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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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겁쟁이 헤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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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11월호>

헤롯은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겁이 많은 “최고의 겁쟁이”였다. 그는 침례인 요한의 사역으로 양심이 깨어났고 종종 요한의 말을 기쁘게 듣기도 했지만, 육신을 흥분시키는 춤에 빠져든 그가 침례인 요한의 목을 베라고 명령한 이후로 그의 양심은 화인 맞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직전 그를 만나신 자리에서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눅 23:8,9). 하나님께서는 양심이 화인 맞고 더럽혀진 자를 그렇게 대하신다. 그런 자와 대화하는 것 자체를 거절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빌라도나 헤롯 같은 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이 주먹과 칼을 휘두르는 길거리 싸움판에서는 뭐라도 되었을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 둘 다 “도덕적인 면”에서는 “완전히 겁쟁이”라는 점이다. 세상은 그런 겁쟁이들로 넘쳐 난다. 물론 그 누구라도 겁쟁이가 될 수 있다. 다윗도 죽을 것이 두려워 미친 사람처럼 행동한 적이 있었고(삼상 21:10-15),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도 화가 난 아브넬이 왕국을 다윗에게 돌리겠다고 협박하자 겁을 집어먹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삼하 3:8-11). 초림 당시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소경의 부모도 회당에서 쫓겨날 것이 두려워 자기 아들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하기를 거절했다(요 9:18-23). 성경에 “두려워 말라.”라는 명령이 자주 나오는 것은 인간이 겁쟁이라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 특히 장차 불과 유황이 타는 못으로 들어갈 대상에 “두려워하는 자들”도 포함되어 있다(계 21:8). 이상하지 않은가? 왜 두려워하는 자가 지옥에 가는 것인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내게 성경에 서명해 달라고 부탁하면, 으레 “여호수아 1:9”의 말씀을 써 준다. 『내가 네게 명령하지 아니하였느냐? 강건하고 담대하라. 무서워 말고 낙심치 말라. 이는 주 네 하나님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함이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군가가 용기를 북돋워 주는 일이 필요하다. 이따금 우리도 두려워한다. 엘리야 역시 450명의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면서도, 그 이후에 날아든 이세벨의 편지 한 통에 입술이 새파래지지 않았던가? 여호수아도 위대한 군대 대장이었지만 땅에 얼굴을 처박고 말았다(수 7:6). 정말이지 죽을 만큼 두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역경이 우리에게도 닥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사랑하는 성도들을 향해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신다. “비겁함은 쉽게 전염된다!” “조지 패튼” 장군이 한 말이다. 그렇다면 당시 헤롯이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인가?

■ 헤롯은 “자신의 양심”을 두려워했다. ■

헤롯의 “양심”은 침례인 요한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양심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든다. 한편 선한 양심을 가진 자는 태풍 속에서도 단잠을 잘 수 있다. 나의 선친은 자주 이렇게 말했다. “정직한 사람은 자기 마음의 평안을 베개 삼아 잠을 잔다.”
마틴 루터는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묶여 있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에 서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경을 “최종 권위”로 믿지 않고 있다면, 그의 양심은 그 어떤 것에도 간섭받지 않는다는 것이 되는데, 다시 말해 그는 “무법자”인 것이다. 법이 없는 자이고, 자신 스스로 하나님이 된 자다. 따라서 반드시 <킹제임스성경>이 유일한 최종 권위가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 역시 양심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행 23:1, 롬 9:1, 딤전 4:2 등). 당신의 양심은 당신 안에서 작고 미세한 음성으로 소리를 낸다. 분명 헤롯의 양심은 그가 하는 짓이 옳지 않다고 말했으며, 그런 양심의 소리로 인해 그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 헤롯은 “침례인 요한”을 두려워했다. ■

