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믿음의 경기장에서 분류

푯대를 향해 쫓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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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12월호>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는데(요일 5:13), 믿음으로 얻는 그 "새 생명"이 결코 늙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원한 젊음의 샘"을 찾은 사람들이다(고후 4:16). 따라서 진정으로 건강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출발점에서의 활력을 결승점까지 유지해야 하는 경주자와 같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주자들이 『빛을 받고 난 후』(히 10:32) 점차 시간이 지나가면서 처음에 가졌던 활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영적 생명력도 약해져서 손은 맥없이 처지고 무릎이 쇠약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히 12:12). 믿음이 흔들리고 지체들 간의 사랑도 차갑게 식으며 함께 모이는 것을 저버리기까지 한다. 경기장에서 달리기는 고사하고 마치 병이 들어 몸이 마비된 환자처럼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발걸음을 겨우 떼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그렇게 한눈을 팔다가 목표를 놓치고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단 말인가?

사탄은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복들을 풍성하게 누리고 감사가 깃든 간증으로 서로를 북돋워 주는 모습에 치를 떤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런 기쁨을 빼앗아서 성도들을 약하게 만들려고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세상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하고 조롱하며 경멸하게 하는데, 이런 세상에서는 물질적으로 손해를 입거나 따돌림을 당해도 적법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고난이 연거푸 닥치고 박해가 좀처럼 누그러질 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하면, 결국 성도들은 지치고 사탄은 승리를 예감하며 음흉하게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죄와 맞서서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히 12:4) 않았다면, 아무리 상황이 심각하게 느껴져도 아직은 고난의 정점에 이르지 않은 것이다. 히브리서 11:35-37에서 보지 않았던가! 끔찍한 고문, 잔혹한 조롱과 채찍질의 시련, 돌로 맞고 톱으로 켜지고 칼에 살해되고 굶어 죽는 비극 등이 여전히 성도들이 달려가야 할 경주로에 도사리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극심한 고통으로부터 놓이는 길은 간단하다. 그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을 부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선진들은 고난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보다는 『더 좋은 부활』(히 11:35)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현재 극심한 고난으로 짓눌려 있는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 그런 믿음의 영웅들을 만났을 때 "제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고난들을 어떻게 견뎌 냈는지 잘 모르실 거예요!"라고 쉽게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필자는 여행할 때면 종종 "순교지"를 방문하는데, 남부 모라비아에 있는 무시무시한 지하 감옥, 1620년에 27명의 성도들이 참수를 당한 프라하, 끔찍한 고통을 견뎌 낸 성도들이 "위로의 성경 구절들"을 새겨 놓은 벽면을 볼 수 있는 런던 템스 강가에 세워진 탑의 내부 감옥, 사보나롤라가 화형을 당한 이탈리아 플로렌스에 있는 광장, 박해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비밀스럽게 모인 고대 로마의 카타콤, 2,3세기에 야수들에게 잡아먹힌 성도들과 관련해서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로마의 콜로세움 등이다.

몇 년 전 스코틀랜드의 한 광장에서 대형 차량과 확성기를 세워 놓고 복음을 전하면서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것도 1688년에 존 리스베트가 믿음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바로 그 장소에서 말이다. 그때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가 목숨을 내놓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던 장소에서 우리가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웠다. 집회가 끝난 후 비록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친구와 함께 스코틀랜드 남서부 킬마녹에 위치한 유서가 깊은 한 묘지에도 다녀왔다. 거기에는 1650년대에 성경대로 믿는 믿음에서 물러서지 않았다가 죽임당한 7명의 성도들이 묻혀 있었다. 자신들의 생명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했던 성도들의 무덤 앞에 서 있자니 얼마나 나 자신이 보잘것없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쉽게 타협하며 불이익을 당할까봐 겁을 내고 조롱과 무시와 비웃음으로 위축이 되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데 필요한 비용을 미리 계산한 다음 그만한 값을 기꺼이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 믿음의 투사를 찾으신다. 구원받은 성도들이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피를 흘리기까지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가?

"기도 생활"이 느슨해지면, 모임에 참여하는 열의가 사그라지고 영적인 힘도 매우 쇠약해진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찬"처럼 "멸망의 도시"를 떠나 "하늘의 도성"을 향해 가고는 있지만, 줄줄이 닥쳐오는 어려움에 지쳐 버린 나머지 이제는 맥없이 처진 손과 쇠약한 무릎으로 절뚝거리는 신세가 되고 만다. 경기장에서 잘 달리던 선수가 이제는 의욕을 상실하여 기권할 기색이 확연하고, 전장에서 싸우던 군사가 전의를 잃어서 백기를 들려는 기미가 너무나 역력한 것이다.

