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시편묵상 분류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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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8월호>

시편 84편은 「깃팃으로 악장에게, 코라의 아들들을 위한 시.」가 그 표제이다. 본 시편은 미래의 천년왕국 때 재건될 성전과 그 성전에 대한 갈망을 다루고 있다.

『오 만군의 주여, 주의 성막들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1절) 본 시편은 1절의 『성막들』이라는 표현부터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성막이면 성막이지, “성막들”은 또 무슨 뜻인가? 이것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광야의 성막”과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그것을 증축한 “헤롯 성전” 그리고 “천년왕국 때 재건될 성전”을 모두 포함하는 표현이다. 그 『성막들』이 본 시편의 저자에게는 “사랑스러운” 장소였다. “사랑스러운”이란 단어가 영어 <킹제임스성경>에서는 “amiable”로 표기되는데, 이는 “상냥한, 호감을 주는, 정다운”의 뜻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봤을 때 전혀 거북한 마음이 들지 않고, 그곳에 계신 하나님으로 인해 정답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든다는 것인데, 이런 믿음은 하나님을 너무나 사모하여 그분께 다가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에게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영적 특성”이다. 과연 “주의 성막들”이 당신에게도 그토록 사랑스러운 곳인가? 신약 교회 시대의 성전은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몸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탄성은 “오 만군의 주여,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들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행 20:28), 곧 그리스도인들을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요일 3:23).


『내 혼이 주의 뜰들을 사모하여 정녕, 기력을 잃기까지 하오니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2절). 『주의 뜰들』은 천년왕국 성전의 『안쪽 뜰』과 『바깥뜰』을 가리킨다(겔 40:19,20). 본 시편의 화자는 성전의 뜰들을 사모하여 기력을 잃기까지 했는데, 이토록 마음과 몸을 다해 살아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을 몹시도 사모하여 그야말로 혼을 토해 놓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을 향한 명백한 사랑의 표현이자 구약의 율법의 명령을 있는 그대로 실행에 옮기고 있는 모습이다.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수천 대까지 자비를 베푸느니라』(출 20:6, 신 5:10). 『그러므로 주 너의 하나님을 알라. 그분은 하나님이시니,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들에게 언약과 자비를 일천 대까지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신 7:9). 구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로만 사랑한다 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싫어하신다. 『그들의 입으로는 많은 사랑을 보여도 그들의 마음은 그들의 욕심을 따라감이라』(겔 33:31). 입으로 많은 사랑을 보인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입술의 고백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행위가 따라와야 한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셨다. 『나의 계명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아버지께 사랑을 받으리라. 또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 사람에게 나 자신을 나타내리라』(요 14:21).


『정녕, 오 만군의 주,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참새도 집을 찾았고 제비도 쉴 보금자리, 자기 새끼를 누일 보금자리를 찾았으니, 곧 주의 제단들이니이다』(3절). 참새와 제비가 그들의 보금자리를 성전의 제단들에 마련했다면 매우 끔찍한 일이다. 왜냐하면 제단은 제물을 “불태우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주님께 희생제 드리기를 중단함으로써 잡초가 우거지기 시작한 제단들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새들이 불을 두려워하지 않고 둥지를 틀 정도로 하나님의 성전이 그토록 사모할 만한 곳이라는 의미일까? 이것도 아니라면, 비록 내가 불태워진다 해도 나는 주의 성전을 사모할 것이고, 내 생명을 주께 바치겠다는 비유적인 결의일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합당한 예배니라』(롬 12:1).