헤롯은 “성경 공포증”에 시달렸다. 성경이 무서웠고, 진리가 두려웠으며, 침례인 요한이 겁이 났다. 그래서 헤롯은 얼마간의 개혁은 이루었다 해도 구원을 받지는 못했다. “외적인 개혁”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가 바로 “헤롯”인 것이다.
대개 통치자들은 진리를 접할 때 헤롯이나 빌라도처럼 반응한다. 성경대로 믿는 설교자가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치자에게 담대히 전파한 사례를 성경에서 읽어 본 적이 있는가? 선지자 미카야가 아합 왕에게 한 말을 들어 보라. 『주께서 살아 계시는 한,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말하리라』(왕상 22:14). 아합이 출정하면서 “그자를 감옥에 가두라. 내가 돌아오면 그를 처리하겠다.”라고 말했을 때, 선지자 미카야는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돌아온다면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 될 거요. 하지만 당신은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것이오!”(왕상 22:28)
그런가 하면 선지자 아모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 오염된 땅에서 죽을 것이고, 당신의 아내는 창녀가 될 것이며, 당신의 자녀들은 칼에 쓰러질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엄중한 말씀이오!”(암 7:17)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를 대한 방식과(요 19:11) 선지자 예레미야가 시드키야를 대한 방식과 바울이 펠릭스와 아그립파를 대한 방식을 살펴보라. 이상의 통치자들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서도 그대로 실행할 “용기”가 없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대통령, 국무총리, 상원 의원, 하원 의원 등의 정치인들이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 있는가? 그들은 진리를 마주하려 하지도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는다. 더욱이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자들을 수용하지도 않는다.

■ 헤롯은 “자신의 아내”를 두려워했다. ■

헤롯은 그의 아내가 그에게 불평하자 침례인 요한을 투옥했다. 그는 자신이 요한을 투옥하지 않으면 그녀가 자기에게 어떻게라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어떤 소년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빠는 공룡이 무서워요?” 그러자 아빠가 말했다. “아니!” “그럼 큰 곰은 무서워요?” “아니!” “그럼, 고릴라는요?” “무섭지 않단다.” 그러자 소년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 “그럼, 아빠는 엄마 빼고 무서워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 헤롯은 “대중의 의견”을 두려워했다. ■

헤롯은 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해 살피는 사람이었다. 처음에 침례인 요한을 죽이지 않은 것도 사람들이 그를 선지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 역시 사람들의 의견과 반응을 두려워했다(마 21:24-27).
이렇듯 헤롯이 대중의 의견을 두려워했지만, 사실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4장에서 사도 바울에게 일어난 일을 기억하는가? 당시 바울의 일행이 설교를 다 마쳤을 때, 그곳 성읍 사람들은 “신들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내려오셨다!”라고 말했다(11절).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도 안 지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바울을 돌로 쳐서 죽게 내버려 두었다. 이것이 바로 대중들의 실상이다. 사도행전 28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멜리테 섬의 원주민들은 독사가 바울을 문 것을 보고 ‘공의가 그를 살려 두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다(4절). 그리고 그가 금방 고꾸라져 죽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자, 그들은 생각을 바꾸어 “그는 신이라!”라고 말했다(6절). 이런 것이 바로 대중들의 의견이요, 신문과 갤럽의 여론 조사의 실상이다.

당신은 설교자로 부르심을 받았는가? 그렇다면 내가 좋은 조언 하나 해 주겠다. 우선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비난하는 말들을 모두 믿지 말라. 그런 말들을 듣고 낙담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말들은 신경 쓸 필요조차 없다. 또한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칭찬하는 말들도 모두 믿지 말라. 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이 있도다.』(막 11:9)라는 백성들의 찬양 소리를 들으셨다. 그런데 그로부터 3일 뒤에 백성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막 15:14)라고 소리를 질렀다.