자, 당신은 어떤가?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로 분투하며 모이기를 힘쓰고 동료 순례자들을 사랑으로 도우려 하고 있는가? 성도들 간의 불화로 외부의 대적들에게 집중포화 해야 할 전력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번번이 흡족할 만큼 유익을 취해 가는 사탄의 계략에 아직도 무지한 것은 아닌가?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하는 삶을 지속하려면 예수님을 바라보는 방법밖에 없다. 더 민감하게 주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써 다시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1. 예수님을 바라보면 활력이 회복된다. 피로가 사라지고 절뚝거리던 다리도 고침을 받아 더 이상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된다. 용기, 자신감, 사기 등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경시한 결과 부주의하게 대처하지도 않고, 과대평가한 나머지 낙심을 불러들이지도 않는다. 이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잣대를 가지고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그 고통의 크기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임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갈보리에서 그분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심으로써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증명해 보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않겠는가?(롬 8:32)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우리를 구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슾 3:17)

2. 예수님을 바라보면 참된 평안과 교제가 회복된다. 성도들 간의 분쟁과 갈등은 모두를 지치게 만들고 활력을 앗아간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논쟁거리가 가치 있다는 착각은 교회 전체의 영적인 힘만 고갈시킬 뿐이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화평함을 추구하면 지체들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게 되고, 온 힘을 다해 거룩함을 추구하면 하나님을 향해 올바른 태도를 갖게 된다(히 12:14). 화평함은 이 땅에 있는 성도들과의 교제를, 거룩함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풍성히 누리게 해 준다. 그런데 이 두 요소는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부지런히 달려야 얻을 수 있다.

"화평함"은 단순히 다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가 하나 된 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랑의 특성과 매우 비슷하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랑을 통해 태어났다. 교회의 생명이 바로 그 영원한 사랑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사랑에 의해서 살고,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동일하게 거하셔서 온전하게 될 휴거의 때를 교회 전체가 똑같이 소망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따라서 우리 각자는 크든지 작든지 서로 다른 점들을 갖고 있을지라도 마땅히 사랑을 통해 한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각각을 받아들이셨듯이 화평함의 손을 내밀어서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여야 한 다. 사랑은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다. 단순한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의지의 발현이자 실제적인 행동이다. 또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지를 이 땅에서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는 통로이다. 자신이 『자비로운 마음과 친절과 마음의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골 3:12)으로 지체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사랑하면 지체들과의 해묵은 갈등도 묻어 버릴 수 있다. 사랑하면 어두운 과거를 잊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사랑하면 생명이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명적인 분열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 사랑하면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모든 노력을 집약시켜서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들을 이룰 수 있다. 마음이 차가운 사람은 늘 춥게 느끼고 따뜻한 사람은 주변을 따뜻하게 만든다. 당신은 주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어떻게 대하는가?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일에 진력하는 성도가 진정으로 다른 성도들을 섬길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섬겨야 열매도 풍성하게 거둘 수 있다.

3. 예수님을 바라보면 자신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음을 깨닫게 된다. 즉 우주의 전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을 베푸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성도 각자에게 가식 없는 사랑으로 서로를 섬겨야 할 의무와 특권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사 35:3,4). 주변에 영적으로 절뚝거리는 연약한 성도들이 있는가?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당신을 통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의 필요를 저버리지 말라. 그들이 처한 위험한 현실을 보게 되면 반드시 『서로 생각하여 사랑과 선행을 격려』(히 10:24)해야 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그저 "감정적인 느낌" 정도로만 반응하지 말라. 실제로 실행하는 근육을 만들고 그 힘을 매일의 삶에서 드러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진심어린 "행동"을 보기 원하시는데, 그 점에 있어서는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한낮의 따가운 햇볕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일꾼이 될 수 없고, 그저 관중석에만 앉아 있으려 하는 사람 역시 승자가 될 수 없다. 경주자는 모든 힘을 움직이는 데 쏟아야 한다. 옛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잘할' 만한 가치도 있는 것이다."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자 할 때, 자신을 희생시키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면 사실 그 일은 할 필요가 없다.

푯대를 향해 더욱 힘써서(벧후 1:10)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쫓아가야 한다(빌 3:12). 열심을 내서(딛 2:14) 사랑의 수고를(히 6:10) 해야 한다. 게으른 관중이나 수동적인 비판자는 어디에나 있으며, 또한 그 수도 많다. 하지만 일꾼은 적다(마 9:37). 그런 상황에서 당신도 그저 쳐다만 보고 있을 텐가? 열심을 내려면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대다수의 성도들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 수준에서만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섬김에는 "진정한 가치"가 없다. 씨를 눈물로 뿌렸을 때만이 기쁨으로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시 126:5). 노력이나 고통 또는 희생이 필요치 않은 일들이 부담도 없고 쉬운 일이라는 생각에 그런 일들만 하려고 하는 성도는 본향으로 들어갈 때 빈손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게 될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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