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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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서 사라진 가장 중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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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5월호>

침샘을 자극하는 맛깔스런 요리를 한입 맛보았는데 미간을 찡그리면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본 경험이 한두 번은 있을 것이다. 소금 간이 안 된 계란 요리라든가, 향신 채소로 잡내가 제거되지 않은 고기 요리처럼 분명 맛이 없지는 않으나 무언가 중요한 재료가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꼭 있어야 하는 무언가”가 없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3:1-7을 언급하면서 마지막 날들에 찾아보기 힘든 것이 있다고 말한다. 『또 이것을 알라.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오리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고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고, 화해하지 아니하며, 모함하고 절제하지 못하며, 사납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고 분별이 없으며, 자만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이들 중에는 가정집에 몰래 들어가 어리석은 여인들을 사로잡아 죄들을 짊어지게 하여 여러 가지 정욕으로 끌려가게 하는 자들이 있나니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는 결코 이를 수 없느니라.』 이 본문에는 단 하나의 긍정적인 요소도 없다. 즉 마지막 날들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때이다. 다윈이 옳았다면 사람들이 보다 더 훌륭해지고 품격 있으며 인내심도 깊어져야 하지만 이 마지막 날들에는 단 하나의 긍정적인 요소도 없다. 특히 2절의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와 4절의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는 말씀에 주목하라. 이 본문은 사랑에 대해서 두 가지를 경고하고 있다. 즉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에 대한 것이고, 또 잘못된 것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하나의 요소가 없는 것이고, 또 다른 문제는 잘못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없고 부족한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자. 일단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릴 건물들이 부족하지는 않다. 뷰챔 빅(Beauchamp Vick)과 존 롤링즈(John Rawlings)도 큰 교회 건물에서 사역했다. 펜사콜라에서는 제일침례교회가 큰 건물을 지었다. 건축 비용으로 수백만 달러가 소요된 건물들도 여러 채 올라가고 있고, 모슬렘들도 미국에 수백만 달러가 드는 건물들을 짓고 있다. 펜사콜라기독대학과 리버티대학도 큰 건물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로마에는 성베드로성당이, 캘리포니아엔 1,800만 달러(1980년 기준)를 쏟아부어 건축한 수정교회가 있다(수정교회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지난 2012년 5,770만 달러에 로마카톨릭에게 매각되었다 - 역자 주).
설교자들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이단에 속한 설교자들도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지 않은 자들도 많으며, 구원받지 않은 설교자들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나는 1980년대 어느 날에 오하이오주의 신시내티에 방문했다가 그곳의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려 보았는데 거기에 등재된 설교자들의 전화번호만 1,000개에 달했다. 당시 댈러스나 포트워스에는 1,500개가 넘는 설교자 연락처가 있었다. 이 정도면 유럽이나 아시아, 아프리카의 한 나라에 있는 설교자들의 수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이는 1901년 이후로 미국의 기독교 대학들이 매년 2,000명이 넘는 사역자 후보생을 마치 프레스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해 내듯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은 전혀 아랑곳 않고 천편일률적으로 찍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모자란 것도 아니다. 미국에 있는 기독교 대학들 중의 일부는 선교보다 캠퍼스 바닥에 까는 잔디에 더 많은 돈을 쓰기도 한다. 이런 대학들은 물 쓰듯 해도 괜찮을 만큼 많은 돈이 있다. 기독교 대학들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무디, 휘튼, 풀러, 웨이크포레스트, 베일러 등 수많은 대학들이 있다. 그렇지만 미국은 점점 더 멍청해져 가고, 기독교 대학들이 많을수록 더 어리석어진다. 1800년대의 보통 미국인이 알았던 성경 지식 수준보다 선진 문물이 발달한 지금 시점의 사람들이 성경에 더 무지하다. 사람들이 성경을 인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점을 반증한다. 옛날에는 무슨 주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성경을 빈번하게 인용했지만 지금은 인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을 암송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교육 프로그램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교회 건축 프로그램, 자금 확보 프로그램, 스포츠 프로그램, 상담 프로그램, 부부 프로그램, 독신자 프로그램 등 정말 없는 게 없다.