■ 헤롯은 “그의 동료들”을 두려워했다. ■

헤롯은 그의 동료들이 자기를 향해 뭐라고 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악한 사귐은 좋은 행실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 15:33). 당신은 지금 함께 어울리는 동료들에 맞서서 진리를 위해 일어날 수 있는가? 이를 위해 용기를 내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성도도 있다.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
사울이 아말렉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사무엘은 그에게 “왜 왕께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사울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아말렉인들을 다 죽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사무엘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 귀에 들리는 이 양들의 울음 소리와 내가 듣고 있는 소들의 울음 소리는 어찌된 것이니이까?” 하니』(삼상 15:14) 사울은 이렇게 대답했다. “백성들이 양들과 소들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을 남겨 둔 것입니다.” 사울은 “겁쟁이”였다! 다시 말해 백성이 짐승들을 살려 주길 원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두 죽였어야 했던 것이다.
변개된 새로운 성서들을 발행하면서 <킹제임스성경>을 공격하는 자들은 남들로부터 받는 “조롱”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두려워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심판석”보다 더 두려워한다. 그런 자들은 동료들이 무슨 비난의 말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서 <킹제임스성경>을 믿는 믿음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문제다. 그들은 자기 동료들을 무서워한다. “비겁함은 쉽게 전염된다!”

만약 구원받기 전에 어울렸던 친구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이라면, 그 옛 친구들과의 관계를 모두 끊어야 한다. 나의 오랜 친구 “글렌 슝크”에게는 함께 모여 포커로 도박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구원받고 난 후에도 그는 그 정기 모임에 포커 게임을 하러 갔다. 당시 글렌은 구원받은 지 이틀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심지어 요한복음이 성경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한편 여섯 명이 함께 모여 포커를 하던 중에 성령님께서 그의 안에 역사하셨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서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 지난주에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나 말이지, 구원받았어! 자네들도 구원받아야 해!”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인지라 동료들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고, 그러던 중 가장 나이 많은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글렌, 네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냐?” 그러자 글렌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래, 맞아.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지!”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돈을 들고 그 자리를 떠났다. 정말로 잘한 일이다! 나도 구원받고 난 뒤에 어떻게 하면 옛날에 어울리던 친구들을 끊을 수 있을까 고민한 적이 있다. 그에 관한 좋은 방법은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악한 사귐은 좋은 행실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 15:33).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황금 사자”라는 사단 하나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 바스토뉴 “슈네 아이펠”이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었는데, 처음에는 “한 사람”이 자기 소총을 내려놓고 항복했다. 그러자 그가 속한 분대가 그를 따라 항복했고, 그다음에는 소대가, 그다음에는 대대가, 그다음에는 여단이, 그다음에는 사단 전체가 그렇게 한 것이다. 결국 그들은 완전히 궤멸되고 말았다. 조지 패튼이 말한 대로 “비겁함은 쉽게 전염된다!” 군대 내에서도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비겁함은 전염성이 강하다. 기독교 대학들과 신학 대학들에서 타락하고 비겁한 겁쟁이 같으며 반쯤은 계집애 같은 교수들이 여기가 틀렸고 저기가 틀렸다고 말하면서 <킹제임스성경>을 고치는 이유는 결국 “두려움” 때문인데, 곧 그렇게 고치지 않으면 다른 “지식인들”이 그들을 <킹제임스성경>을 믿는 소위 “광신자”로 볼까 봐 두려운 것이다. 이런 종교 지도자들이 이런 식으로 <킹제임스성경>을 비평하기 시작하자,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그들의 나쁜 행실을 따르고 말았다. “비겁함은 쉽게 전염된다!”

요압은 “4 대 1”이라는 완전한 열세 국면에서 앞뒤로 포위당하기까지 한 전쟁에 뛰어들어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삼하 10:6-14). 이것이 바로 “용기”다. “용기는 눈먼 자가 입는 갑옷이요, 절망을 이겨 낸 굳은살이며, 두려움을 기도로 승화시킨 것이다.”
『남자답게 싸우자. 주께서 좋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리라』(삼하 10:12). 여기에서 “전자”는 우리가 할 일이고, “후자”는 주님께서 하실 일이다. 우리는 전쟁에 이기려고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싸우려고 뛰어든다. 그렇다면 전쟁의 승패는 누가 결정하는가?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우리가 지기를 원하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도 할 수 없다. 물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반면에 주님께서 우리가 이기길 원하신다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담대하라. 그리고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남자답게 싸우자. 주께서 좋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리라』(삼하 10:12).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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