참새와 제비가 둥지를 틀고 알을 낳을 정도의 “주의 제단들”은 “희생제를 드리는 장소로서의 성전”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성전은 희생제물을 불태우는 곳이므로, 제단이 성전을 대표하는 표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예언적으로 볼 때, 천년왕국 성전은 그 크기가 매우 웅장하므로 그 처마나 아치문에 새들이 둥지를 틀 가능성이 있다. 그 성전 주변 역시 맨땅으로 있지는 않을 것인즉, 분명 주변 땅에 나무들이 자라면서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고 아름답게 지저귈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들은 복이 있으리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셀라』(4절). “주의 집에 거한다”는 것은 성전을 드나드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는 그것이 “머물러 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천년왕국 성전에서 제사장들은 그 집 안에서 옷을 갈아입을 것이고(겔 42:14), 곡과 마곡이 그 집을 소멸하려고 예루살렘을 포위할 때도(계 20:9)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자기의 힘이 주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으니 그의 마음에 그들의 길들이 있으며, 그가 바카 골짜기를 통과하며 우물을 만드니 비도 그 웅덩이들을 채우나이다. 그들이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니 시온에서 그들 각자가 하나님 앞에 나타나나이다. 오 만군의 주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오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5-8절). 자기의 힘이 주께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 주께서는 말의 힘을 즐거워하시지 않고 사람의 다리에서도 기쁨을 취하시지 않으며, 오직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그분의 자비를 바라는 자들에게서 기쁨을 취하시기 때문이다(시 147:10,11). 특히 자기의 힘이 주께 있는 사람은 그의 마음에 『그들의 길들』(5절), 곧 “성전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길들”(4절)이 있기 때문에 복이 있다. 비록 성전에 있지 않아도 성전에서 섬기는 사람들의 길들을 사모하기에 그는 복 있는 사람인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의 마음은 온통 하나님을 섬기는 곳에 가 있는 법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고통스런 환경에 처한다 해도 성전에 거하는 사람들처럼 하나님 찬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4절). 그들은 눈물의 찬양으로 그들의 혼을 적시고, 힘을 얻고 더 얻기 위해 하나님만을 의지하다가 마침내 눈물로 길이 패인 기나긴 여정을 뒤로한 채 하나님 앞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그들이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니 시온에서 그들 각자가 하나님 앞에 나타나나이다』(7절).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 위해 지나온 골짜기를 6절에서는 『바카 골짜기』라고 부르는데 “바카”는 “우는”이란 뜻이다. “우는 골짜기,” 곧 “눈물의 골짜기”인 셈이다. 그것은 인생의 불가항력적인 고통으로 인해 잠들지 못하고 눈물로 새벽어둠을 적시는 골짜기요, 태양이 뜨는 한낮에도 눈시울을 붉게 적실만큼 그저 답답하기만 한 침묵의 골짜기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고통받는 성도의 눈물을 잊지 않고 그분의 병에 담아 두신다. 『주께서 나의 방황함을 헤아리시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그것들이 주의 책에 있지 아니하나이까?』(시 56:8) 눈물의 골짜기는 그가 흘린 눈물로 “우물”이 만들어지고,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비로 “그 웅덩이들”을 채워 주신다. 눈물의 삽으로 파낸 우물에 하얀 빗줄기를 뿌려 채워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대체 어떤 말로 형용할 수 있단 말인가? 비 온 뒤의 맑은 햇살보다 더 맑은 빗발로 눈물의 웅덩이들을 채워 주시는 주님을 그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약속을 믿는 성도의 “눈물”은 그 눈물의 우물을 채우는 “하나님의 물”(엡 5:26)과 결합되어, 결국 그가 그 물을 마시고 기운을 얻게 되며, 그렇게 힘을 얻고 또 얻어 마침내 “바카 골짜기”를 통과하게 될 것이다. 말씀의 물은 생명력의 원천인 것이다. 그 물을 마신 성도는 기도를 중단하지 않는다. 『오 만군의 주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오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시 84:8). 시편에서 “셀라”가 등장하는 문맥은 “재림”이기에, 본문 8절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대환란을 눈물로 통과하는 유대인 환란 성도를 가리킨다. 그들은 주님께서 시온으로(시 2:6; 9:11) 돌아오시기 전까지 울고 애통할 것인데, 그것이 복이 되어 천년왕국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의로 인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4,10). 인생에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곳곳에 있지만, 그 “장애물”을 “디딤돌”로 삼을 수 있는 성도는 분명 복이 있다.


『보소서, 오 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부음 받은 이의 얼굴을 보소서. 이는 주의 뜰들에서의 하루가 천 날보다 더 나으며, 악의 장막들에 거하는 것보다 내 하나님 집에서 문지기가 되는 편이 더 나음이니이다』(9,10절).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신뢰하는 성도의 방패이시다. 그런 성도에게는 주의 뜰들에서의 하루가 악인들과 보내는 천 날보다도 가치가 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기도하며, 설교를 듣고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이 다른 어떤 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보다도 가치가 있다. 그의 인생의 중심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악의 장막들에 거하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집에서 문지기가 되는 길을 택할 것인데, 멸망 전의 이스라엘은 성전 문을 열어 주는 일조차 대가를 바라면서 해 주었다. 『너희 가운데 대가없이 문을 닫을 자가 누가 있느냐?』(말 1:10) 설령 하나님의 집에 문지기가 된다 해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 일을 정직하게 행한다면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주 하나님은 태양이시요, 방패시니 주께서 은혜와 영광을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리이다』(11절). 정녕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행하는가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게 행하는 성도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는데,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는 일”에 대한 조건이 구약에서는 “행위”인 반면, 신약에서는 “구하는 것”이 그 조건이다. 『너희가 악하다 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위한 일에 필요하다면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신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벧전 5:10)께서는 실로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실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언제나 필요한 대로 가질 수 있게 하시어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실 수 있다(고후 9:8). 이처럼 “기도”는 말씀을 정직하게 행하는 성도에게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는 “백지 수표”인 것이다(요 15:7). 그러므로 눈물의 골짜기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주님만을 신뢰하라! 『오 만군의 주여, 주를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 84:12).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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