과했던 반면,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있는 영원하고 안전한 상과 유업을 받게 된다.



■ “심각한” 위험성 ■

에서가 장자권을 잃지 않았다면 받았을 복과 특권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실패는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다시 말해 “장자권을 경시한 대가”로 장자권이 갖는 특권들을 모두 상실해 버린 것이다. 물론 “장자권”과 “아들 됨”은 같지 않다. 이는 에서가 장자권을 잃어버린 뒤에도 여전히 이삭의 아들이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손실을 당했지만 “차선의 복”이라도 받기는 받았기 때문이다(창 27:38,40b, 히 11:20).

영적인 견지에서 그리스도인 역시 신실하지 못하면 에서처럼 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요일 3:14) 그리스도인과 하늘의 아버지와의 가족 관계가 끝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스러운 복들, 즉 하늘의 특별한 부를 소유하는 것이나 제사장으로서의 특권, 위엄 있는 왕족으로서의 통치와 같은 하늘의 유업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어느새 구원의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미 약속으로 주어진 복을 누리며 만족하는 삶을 사는 대신 공허한 재미나 세상적인 것들을 뒤돌아보게 될 뿐이다. 영적으로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으니, 하늘의 복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간증도 없다. 특히 영적 제사장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기도의 생활이 전무하다! 영적인 제사장으로서의 마음이나 생각도, 사랑에서 나오는 간구도,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일도, 이미 받은 셀 수 없이 많은 복들에 대한 감사도,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경배도 사라져 버린 빈껍데기 신세가 된 것이다!

더욱이 저 영원에서 맞게 될 결과는 얼마나 더 심각한지 아는가? 구원은 받았어도 그 손실이 얼마나 막대한지 아는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전파한 사도 바울조차도 “그리스도의 날”에 각 사람의 일한 모든 것들이 불로써 드러나게 된다고 엄중히 경고했다(고전 3:13). 일생 동안의 섬김이 모두 불타 버릴 수도 있다! 마치 불에서 꺼내진 것과 같은 모습으로 겨우 구원만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고전 3:15)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위치는 박탈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지위와 특권을 온전하게 행사하고 누리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 “중대한” 잘못 ■

『내가 죽을 지경인데, 이 장자권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창 25:32) 에서는 미래를 희생시키고 있던 그 파멸의 순간에 현재를 위한 만족을 선택했고, 그때만큼은 팥죽 한 그릇이 그에게 크나큰 기쁨을 주었다. 이를 통해 에서는 그가 택함받은 족장의 “속된 아들”(히 12:16)이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가장 고상하고 영원한 특권들을 경시한 채 금방 지나가 버릴 즐거움을 가장 우위에 둔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뒤늦게 눈물로 애원할 때조차도 그 마음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었다. 즉 스스로를 책망하지는 않고 그저 야곱만 비난함으로써 외적인 복을 향유할 수 있기만 바랐던 것이다(창 27:34,38).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옳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이렇게 두 번이나 나를 속였나이다. 그가 나의 장자권을 빼앗더니, 보소서, 이제는 그가 나의 복을 빼앗아 갔나이다』(창 27:36). 어떤 성경 교사가 이 대목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손실’에 대해서는 통곡했어도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자신이 ‘인류 최초의 부모’의 진정한 아들임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는 최초의 부모인 아담과 이브 역시 자기들의 죄의 행실을 남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귀중한 교훈이 있다. 상대방의 비난을 받는 사람은 당연히 일부 책임이 있다. 하지만 경건하게 죄를 슬퍼하는 마음은 그런 ‘피난처’를 찾지 않는다. 모든 상황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겸손하기 마련인데, 에서는 이런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에서가 장자권과 맞바꿔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고작 팥죽 한 그릇이었다! 죄가 그의 종들에게 어떻게 보상하는지 보라! 에서의 상황이 우리의 영적 상태를 반영하고 있지는 않은가? 항상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자주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가? 영광스럽고 영원한 상급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돌이킬 수 없는 손실만 당할 것인가! 믿음의 경기장에서 달리는 경주자 앞에 놓인 기쁨을 “영적인 장자권”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 손쉽게 승리하기 위해 속임수를 쓴다면 심판주이신 하나님께 어떤 인정도 받을 수 없다(딤후 2:5).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전쟁의 열기와 압박은 피하려고 한다. 비용을 좀 덜 치르려고 이런저런 식의 타협점을 찾는다. 착각하지 말라! 주님께서는 우리의 온전한 헌신을 기대하신다. 좁은 길을 넓혀서 쉽게 통과하려는 시도를 멈추라!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전부를 원하신다. 주님께서는 규칙에서 벗어난 섬김과 노력에 대해 결코 영원한 면류관을 씌워 주시지 않는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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