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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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권(父權)에 관한 진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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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9월호>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너희는 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 되는 영을 받았으므로 그에 따라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4,15).
위의 말씀에서 『아바』(Abba)는 히브리어로 “아버지”를 말한다. 성경에서 『바라바』(Barabbas)라는 이름도 이 단어에서 나왔다(“바~”는 “~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예를 들어 『바요나 시몬』은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바라바는 “바~”는 “~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아바”는 “아버지”라는 말이니까, 그것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자(바라바)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어떻게 헬라어, 히브리어를 운운하는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놓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 막 1:1)께서는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을 위해서 죽으셔야 했던 것이다(롬 5:12-15, 눅 3:38). 로마서 8장을 기록한 사도는 또한 갈라디아서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아들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시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니라』(갈 4:6,7).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면 하나님의 상속자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 상속자가 되었으며,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또한 주님과 함께 영광도 받을 것이다(롬 8:17).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다루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류의 형제 됨”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며 속임수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와서 너희 아비의 정욕을 행하고자 하는도다.』(요 8:44)라고 말씀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한 사람의 개종자를 얻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얻고 나면 그를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때문이라.』(마 23:15)고 하셨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모두 불순종의 자녀요 진노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다(엡 2:2,3).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중에 날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은 없다. 첫 번째 출생이 잘못되었기에 사람은 누구나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종교도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출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겠는가? 또한 침례가 출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없다. 첫 번째 출생의 문제에 대한 해법은 새로운 출생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요 3:7)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것을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인본주의자들은 유아 때 죽은 아기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반문한다. 이렇게 묻는 이유는 그들의 마귀적인 삶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그들 자신의 책임을 면하고 싶어서이다. 아기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물론 아기들이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아기들 또한 다른 모든 사람처럼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태어난다(엡 2:1).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경의 기록된 율법을 모르거나 양심의 도덕법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는 죄를 전가하시지 않는다(롬 4:8,15; 5:13, 신 1:39). 하나님께서는 아기들에게 죄를 묻지 않으신다. 아이는 자신이 행하는 잘못이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는 것임을 알기까지는 구원받지 않았어도 안전한 것이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 새로운 출생은 아기로 태어나 점점 자라난다는 점에서 몸의 출생과 유사하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과 그와 같은 것들 안에서 자라나야 한다(벧후 3:18, 엡 4:15). 아기가 젖을 먹어야 자라나듯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벧전 2:2). 아기는 배가 고프면 젖을 달라고 울기 마련이다.
거듭남의 가장 확실한 표시 중 하나는 기도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기도문”을 읊조리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지 못한 카톨릭, 힌두교도, 불교도, 모슬렘 등도 기도문을 반복한다(마 6:7). 지옥에 떨어져야 할 바리새인으로 살았던 바울도 구원받기 전에(빌 3:5) 기도했다(cf. 눅 18:11,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고 나서야 『그가 기도하고 있느니라.』고 말씀하신다(행 9:11).
구원에 있어서 가장 큰 복들 중 하나가 바로 기도하는 법, 곧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나는 죄인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행 16:31). 그러나 성령님의 책망을 받은 죄인은 자연스럽게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기 마련이다(롬 10:9,10,13).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접 기도”를 따라했다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기도는 행위이며 아무도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엡 2:8,9, 딛 3:5). 그러면서도 그들은 구원받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것 또한 행위가 될 것이며, 따라서 구원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은 여러 번 믿음의 고백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들 자신이 충분히 제대로 믿었거나 충분히 제대로 회개했는지, 기도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기도했는지, 기도했어야 했는데 기도하지 않았는지 그들 스스로 잘 모르기 때문이다.
