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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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와 빌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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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1월호>

안드레와 빌립은 다른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데려오는 구령자였다(요 1:35-51). 안드레가 그의 형제 시몬을 만나서 했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41절)라는 말은 우리의 형제에게 전해야 할 좋은 소식이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을 찾아오셨고(43,44절). 빌립은 그 예수님을 증거했다(45-51절).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주님께로 데려오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안드레로 인해 시몬 베드로는 구원받을 수 있었고, 훗날 베드로는 사도행전 12장에 이르기까지 주요 사도로서 활동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전파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시라는 점이다. 안드레는 자기 형제 베드로를 그리스도께로 데려오고(41절), 빌립은 나다나엘을 주님께 데려왔다(45-47절). 후에는 헬라인들도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뵙고자 했다(요 12:20-22). 쉽게 말해 안드레와 빌립은 복음을 전하는 개인 구령자였다.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았든지 받지 않았든지,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증인이자 구령자로 살아야 한다. 침례인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으로서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한 것과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임무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대속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신 구주이심을 전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장사되셨으며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신 “살아 계신 구주,” 곧 우리의 죄들을 그분의 몸에 지신 구주를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해야 한다(벧전 2:24).


안드레가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 처음 한 일은 자기 형제를 그리스도께로 데려오는 것이었다!(요 1:41,42) 안드레는 베드로에게 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어!”라고 말하고는 그를 그리스도께 데려왔다. 정말 훌륭한 본이다. 그리스도인이구원받고 첫 번째로 해야 할 일도 다른 누군가를 그리스도께 이겨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당신의 증거를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당신이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온화하고 달콤하고 그럴듯하게 치장한복음 아닌 복음 전파를 세상은 받아들일지 몰라도, 그리스도인이 거리에 서서 “죄인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다”고 소리치면 그것을 좋아할 세상의 죄인은 아무도 없다. 그러한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아 사역에 뛰어들면 그 즉시 주변에 적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런 설교를 싫어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이유도 바로 사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그분의 설교 때문이었다. 예수님도, 스테판도, 사도 바울도, 침례인 요한도 듣기 좋은 긍정적인 말을 설교하는 설교자가 아니었다. 침례인 요한이 참수당한 이유 역시 그가 설교한 내용 때문이었다(딤후 4:1-3).


안드레는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주님을 전파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게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하셨다. 또한 주님은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들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라고 책망하셨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설교라고 부른다면, 그런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물론 공개적으로 거리에 서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증인이요 구령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나는 젊은이들이 가족을 주님께로 이겨오려고 수년 동안 애쓰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 경우에 부모는 자식이 전하는 복음을 전혀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들은 성경도, 성경의 진리도, 설교자도 경멸한다. 그들은 회칠한 바리새인처럼 로마카톨릭교도로서 살다가 죽어 지옥에 가는 길을 택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경험이 있어 공감한다. 구원받은 뒤 내 부모를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려고 여러 번 시도했었다.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고, 8년 동안 매년 전도지를 보내드렸다. 내가 아는 한, 두 분은 그리스도 없이 죽어서 지금 지옥에 있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나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옥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롬 3:4).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를 반석이 아니라 『돌』(요 1:42)이라고 부르셨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16:18에서 『이 반석 위에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을 때 『이 반석』은 시몬 베드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그 반석은 예수님 자신이셨다(고전 10:4). 베드로는 하나의 돌에 불과했다. 돌과 반석은 라틴어로 각기 “페트라스”와 “페트람”으로 서로 다르고, 헬라어로도 “페트로스”와“페트라”로 서로 다르다. 설사 라틴어와 헬라어를 모른다 해도 <킹제임스성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돌(stone)이 반석(rock)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베드로뿐 아니라 빌립도 구령자였다(요 1:43-45). 빌립이 구원받자 첫 번째로 한 일은 나다나엘에게 가서 “나다나엘, 내가 진리를 찾았어! 와서 봐!”라고 한 것이었다. 한 사람이 구원받아 진리를 알고 사랑하게 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게 하는 데 힘써야 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야 “왜 당신의 종교를 강요하느냐?”라고 하겠지만, 진리를 맛보았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도 맛보게 해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의무이다. 이 땅 어떤 곳에서는 그렇게 구령하고 진리를 증거하는 것을 “포교”라고 부르며 주시하고 금지시키고 감옥에도 집어넣는다. 그러나 진리를 들었다면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증거하고 진리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드레와 빌립은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안드레는 가서 자기 형제를 그리스도께로 데려왔다. 빌립 또한 나다나엘에게 가서 “우리가 찾고 있던 그분을 만났어. 어서 와서 그분을 좀 만나 보게!”라고 했다. 물론 빌립이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실수였다. 주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그의 양자였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했을 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요 1:46)라고 했다. 세상에는 회의론, 실존주의, 과학적 실용주의, 실증주의 등이 있다. 회의론자는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라고 하는 자이다. 실증주의자는 “한번 시도해 보면 알 것 아니냐!”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 사람들은 “성경은 오류투성이예요!”라고 한다. (그러나 정말 오류가 있다면 내게 보여 주기를 바란다.) 그들은 “그런 기적을 어떻게 믿어요?”라고 하거나,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면 부처도 구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어 본 적이 없다. 또한 그들은“모든 종교에는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다.”라고 하는데, 실로 그들은 모든 종교를 체험적으로 검증해 보고서 그렇게 말하는것인가?


