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시편묵상 분류

징계받는 자에게는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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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5월호>

시편 39편은 표제가 『악장 곧 여두둔에게, 다윗의 시.』로 되어 있다. 총 13절로 이뤄진 이 시는, ① 혀로 죄짓지 않으리라는 다짐(1-3절)과 ② 짧고 허무한 인생에서 소망이신 주님(4-7절), ③ 죽기 전에 징계를 거둬 주시라는 간구(8-13절)로 구성되어 있다. 다윗이 하나님께 크게 징계받을 때 써 내려간 시로서, 자신의 죄의 수치가 담긴 내용을 악장에게 주어 노래하게 했다는 점이 의아함을 낳는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주님을 향한 믿음에 있어서 그 무엇도 거침이 되지 않았던 다윗의 순수하고 담대한 믿음을 읽을 수 있다(삼하 6:14,16,20-22).

『내가 말하였나니, 나는 나의 길을 조심하여 내 혀로 죄짓지 아니하리라. 악인이 내 앞에 있는 동안 나는 내 입에 재갈을 물리리라』(1절). 다윗은 1절부터 사뭇 의연한 다짐을 보이고 있다. 악인에게 입을 벌려 말하는 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올 듯한 분위기이다. 다윗은 자신이 겪고 있는 징계의 기간 동안 행여나 혀로 죄짓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악인을 대적하여 말하는 것은 옳은 일이나 그 일 가운데로 죄가 끼어들지는 않을까 염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징계의 기간에 자신의 길을 조심하고 혀로 죄짓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있다. 악인이 자기 앞에 있는 동안 자기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것인데, 하지만 그런 다윗에게 한 가지 심각한 고민이 생긴다.

『내가 침묵하여 벙어리가 되었으며 심지어 선한 것에조차도 잠잠하였나니 나의 슬픔이 일었나이다』(2절). 다윗이 벙어리가 되어 입을 열지 않은 것은 그의 징계를 "주께서 행하셨기 때문이다"(9절). 다윗은 주께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악하게 보인다 해도 일언반구하지 않는 순종의 믿음이 있었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예루살렘을 벗어날 때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가? 사울 가문의 시므이가 저주를 쏟아 내니, 스루야의 아들인 아비새가 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해 달라고 요구하자 다윗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너희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로 저주하게 하라. 주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셨기 때문이니, 그런즉 누가 '어찌하여 네가 그리하였느냐?'라고 말하겠느냐?』(삼하 16:10) 다윗은 이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한 것에서조차 입을 다물려 하니 슬픔이 일어 버린 것이다. 주님께 징계를 받고 있기에 입을 조심해야 한다 해도, 진리를 말하는 일에까지 위축되는 현실이 슬픔의 강물이 되었던 것이다. 이 슬픔은 이내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불이 되었고, 다윗은 결국 선한 것을 말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내 마음이 내 안에서 뜨거워 내가 묵상할 동안 그 불이 탔으니 그때 내가 내 혀로 말하였나이다』(3절).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실행하는 성도는 그 진리를 말하지 않고 마음에 담고만 있으면 결국 마음이 타 버리게 된다. 말씀은 "태우는 불"인 것이다(렘 23:29).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의인의 침묵은 악에 동조하는 것이므로 진리를 말해야만 한다. 발견된 주의 말씀들을 먹고 그 말씀에서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을 얻은(렘 15:16) 성도는 다윗뿐 아니라 선지자 예레미야와 같은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나는 그를 언급하지 아니하고 더 이상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서 내 뼈들 속에 사무치는 타는 불 같아서 내가 참기에 지쳤고 견딜 수 없었나이다』(렘 20:9). 그러나 마음을 태우는 그 불이, "쓰레기"가 타며 치솟는 불이어서는 안 된다. "진리가 아닌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것을 말하게 된다면, 듣는 이들을 오염시킬 것이고 결국 그들을 결코 꺼지는 않는 지옥불에서 영원히 불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막 9:44).

이제 다윗은 자신의 유한한 인생을 숙고하기 시작한다. 잠깐 살다 가는 연약한 인생이 왜 그리 죄를 짓고 사는지! 『주여, 나의 종말과 내 날들의 분량이 어떠한지 나로 알게 하시어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 알게 하소서. 보소서, 주께서 내 날들을 손 너비만큼 주셨으므로 내 연수가 주 앞에서는 없는 것 같사오니 진실로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도 다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4,5절). 제아무리 오래 살아도 인생은 그저 짧기만 하다. 영원을 준비하지 않는 생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상태에 있다 해도 헛될 뿐이다. 사람은 자기 연수를 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연수에 가타부타 간섭할 수도 없다. 다만 정해진 연수를 살다 갈 뿐인 것이다. 우리가 주께서 정하신 연수에 간여할 수는 없어도, 병든 히스키야처럼 간구드릴 수는 있다. 『"오 주여, 내가 간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고 주의 목전에 선한 것을 행하였음을 이제 기억하소서." 하며, 히스키야가 심히 울더라』(왕하 20:3). 주의 목전에서는 천 년이 단지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경점과 같다(시 90:4).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연수가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의 날들이 얼마나 짧은지 셀 줄을 알아 마음이 "지혜"에 이르는 것만이 유일한 살 길이다(시 90:12). 그 지혜는 『진실로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도 다 헛될 뿐』임을 아는 것이다(시 39:5). 사람은 헛것과 같고 그의 날들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기에(시 144:4), 진실로 낮은 자들도 헛것이요, 높은 자들도 거짓이니 그들을 저울에 달면 모두 합쳐도 헛것보다 가볍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시 62:9). 영원하시며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그 경이로운 지혜를 소유하신 분 앞에서 자신이 헛되지 않다고 자랑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가장 좋은 상태』에 있던 다윗은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여러 명의 아내를 취했었다(삼하 3:2-5). 『가장 좋은 상태』에 있던 바울은 동족을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갈 수 있기를 바랐겠노라고 할 정도로(롬 9:3) 그들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세 번이나 불순종했다(행 20:23; 21:4; 21:12). 『가장 좋은 상태』에 있던 욥은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잘못된 심판과 잘못된 행위를 하신 것이라고 비난했다(욥 3:23; 6:4; 10:2,17; 19:6,22; 30:21). 선이 있는 곳에 악도 함께 있는 것이다. 당신이 주님을 섬길 때, 거기에 악이 끼어들 수 있음을 잊지 말라!