잘 들어라! 만약 당신이 믿음과 진실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불러 당신을 구해 달라고 말씀드림으로 성경이 가르치시는 대로 했다면(고전 15:3,4), 기도를 했든지 안 했든지 당신은 구원받은 것이다. 당신에게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 여기 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또한 분명히 알 것이 있다. 당신의 죄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되었어도, 당신이 그 지불한 값을 취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즉 그 전가를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유익이 없다). 단지 “믿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귀들도 믿기 때문이다(약 2:19). 마귀들도 『한 분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다(눅 4:34). 마귀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마귀는 주님께서 죽으실 때 바로 주님 옆에 있었다(사 50:8). 마귀(the Devil)와 그 수하의 마귀들(devils)도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 유익을 주지는 않는 것이다. 따라서 단지 믿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 곧 영접해야 함을 알 수 있다(요 1:12).
그래서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나아오면 아기가 부모에게 소리 지르듯 하나님을 부르게 된다. 아기가 배고프다고 소리 지르면 그것은 젖을 먹고 싶다는 뜻이다. 아기는 돼지고기 바비큐나 스테이크는 먹을 수 없다. 목에 걸려 버릴 것이다. 아기는 젖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갓 구원받은 사람, 곧 아기는 『순수한 말씀의 젖』(벧전 2:2)을 먹고 싶어서 운다. 아기가 필요한 것은 성경의 간단하고 근본적인 진리들이지 『단단한 음식』 곧 고기가 아니다(히 5:12,14, cf. 고전 3:1,2).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처럼 창세기 1장 이전에 하나님의 미리 아심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영원한 “판결들”을 아기들에게 들이대서는 안 된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처럼 교회가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논쟁이나 사도행전의 경륜적 세부 사항들을 제시해서도 안 된다. 은사주의자들처럼 “성령 침례의 초기 증거”를 운운하여 아기에게 부담을 줘서도 안 된다. 마태복음 16장, 사도행전 2장, 히브리서 6장 등 어려운 장으로 성경을 가르쳐서도 안 된다. 그런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기들을 죽이는 것이다.] 고기는 아기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목에 걸려 죽게 한다. 아기는 성경의 근본적인 진리들 위에 확고한 기반을 다져야 한다. 소위 “믿음의 근본 사항들”로 알려진 진리들인데, 성경의 권위,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구원의 위대한 교리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등이다.

아이는 자라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크게 존경하게 된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뭐든지 다할 수 있고 뭐든지 고칠 수 있다고 믿는다. 도덕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자기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그 어린아이에게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도덕적인” 가정이란 두 변태성욕자가 함께 살면서 실제 “결혼”(?)을 한 것처럼 가장하고 아이들을 입양해서 “부모”(?)의 더러운 “생활양식”을 배우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 하나님을 어떻게 보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아빠”가 가장 위대한 분이시며, 모든 것을 고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뭔가를 하실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속성과 성품의 한계 안에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궁금해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뭔가를 하실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것을 하실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어린 그리스도인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뭔가를 구했는데 그 그리스도인이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과 성경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에 항상 “예스!”라고 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지 않는다거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받아서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당신은 “아빠”가 당신을 돌보고 계시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롬 8:28). 성경은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주께서도 자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신이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알아야 할 것은, 때때로 “아빠”가 매를 들기도 하신다는 사실이다. 때때로 아이는 매를 맞으면서 배워야 하기에 아버지는 매를 드신다(잠 22:15; 23:13,14; 29:15).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주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으시는 아들마다 매질하시느니라』(히 12:6). 이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징계가 필요할 때 당신에게 매를 드실 것이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오히려 당신이 그분의 자녀들 중 하나가 아니라는 뜻이다(히 12:7,8).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들 중 하나로서 매를 맞아야 할 때, 때때로 당신을 붙잡고 그분의 무릎 위에 놓고 때리기도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 특히 어린 아들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알아야 할 것이 또 있다. 