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시편묵상 분류

소망을 품은 기다림 (시편 2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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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9월호>

“다윗의 시”가 표제인 시편 27편은 “지쳐 쓰러진” 사람들을 위한 시편이다. 본 시편은 주님을 기다리다 지친 신약 성도가 늘 가슴에 품고 묵상함으로 잃어버린 소망을 회복할 수 있는 시이기도 하다.

『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1절)
주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 안에는 어두움이 전혀 없다』(요일 1:5). 주님은 빛을 주시는 분이기 이전에 “빛” 자체이시다. 야고보서 1:17은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곧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고 말씀한다. 주님은 『빛들의 아버지』 곧 존재하는 모든 빛들의 근원으로서의 “빛”이시다. 변화가 없으신 주님은 변덕이 없으시기에 그분께 온전한 신뢰가 있다.
주님께는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 “빛”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 어떤 빛으로도 그분의 그림자를 만들 수 없다. “빛에는 그림자가 없다.” 빛이신 분을 이보다 잘 묘사하는 말씀은 없다. 주님께서는 영적이면서도 실제적인 빛으로서 모든 빛을 압도하는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이러하신 주님은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신뢰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분이시다.
『주는 나의 빛이요』. 다윗은 주님을 “나의 빛”이라고 고백한다. 극히 개인적인 믿음의 고백이다.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닌 “내가 소유한” 빛이시다. 그런 다윗은 주님을 따름에 있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개인의 빛이 되어 주셨다. 어두움 속에서 빛이 비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 마음에 비추신 것이다. 순간 우리 안의 어두움을 몰아내셨고, 우리는 우리 몸 안에 “빛”이신 분을 소유했다(고후 4:6,7). 그리스도인은 빛이신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이다. 어두움이 빛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고 빛이 어두움을 몰아낸다. 『나의 빛』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어두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1절)
주님은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다. “나”에게 부활과 영생을 약속하신 생명의 능력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멜키세덱과 같은 제사장이 되신 것은 『끝없는 생명의 능력에 따라』 되신 것이다(히 7:16). 그래서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 우리가 가진 생명은 『끝없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셨기에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음부야,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고 담대히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마귀는 성도가 주님을 섬기려 할 때 육신의 생명에 위협을 가해 타협하게 하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위협을 깨뜨리고 불태우는 말씀이 있다. 『또 너희는 몸은 죽여도 혼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그분을 두려워하라』(마 10:28). 대적자들은 우리의 몸에 손댈 수는 있어도 영원한 생명을 지닌 우리의 혼에 손댈 수는 없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이다(골 3:3,4).

『악한 자들, 곧 내 원수들과 대적자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 왔다가 걸려 넘어졌도다』(2절).
다윗은 그의 대적자들을 그의 살을 먹으러 온 야수들로 묘사한다. 다윗은 주님께서 야수처럼 달려드는 대적들로부터 자신을 구해 주셨다고 과거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양떼를 치면서 사자와 곰과 싸워 본 경험이 있기에 자신을 대적하려고 일어선 무리를 자기 살을 먹으려고 달려드는 야수로 묘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구해 주신 주님께서는, 야수와 같은 자들로부터도 다윗을 구해 주셨다. “교리적으로,” 이 구절은 대환란 때 있게 될 문자적인 식인 풍습을 다룬다.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인 대환란 때가 되면,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적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도살당하는 양처럼(시 44:22) 환란 성전의 제단에서 죽여(계 6:9-11) 그들의 피를 『피의 술제물』(시 16:4)로 바치고 그들의 살을 먹을 것이다(사 6:1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은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전쟁이 나를 대적하여 일어날지라도 그 가운데 나는 담대하리라』(3절).
앗시리아 왕이 랍사케를 보내 이스라엘을 위협했을 때, 히스키야왕은 주님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 『오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여, 주, 오직 주만이 땅의 모든 왕국들의 하나님이시며, 주께서는 하늘과 땅을 지으셨나이다... 주여, 참으로 앗시리아 왕들이 민족들과 그들의 나라들을 멸망시키고 그들의 신들을 불 속에 던졌으니, 이는 그것들이 신들이 아니었으며 사람의 손으로 만든 나무와 돌이었음이니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것들을 파괴시켰나이다. 그러므로 이제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그의 손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어 땅의 모든 왕국들이 주, 오직 주만이 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소서』(왕하 19:15,17-19). 히스키야는 랍사케의 위협의 말을 전달받았을 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둘렀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고 기도했다. 앗시리아 왕의 군대가 대적하여 진을 치고 전쟁이 대적하여 일어났어도, 그는 문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았다. 즉 히스키야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고, 민족들의 신들은 실제로는 신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담대하게 기도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셨고, 『그날 밤에 주의 천사가 나가서 앗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더라.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니, 보라, 그들이 모두 죽은 시체더라』(왕하 19:35). 성도는 비록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어야 할 상황에 처한다 해도,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고 문제를 놓고 담대히 아뢸 수 있어야 한다. 성도가 해야 할 일은 슬픔의 옷을 입고서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주님께 아뢰는 것이며, 그 뜨거운 눈물 속에서도 주님 한 분만을 온 맘을 다해 신뢰하는 것이다.