선교사들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물론 전 세계적인 필요에 비해서는 적지만, 지금 미국에는 지난 4세기 동안 파송된 선교사 수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선교사들이 이름을 내걸고 있다. 독립적인 선교위원회만 해도 50개가 넘는다. 미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선교사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정통”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미국에는 충분히 많은 “정통”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러나 정통이라고 해서 올바른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근본주의 정통 집회에 가 보면, 온갖 주제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강연한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성경을 고치는 학자들을 성경으로 비평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믿지도 않는 <킹제임스성경>을 강단에서 써 달라고 요구한다. <킹제임스성경>의 서문에 보면, 교황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자기기만에 빠진 형제들이 그들을 공격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천명한 부분이 있다. 즉 칼빈주의자들과 청교도들이 자신들을 공격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정통으로 보이지만 속은 마귀로 꽉 찬 자들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간파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걷잡을 수 없는 곰팡이 같은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 디모데후서 3장에서 바울은 무엇이 문제인지 분명하게 밝힌다. 바울이 말한 문제는 바로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크다고 밝혔다. 당신은 지역 교회 안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가 “사랑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도 성경을 읽을 정도로 성경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 공부를 하지 않는 이유도 성경을 공부할 정도로 성경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이유도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할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이유도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올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주일 오후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가? 그것도 사랑 문제다. 수요기도회에 나오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사랑 문제다. 소리 지르고 우는 아기를 유아방에 데려가지 않고 굳이 예배실에 데리고 앉아 있는가? 자기 아기를 유아방에 데려다 놓을 만큼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지역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사랑 문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땅히 사랑해야 하듯이 사랑한다면 모든 문제가 스스로 정리될 것이다. 그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오히려 자신을 더 사랑하고 쾌락을 더 사랑하는 데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 결혼을 하고도 배우자에게 신실하지 않다. 자녀들은 부모가 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신이야말로 지상에서 걸어다니는 존재 중에 가장 흠모할 대상이라고, 혹은 삼위일체의 네 번째 구성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세대는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에게 연민을 갖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혀가 굳어 버리고 입이 비뚤어진 설교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더 이상 지옥에 대해 설교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이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연민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성도들이 죄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그들이 구원받도록 하지 않는 이유는 죄인들을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우리가 가진 문제들보다 더 큰 문제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과 사귀고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다. 사정만 된다면 해외에 나가서 정말 세계 인구의 나머지 절반이 얼마나 어렵게 사는지 보는 것이 유익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그 실상을 목격한다면 정말 치를 떨지도 모른다. 반면 우리는 대개 건강하고 직업도 있고 밀린 청구서도 없고, 자식들도 다 구원받고 건강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에 대해 연민을 갖지 않는가? 그들은 지옥으로 내려가고 당신은 구원받지 않았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사랑이 문제이다.


이 세대는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에게 연민을 갖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설교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들이 더 이상 지옥에 대해 설교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이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연민을 갖지 않는 것이다. 성도들이 복음을 증거하여 죄인들이 구원받도록 하지 않는 이유는 죄인들을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라”는 명령은 성경에서 그 어떤 다른 계명들보다 자주 반복된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이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남편들아, 너희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같이 하라』(엡 5:25). 이외에 로마서 5:5; 13:8, 데살로니가전서 4:9, 갈라디아서 5:13, 요한일서 3:16; 4:11도 꼭 찾아 읽어 보라.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놓고 봤을 때 사랑하기에는 참 힘든 존재들이기에 우리 스스로도 우리 자신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기가 힘들다. 우리는 그렇게 생겨 먹었다. 당신을 볼 때 나는 나 중심으로 판단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자신의 머리와 몸을 중심으로 모든 사물을 본다. 조금의 사랑만 있어도 당신은 자신의 혀를 조심할 것이다. 성경은 당신이 자신의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당신은 마음을 아프게 한 형제를 용서하는가? 그를 사랑한다면 용서할 것이다. 그렇다. 교회 안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는 “사랑” 문제이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과는 떨어져 있어야 할 수도 있다. 필자도 정말 함께 어울리기 힘든 그리스도인을 만나면 그와 관계되지 않으려고 저만치 떨어져 있곤 한다. 함께하기 어려워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대신 복수심이나 쓴 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 그리스도인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독자들 대부분은 TV를 보고 자라서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 대개 사랑을 어떤 감정이나 외적으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사랑은 누군가를 동정하고 그를 도와주고 힘을 보태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말할 때 이것이 사랑이다. 단지 어깨를 두드리며 “이야, 여기서 만나니 정말 좋구만!”이라고 가식적으로 친한 척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건 거짓말에 능수능란한 정치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무엇이 부족한가? 바로 사랑이다.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관심이다. 당신은 자신이 바보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전도지 한 장을 내밀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는가? 천치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는가? 나는 왜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지 알고 있다. 바로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27년 동안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한번은 나의 옛 동료이자 밴드 리더인 시골뜨기 빌 핸드릭스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가 너와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하며 활동했을 때, 그때 내가 죽었다면 지옥에 갔을 거라는 거 알고 있었어?” 빌은 대답했다. “그럼, 알고 있었지!” “아니, 그럼 내가 밴드에서 활동하는 동안 줄곧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는 말이야?” 빌이 다시 대답했다. “알려줬어도 럭크만 너는 듣지도 않았을 거잖아.” 맞는 말이다. 나는 그의 말에 경청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구원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도 내게 그 사실을 알려줄 정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화 하나로 결론을 맺겠다. 언젠가 여덟 살 정도 된 딸이 아빠에게 생일 축하 카드를 써 주었다. 카드에는 딸이 빨간색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이 있었고, 이런 글을 써서 그의 코트에 핀으로 꽂아 놓았다. “아빠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빠야. 아빠에게 정말 받은 게 많아. 그래서 아빠에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 주려고 해. 아빠 주머니에 넣어 놨어.” 아빠가 주머니를 열어 보니 거기에는 딸이 반쯤 빨아먹은 딸기맛 둥근 막대사탕이 있었다. 일주일 전에 그가 사준 것이었다. 그런데 딸이 포장지를 뜯어 한두 시간 열심히 빨다가 문득 아빠 생각이 나자 다시 포장지에 싸서 아빠 주머니에 넣어 놓은 것이다. 딸은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막대사탕을 아빠에게 준 것이다. 말하자면 그건 그 아이의 “향유 옥합”이었다. 이게 바로 사랑이다. 당신도 이런 사랑을 알고 있는가? 이게 바로 사랑이며, 바로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사라진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만일 누구라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그분께 알려진 사람이라』(고전 8:3). 『무엇보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 이는 사랑이 허다한 죄들을 덮기 때문이니라』(벧전 4:8).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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