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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과 침례식에 "신유의 효과” 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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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01월호>

신약 교회에 주어진 두 가지 의식은 주의 만찬과 침례식이다. 주의 만찬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침례식은 베드로전서 3장에서 발견되며, 이 두 의식은 교회가 휴거될 때까지(살전 4:16,17)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신약 교회의 이 두 가지 의식에 “신유의 효과”가 있다는 말은 많은 이들에게 무척 생소한 개념으로 들릴 것인데,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는 두 의식에 신유의 효과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1. “성찬식의 신유 효과”에 대한 반론
조목사는 <신유론>의 ‘4) 교회 의식’ 편에서 성찬식과 침례식에 신유의 효과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우선 성찬식(이하 주의 만찬)에 관한 그의 글을 보도록 하자.

「성찬 예식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내어 주신 예수님의 몸과 흘려 주신 피를 통해서 죄사함과 치료를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놀라운 은혜의 사건이다. 우리는 죄인들을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주님을 기념할 때 주님의 사랑과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성찬식은 우리에게 죄용서라는 영적 치유와 더불어 죄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상처와 육체적 질병을 치유하는 장이 된다.
성찬 예식은 모든 믿는 자에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케 한다. 즉 성찬을 통해 성도는 영적인 새로움과 회복 그리고 온전함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얻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찬 예식을 통해 치유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찬 예식은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의 은혜가 흐르는 가장 중심적이고 풍요로운 예식이기 때문이다.」1)

조목사가 성찬 의식에 관해 가지고 있는 기본 개념은 그것이 주님을 기념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의 만찬을 행하여 주님을 기억하라고 하셨기 때문에(눅 22:19)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성찬 의식의 기념적 의미에 덧붙여진 죄사함과 치유의 교리이다. 조목사는 성찬 의식을 ‘죄사함과 치료를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놀라운 은혜의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찬 의식을 ‘죄용서라는 영적 치유와 더불어 죄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상처와 육체적 질병을 치유하는 장’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성찬 의식이 죄용서라는 영적 치유의 장이라는 주장은 성도가 그 의식에 참여하기에 앞서 주님께 죄를 자백함으로 스스로를 의식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거룩한 상태로 만드는 개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조목사가 그것을 죄사함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동시적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성도가 성찬 의식에 ‘참여함으로써’ 죄사함을 얻게 된다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조목사가 성찬 의식을 통해 치유를 받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을 통해 우리는 그가 성찬 의식의 물리적 치유 효과를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목사는 성찬 의식을 통한 죄용서로 영적 치유가 일어난다면, 그 죄의 영향으로 생겨난 마음의 상처와 육체적 질병 또한 치유된다고 한다. 이것은 죄인이 죄에서 구원을 받을 때 ‘육체의 치유’까지도 보장을 받는다(몸의 구속이 일어난다)는 그의 ‘전인구원론’의 밑바탕이 되는 사상이다. 2) 그러나 전인구원론이 비성경적인 교리이며 죄인의 구원과 육체의 치유가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은 이전에 이미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성찬 의식이 죄사함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은혜의 사건이라는 주장을 성경을 통해 분석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성찬 의식에 죄사함의 효과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밝혀진다면, 그 교리를 바탕으로 한 성찬 의식의 후속적 신유 효과 또한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성경은 성찬 의식에서 떼는 빵과 마시는 잔에 죄사함이 아닌 “선포”의 의미가 있다고 말씀한다.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라』(고전 11:26). 선포의 내용은 바로 “주님의 죽으심”이다. 떼는 빵은 주님의 찢겨진 육체를 의미하고, 마시는 잔은 그분이 죄인들을 위해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육체가 찢겨지고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뜻하는 것으로, 신약 교회 시대의 성도들은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이 두 가지 상징물로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주님의 경우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던 빵에 대해서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쪼개진 나의 몸』(고전 11:24)이라고 하셨고, 식후 제자들에게 주신 잔에 대해서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새 언약의 피』(막 14:24)라고 하셨다. 따라서 성찬 의식을 통해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분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신약 교회의 “의식”으로서의 성찬에 대한 언급은 위의 고린도전서 11장에서만 발견되는데, 이처럼 성경은 성찬 의식에 대해 죄사함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고 있으며, 오로지 그 의식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선포”하는 의식이라는 것만을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성찬 의식이 육체의 질병과 가지는 유일한 관계는 그것에 참여하는 자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합당치 않게 먹고 마셨을 때”이다. 『사람이 자신을 살펴보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하리니 이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의 저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라. 이 때문에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약하고 병들었으며 상당수가 잠들었느니라』(고전 11:28-30). 29절의 “주의 몸”이란 성찬 의식에서 쓰는 빵이 실제적인 주님의 몸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구원받은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형성하는 한 몸, 즉 교회를 말한다.3)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만찬을 통하여 교제를 나눌 때, 이에 참여하는 자들 모두는 그것이 주님의 거룩한 몸임을 분별하여 죄로부터 정결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성도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주님의 몸”을 구성하는 거룩한 지체들인데, 바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찢겨진 주님의 몸과 흘리신 피를 기억하는 소중한 의식에 죄를 가진 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참여하면 “주님의 몸”에 모독을 가하는 일이라는 것이며, 성경은 그러한 자들이 성찬 의식에 참여하면 자신의 저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일상 삶 가운데 죄를 짓고도 스스로를 살피고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징계를 받는데, 하물며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라고 주님께서 친히 정하신 교회의 의식에 참여하면서 죄를 숨기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실 것이다. 성경은 주님의 몸 된 성도들의 거룩한 모임을 분별하지 못하고 죄를 지닌 상태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약하고 병들기도 하며, 심지어는 죽기도 한다고 말씀한다. 성찬 의식에 대해 “성경은” 질병의 치유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면 병들고 죽는다는 것만을 말씀하고 있다.