『내가 주께 바라던 한 가지 일 그것을 내가 구하리니, 곧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 주의 집에 거하며 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과 그의 성전에서 아뢰는 것이라』(4절).
다윗은 그의 생애의 모든 날 동안 주님의 집에 거하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과 주님의 성전에서 주님께 아뢸 수 있기를 구하고 있다. 그는 영적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을 주께로 이끌었던 것은 『주의 아름다움』이었다. 『주의 아름다움』이 무엇일까? 세상은 외모가 수려하고 육체를 잘 치장하면 아름답다고 하지만, 성경은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주께 드리라. 예물을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하라.』(대상 16:29)고 말씀한다. 『또 그가 백성들과 의논하여 주께 노래하는 자들을 임명하여 군대 앞에서 나갈 때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찬양하여 “주를 찬양하라. 그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됨이라.”라고 말하게 하였더라.』(대하 20:21),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주께 돌리고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시 29:2)라고 말씀한다. 성경의 시각으로 본 아름다움은 “거룩함”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왕이시지만(솔 5:16), 그분의 사랑스러움은 그분의 거룩하심에서 나오는 사랑스러움이다. 주님은 『그의 아름다움 속에 있는 왕』(사 33:17)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거룩함의 아름다움 가운데 영원히 살아 계신다.
당신은 거룩함의 영원한 아름다움 속에 계신 그 왕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가? 그분과 영원히 함께 있기를 소망하는가? 그렇다면 그보다 앞서 지상에 있는 동안 당신 앞에 있는 거룩한 성도들과 함께하기를 소망하도록 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받은 거룩한 성도들은 성경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거룩한 민족이며(벧전 2:9), 또 그들에게 주어진 소명이 거룩하다(딤후 1:9). 그들이 서로를 문안하는 입맞춤이 거룩하고(살전 5:26), 기도하기 위해 들어올린 그들의 손이 거룩하다(딤전 2:8). 죄로 더러워진 세상과 일치하지 않고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진 그들의 몸이 거룩하다(롬 12:1). 그들의 믿음이 거룩하며(유 1:20), 그들의 행실이 거룩하고(벧후 3:11), 그들의 교제가 거룩하다(고전 10:16; 11:29). 이토록 아름다운 성도들에게 왜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인가?
성도의 믿음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는 그가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느니라.』(마 18:20)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성도들이 모이는 곳에 주님은 함께 계신다. 그 거룩한 모임에 함께할 수 있기를 적극적으로 구하는 것이 살아 있는 믿음이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성도들의 모임을 등한시하는 사람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성도들의 모임을 매력 없어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성도들과 주님 앞에 함께 모이는 그 날, 곧 주님의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최초로 뵙는 그 날을 소망할 수 있는가?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앞에 우리가 함께 모이는 일에 관하여 이제 너희에게 간구하노니...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 자신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저버리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살후 2:1, 히 10:25).

『그가 고난의 때에 나를 그의 처소에 숨기시리니 그가 그의 성막의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나를 반석 위에 두시리라. 이제 내 머리가 나를 에워싼 내 원수들 위로 들리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의 성막에서 기쁨의 희생제를 드릴 것이요, 내가 노래하리니 정녕, 내가 주를 찬송하리로다』(5,6절).
“교리적으로,” 5절의 『고난의 때』는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인 대환란이며, 그때 환란 성도들을 숨기실 『그의 처소』 곧 『그의 성막의 은밀한 곳』은 하나님의 처소인 하늘의 시온 산 위 새 예루살렘이다(히 12:22). 그들은 『반석』처럼 안전한 그곳에서 『그 분노가 지나갈 때까지 잠깐 동안만』 숨어 있을 것이다(사 26:20). 이것은 환란 성도들의 환란 후 휴거이다. 그러나 6절의 『이제 내 머리가 나를 에워싼 내 원수들 위로 들리리라.』는 말씀은 대환란 후 주님과 함께 땅으로 내려온 환란 성도들을 다룬다. 따라서 6절의 『그러므로 내가 그의 성막에서 기쁨의 희생제를 드릴 것이요』에서 『성막』은 재림 후 천년왕국 때 『기쁨의 희생제』를 드리게 될 천년왕국 성전을 의미한다(겔 40-48장).