『진실로 사람마다 헛된 그림자같이 걸어다니며 진실로 그들이 헛되이 분주하니 재물을 쌓으나 누가 그것을 가질지 알지 못하나이다』(6절). 『진실로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도 다 헛될 뿐』인 육신이 하는 일이란, 헛된 그림자같이 걸어다니며 헛되이 분주하고 누가 가질지도 모르는 재물을 쌓으려고 생을 허비하는 것이다. 주께서 누가복음 12장의 부자에게 하신 말씀은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인생들이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혼을 네게서 앗아 가리니 그러면 네가 장만한 그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그러므로 자신을 위하여는 보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 앞에 부요하지 못한 자는 다 이러하니라."고 하시더라』(눅 12:20,21). 주께서는 모든 육체가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져도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남아 있다고 말씀하셨다(벧전 1:24,25). 모든 인생은 잠깐 보이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약 4:14). 안개꽃도 꽃인데 그 꽃 역시 마르고 질 것인즉, 잠깐 보이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 또한 그러하리라. 안개꽃처럼 희미한 영광을 위해 사는 이들이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이용하고 있는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져 가고(고전 7:31), 오직 주의 말씀만이 영원토록 남을 것이며 그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만이 영원토록 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세상도, 세상의 정욕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흑암의 안개』만이 영원히 간직되어 있을 뿐이다(벧후 2:17). 이런 유한한 인생에서 과연 무엇에 소망을 두며 살고 있는 것인가!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기다리겠나이까?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절). 그렇다.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둘 수 없다. 『너희는 사람에게 의존함을 그치라. 그의 호흡은 그의 콧구멍에 있으니 그가 존중받을 것이 어디에 있느냐?』(사 2:22)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인생에서 올바른 목적과 동기를 주실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과 징계로 우리를 정결케 하시어(엡 5:26, 욥 5:17, 시 94:12), 우리를 그분의 마음에 딱 맞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주님께서 그분의 자녀를 징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그의 죄과에서 고침을 받지 못한다면 그분의 원수들의 질책거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말씀을 보라. 『나의 모든 죄과에서 나를 구하소서. 나로 어리석은 자의 질책이 되지 않게 하소서』(8절). 세상 죄인들은 죄짓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고서 비웃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느끼는 일종의 "쾌감"이다. "죄짓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하나님이 없음을 증명하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를 징계하셔야만 한다. 징계는 하나님의 자녀가 마귀의 자식들의 조소거리가 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최후의 방책인 것이다.

『주의 징책을 내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시므로 내가 쇠잔하였나이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심으로 사람을 바로잡으실 때 그의 아름다움을 좀과 같이 소멸케 하시나니 진실로 모든 사람이 헛되나이다. 셀라』(10,11절). 이 말씀은 앞선 시편 38:3-10의 징계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다윗은 징계로 인해 그의 육신에 성한 곳이 없었다(시 38:7). 혈색 좋고 용모가 준수하며 보기 좋은 인물이었으나(삼상 16:12) 그 아름다움이 소멸된 상태이다. 뼈에는 안식이 없고, 머리는 죄로 심히 무거우며, 상처는 악취를 풍기며 썩고 있고, 몸은 번민으로 굽혀져 온종일 애통하고 다닌다. 허리는 지긋지긋한 통증에 시달리고, 전신에 기운이 없고 마음마저 불안정하여 신음을 쏟아내고 있다. 심장은 비정상적으로 강하게 박동하고, 기력이 쇠잔하여 눈의 빛마저도 사라져 버렸다(시 38:3-10).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을 좀먹은 옷처럼, 썩은 물건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욥 13:28) 그렇기에 다윗은 징계를 이제 그만 거두어 주시라고 "부르짖고" 있다. 『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 눈물에 가만히 계시지 마소서. 나의 모든 조상들이 그러하였듯이 나도 주와 함께하는 타국인이요, 체류자이기 때문이니이다. 오,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를 용서하시어 나로 기력을 회복하게 하소서』(12,13절).

다윗은 『징계가 당시에는 즐겁지 않고 슬픈 것 같으나 후에 그로 인하여 훈련된 자들에게는 화평한 의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는 말씀을 입증한 인물이었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길을 잃었으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내가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 좋사오니 이는 내가 주의 규례들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니이다』(시 119:71). 우리의 징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로 인해 받으신 징계로 족하지만(사 53:5), 그 후로도 우리가 계속 죄를 짓는다면 자녀로서 받는 징계를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히 12:5-13). 징계는 괴로운 것이지만 그것이 주어졌을 때 외면치 말아야 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고통스러운 가지치기"이자, 우리에게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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