사람들은 이 종교가 어떻고 저 종교가 어떻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종교들의 창시자들 가운데 누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노래를 그처럼 많이 만들어 내게 했는가? 내가 가진 찬송가에만 675곡의 노래가 실려 있다. 노래는 기쁨의 표현이자열매가 아닌가! 어떤 종교 창시자나 이념 주창자가 자신들의 추종자들의 자발적인 작사, 작곡을 유도한 적이 있는가?예수님을 찬양하는 노래는 800곡이 훨씬 넘는다.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 나다나엘의 이 말을 들은 빌립은 그에게 “그럼 한번 시도해 봐!”라고했다. 성경은 『오,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시 34:8). 만약 당신이 회의론자이고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고 무슨 일이 생기는지 지켜보면 된다. 그런데 그럴 용기가 당신에게 있는가?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관하여 말씀하시기를 “보라,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에게는 간사함이 없도다.”라고 하시니』(요 1:47). 나다나엘은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주님은 그를 보기도 전에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아셨다. 딱 한 번 보시고 “저 사람은 장난으로라도 속일 사람이 아냐!”라고 하신 것이다. 나다나엘은 가식적인 가면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간사함이나 위선적인 동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증오를 마음에 숨겨 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있는 그대로, 그 사람 그대로인 사람이었다.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령자였다. 훗날 빌립은 설교도 하게 되고 한 지역 교회의 집사가 된다(행6:1-6). 또한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마리아에서의 부흥에 이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요한복음12장에서는 헬라인들이 이 두 사람에게 와서 예수님을 보기 원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이 없었지만, 교훈적으로 보자면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알 수 있다(요 12:21). 다른 상세한 설명이 성경에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두 제자들은 이전에 주님을 헬라인들에게 모셔간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나중에 유월절이 되었을때 요한복음 12장에서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알았던 헬라인들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주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알게 되고 그 소식을 가져가 그리스에 전했을 것이다.


한번은 어떤 친구가 내 앞에 앉아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피트, 내게 예수님을 보여 줘! 예수님을 보여 줘!”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요구였다. 그런데 때마침 나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라, Tell It Like It Is>라는 내가 만든 그림 전도지가 있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머리가 가시관에 찔려서 얼굴 전체에 피가 흘러내리는 그림이 있었는데, 나는 그 그림을 보여 주면서 “여기 계시네!”라고 했다. 그 늙은 친구는 정말로 엉엉 울면서 “오 하나님! 오 하나님!”이라고 소리쳤다.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요 12:21).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당신을 통해서이다!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로 결단했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존중하실 것이다. 세상은 당신을 미워하고 욕하며, 심지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사람들까지도 당신을 싫어할 수 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요 12:24). 그리스도인인 당신의 삶과 섬김에 능력이 있게 되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당신도 동참하고, 그분의 장사되심과 부활에도 당신이 동참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있다(롬 6:1-13). 당신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혀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갈5:24). 새 사람은 육신의 일들이 아니라 성령님을 따라 행한다(갈 5장).




사복음서의 안드레와 빌립은 구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좋은 예표가 된다. 당시에 그들은 십자가의 보혈이 흘려지기 전에 살았던 유대인 제자들이었지만, 안티옥에서 처음 『그리스도인』(행 11:26)이라고 불린 그리스도인 증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증거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말하자면 당신은 세상 죄인들에게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요1:29). 신실한 증인은 사실을 인지하고 그것을 사실 그대로 증거한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오실 때까지 그분의 신실한 증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이 바로 우리 각자의 인생 모토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니 그러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게 증인이 되리라』(행 1:8).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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