『오 주여, 내가 내 음성으로 부르짖을 때 들으시고 또 나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내게 응답하소서』(7절).
이 기도는 모든 성도가 그의 삶 속에서 갖고 있는 실질적인 바람이다. 문제 없는 인생은 없다. 성도는 오직 주님의 자비를 바라며 기도 응답을 구해야 한다. 무자격한 자신에게 베푸실 한량없는 자비를 구하고, 그 자비 속에서 살기를 구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낮추는 겸손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시고(시 10:17) 그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신다(사 57:15, 약 4:6, 벧전 5:5).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셨을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심으로 버리지 마소서. 주께서 나의 도움이 되셨으니 오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나를 떠나지 마시고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가 나를 버릴 때에도 주께서는 나를 받아 주시리이다』(8-10절).
여기서 유대인 환란 성도가 보인다. 대환란 때의 유대인들은 민족적으로 주님의 진노 가운데 있게 된다. 그때는 민족적인 고난의 때이며, 적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주님의 얼굴을 찾는 유대인만이 주님께 받아들여진다. 대환란 때에는 유대인 가족들 사이에 분리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때 이 시편 말씀처럼 적그리스도를 섬기는 유대인 부모가 참 하나님을 따르는 유대인 자녀를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내가 땅 위에 화평을 주러 온 줄 생각하지 말라. 나는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그 어머니와, 며느리가 그 시어머니와 서로 대적하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의 원수들은 그의 가족 중에 있으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도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4-38). 바로 이것이 대환란 때에 왕국복음으로 인해 있게 될 유대인 가정 내의 불화이다. 적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왕국복음을 수용했기에 부모에게서 버림받지만, 여전히 주님의 얼굴을 찾는 그 유대인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아니하시고 받아 주신다. 주님은 그들에게 『자기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그렇게 너희를 위로하리니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사 66:13)고 약속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부모에게 버림받은 성도 이야기는 신약 교회 시대에도 등장한다.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식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그의 장례식을 치러 버린다. 인도의 썬다 싱의 아버지는 그가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다고 고백한 다음 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를 독살하려 했다. 부모는 예수 그리스도가 미워 자식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인이 자기의 젖먹는 아이를 잊을 수 있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에게 동정하지 않겠느냐? 정녕, 그들은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고 말씀하신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버림을 받을지라도, 성도는 주님을 끝까지 찾아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마음이 저 심연으로 가라앉고, 슬픔에 한없이 떠밀려가고, 눈앞이 칠흑처럼 캄캄해져도,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히 13:5)는 말씀을 믿고 주님을 계속 사랑해야 한다. 그리할 때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주께서도 자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위로해 주신다(시 103:13). 『신실과 진실』(계 19:11)이라 불리시는 주님의 사랑은 분명 육신의 부모의 사랑보다 신실하고 진실하시다.

『오 주여, 내게 주의 길을 가르치소서. 내 원수들로 인하여 나를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나를 내 원수들의 뜻에 넘겨주지 마소서. 이는 거짓 증인들이 잔인함을 내뿜는 자들처럼 나를 대적하여 일어섰기 때문이니이다』(11,12절).
다윗은 자신이 원수들의 뜻에 넘겨지지 않고 『주의 길』을 배워 그 길을 걸어가기를 원한다. 그리고 『주의 길』이 『평탄한 길』임을 고백한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길을 찾고자 하나 성경이 제시하는 『주의 길』을 찾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으나 그 끝은 죽음의 길들일 뿐이다(잠 14:1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생이 최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할 한 길을 제시하셨다. 그것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 곧 주님 자신이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요 14:6).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아버지』를 계시하신 유일한 분이시다(요 10:30; 14:9).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우리가 『아버지』를 알게 되었고, 『아버지』께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주님은 『아버지』께 이르는 생명의 길이시지만 그 길을 찾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마 7:14).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아버지』께 이르렀을 때 인생의 『평탄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 그 길은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는 은사주의자들의 길이 아니다. 그 무엇을 해도 성경과 일치하기에 하나님께 거슬리지 않는 진리의 평탄한 길이다. 인생이 평탄한 길을 걷는다는 것은, 성도가 날마다 주님께 기쁨이 되는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한다. 그 길을 걷고 있는가? 그 길을 걸을 때 힘이 들지는 않는가? 그것은 당신의 마음에서 언제부턴가 “소망”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산 자들의 땅에서 주의 선하심을 보리라고 믿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쇠잔해졌으리이다. 너는 주를 기다리라. 담대하라. 그리하면 그가 네 마음에 힘을 주시리라. 내가 말하노니 주를 기다리라』(13,14절).
“소망”은 성도가 그의 달려갈 길을 인내하고 완주하게 하는 힘이 된다. 그 힘은 위대한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이라는 복된 소망이다(딛 2:13).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에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 “기다림”에는 “소망”이 있다. 소망이 없는 기다림은 기다리는 이를 지치게 하고, 기다리는 이유를 상실케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소망을 품고 기다려야 한다(벧전 1:3). 마음이 지쳐 쇠잔해져 있는가? 다윗은 “산 자들의 땅에서 주의 선하심을 보리라고 믿지 아니하였기에 쇠잔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의 소망이 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기에 마음이 지쳐 있는 것이다. 소망은 주님을 찬양케 하고(시 71:14) 당신에게 즐거움을 준다(롬 12:12). 마음에 복된 소망을 품었는가? 소망이 없는 기다림은 참된 기다림이 아니다. 영이 없는 몸과 같아서 죽은 믿음을 증거할 뿐이다(약 2:26).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는 성도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다(딤후 4:8). 『이제 소망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믿음 안에서 충만케 하시어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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