자식은 아버지를 따라 한다. 필자는 밥존스대학 재학 시절 트레일러에서 살았었다. 어느 날 창밖으로 아들 데이비드(당시 7세)가 오렌지 박스 위에 올라가 설교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빠를 따라서 아빠가 한 대로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노스캐롤라이나 주 에이어 산에서 있었던 칼 래키(Carl Lackey)의 천막 집회에 데이비드의 아들들인 거스와 매튜를 함께 데리고 갔다. 쉬는 시간에 잠시 손자들을 보았는데, 거스가 앞에 서서 설교를 하고 있었고, 매튜는 그 앞에 앉아서 “아멘!”을 외치고 있었다. 거스가 “너는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해! 그래야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상을 받을 수 있어!”라고 하자, 매튜는 “아멘! 아멘!”을 외쳤다. 어린아이들은 아버지를 따라 한다. 아버지 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언젠가 테네시 주에서 부흥회에 초청받아 한 형제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수년간 고질적인 알코올중독자로 살았고, 구원받고 나서도 몇 년간 술을 마셨었다. 그가 필자에게 어떻게 술을 끊게 되었는지 말해 주었다. 어느 날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고, 8살 된 그의 아들도 맞은편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에게 “헛기침을 하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더니 그의 어린 아들도 그렇게 했다고 한다. 또 주님께서 “포갰던 다리를 펴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더니 아들 녀석도 보지도 않고 그대로 따라서 다리를 폈다고 한다. 그것을 보고 나서 그 형제는 일어나서 침실로 들어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가 오늘 이 방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저는 결코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승리를 주실 때까지 저는 여기 그대로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승리를 주시지 않으면 저는 여기 그대로 죽을 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을 겁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승리를 주셨다. 그 형제가 내게 그 얘기를 해줬을 때, 그는 이미 3년간 술을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10년 후 다시 그와 얘기를 나누며 확인했을 때도 그동안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고 했다. 왜인가? 자신의 아들이 아빠를 따라 하는 것을 보았고, 아들이 자신처럼 술주정뱅이가 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여, 당신도 당신의 “아빠”를 따라야 한다. 아버지께서 당신을 이끄시는 곳으로 가야 할 뿐 아니라(시 23:3,4) 그 본을 따라야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고난의 본을 남겨 놓으셔서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다고 말씀한다(벧전 2:21). 로마에 있는 술주정뱅이가 최고급 옷감으로 만든 예복을 입고 돌아다니고, 금으로 만든 보좌에 앉고, 방이 11,000개나 되는 궁에 살고, 방탄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전혀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본을 따르는 행위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진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기 원한다면, 리차드 움브란트(Richard Wurmbrand) 목사의 전기()와 하랄란 포포프(Haralan Popov) 목사의 전기 <고난 속에서 지킨 믿음>(말씀보존학회)을 읽어 보라. 이 두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본을 따랐다.

마지막으로 자녀는 아버지와 닮은 점이 있다. 물론 100% 닮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를 보면 다르게 생겼음에도 그 아버지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뭔가가 있다. 당신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연상케 하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한두 가지밖에 없을 수도 있지만 있어야 한다. 당신의 무언가는 당신의 아버지와 닮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마귀의 가족에게 속한 것이다(고후 3:18, cf. 요 8:44).
당신은 구원받았는가? 구원받은 지 얼마나 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면서 받은 부상이나 상처가 있는가? 당신의 아버지께는 상처가 있으시다(사 9:6). 스카랴 12:10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이 찔렀던 나를 쳐다볼 것이며』. 화자가 누구인가? 『주』 곧 여호와이시다(슼 12:4). 이 말씀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입을 틀어막는 말씀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고(딤전 3:16, 요 1:14) 상처를 가지셨다(요 20:27,28).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은 구주 예수님처럼 채찍질 자국이나 상처들을 입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한 적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의 수치를 짊어지고 진영 밖에 있는 그에게로』 나아가야 한다(히 13:13). 사람들이 욕하고, 박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당신을 험담할 수도 있다(마 5:11). 잃어버린 바 된 세상은 구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기에 당신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눅 6:22, 요 15:18-20, 요일 3:1,13). 세상이 볼 때 당신에게서 혐오스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의 “아빠”를 닮지 않은 것이다(고후 2:16).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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