2. “침례식의 신유 효과”에 대한 반론
조목사가 교회의 의식의 신유 효과를 주장하기 위해 내세운 두 번째 의식은 침례이다.

「성도는 침례를 통해 죄에 대해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성도는 이제 그리스도의 생명감으로 충만하게 되며 건강과 치유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침례는 그 자체에 죄사함이나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의식이나 예식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침례를 통해 성도는 죄책감을 치유 받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됨을 확인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침례 받은 성도는 영적인 건강은 물론 정신적, 육체적으로도 건강을 얻게 된다.」4)

위의 인용된 글은 ‘침례’라는 동일 대상에 대하여 내용상 상호 불일치를 보이고 있기에 글 자체로 커다란 모순을 지니고 있다. 조목사는 “성도는 침례를 통해 죄에 대해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고 하면서도 “침례는 그 자체에 죄사함이나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적으로 보면, 전자는 침례로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인 반면, 후자는 침례에 죄사함이나 구원의 능력이 없다고 말하고 있어 조목사가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인지 독자로 하여금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전자가 침례 구원론에 해당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다”는 표현이 죄인의 구원에 관한 직접적인 서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목사가 “침례는 그 자체에 죄사함이나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침례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려 한 것은 아님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결론은 성경적인 용어들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 이를 수밖에 없다. 조목사는 신유에 있어서 침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죄인의 변화됨과 관련된 성경적 용어들을 무분별하게 나열한 탓에 침례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전체 내용상 모순을 일으키는 글을 쓰고 만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침례와 관련하여 어떤 용어를 썼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가 침례가 인간의 죄 문제에 모종의 영향을 끼치고 거기에 신유의 효과가 동반된다고 말했다는 데 있다.
성경은 침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벧전 3:21). 실제적인 물침례와 관련된 이 구절은 침례를 단순히 “모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육체의 더러움조차 제거할 수 없는 “모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근거가 되는 모형으로서 그분이 우리의 죄로 인해 죽고 장사되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있음을 침례라는 “모형”으로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이다.
베드로전서의 그 구절에 따르면, 이 침례 행위는 “선한 양심”이 없는 사람은 결코 행할 수 없는 의식임을 알 수 있다. 이유인즉, 선한 양심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후에 생기는 양심이기 때문이다. 『정결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정결하나 더럽혀진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정결한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다 더럽혀져 있느니라』(딛 1:15).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죄인의 더럽혀진 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다. 이로써 죄인의 악한 양심이 선한 양심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선한 양심을 갖게 된 사람은 이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부활했음을 침례라는 “모형”을 통해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받은 성도의 선한 양심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침례는 그것을 죄인이 구원받은 후에만 실행할 수 있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죄인이 침례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결코 성립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모형에 불과한 침례에는 구원의 본질도 실체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구원하는 실질적 기능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침례가 죄인의 구원과 관련하여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죄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침례는 조목사의 주장과는 달리 죄책감을 치유 받는 기능도,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됨을 확인하는 기능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는 결코 영적인 건강과 정신적, 육체적 건강도 얻을 수 없다. BB
주석)--------------------
1) 조용기, 『신유론』 (서울: 서울말씀사, 2001), pp.90-91.
2) 위의 책, pp.70-71; 조용기,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서울: 서울말씀사, 2002), p.143.
3) Peter S. Ruckman,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고린도전서』 (서울: 말씀보존학회, 1999), p.263.
4) 조용기, 『신유론』,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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