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은사주의 분류

‘복음’을 ‘치유’로 왜곡한 조용기 목사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9월호>

순복음의 주요 문제점 중 하나는 그것이 “중생의 결과”로 “치료”를 주장한다는 데 있다. 순복음의 강조점인 ‘치료’는 죄인의 거듭남의 필연적인 결과로 제시된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가 ‘병을 멸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또 다른 차원의 그리스도와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질병의 고통을 다 짊어졌으니 나의 이름으로 치료함을 받으라.” 주님은 병을 멸하기 위해서 우리의 병을 짊어지고 온갖 고초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치료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질병을 치료받고 주님이 주시는 건강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1) 우리 나라 순복음의 시조(始祖) 조용기 목사는 모든 질병은 우리 몸에 불법주차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서슴없이 내놓고 있다. 예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하셨으니 모든 질병에서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요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종 된 상태에서 자유롭게 하신다는 말씀이다(요 8:34). 질병에서의 해방과 관련된 주장들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성경의 지지를 얻어야만 하는데, 그가 제시하는 근거 구절들은 그가 말하는 ‘치료의 복음’을 전혀 지지하지 않고 있다. (참고로, 조목사가 인용하는 구절들은 변개된 ‘한글개역성경’에서 나온 것이며, 필자가 인용하는 구절들은 섭리로 보존된 <한글킹제임스성경>에서 나온 것임을 밝혀 둔다.)
1. 불뱀의 예표를 망친 십자가 건강론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의지하면 우리는 질병의 독을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8).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생명을 얻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치료를 받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건강하게 됩니다.』2)
조용기 목사가 인용한 민수기 21장의 불뱀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뱀, 곧 사탄의 입장이 되시어 심판받으실 것을 예표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예표한 내용은 요한복음 3:14,15에서 주님이 친히 설명해 놓으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같이 인자도 그렇게 들려올려져야만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십자가에 “직접” 매달리신 주님의 말씀에서 보듯이, 장대에 매달린 광야의 불뱀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영생을 얻기 위함이지 질병의 치유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광야의 죄인인 이스라엘이 장대에 매달린 불뱀을 ‘믿음으로’ 바라봄으로써 뱀에 물린 것을 치유받아 생명을 잃지 않게 된 일은, 장차 죄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임을 예표한 사건이다. 이것은 질병의 치료나 건강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주님이 친히 설명해 놓으셨다.
2. 공생애 치유사역과 십자가, 그리고 이사야 53:4-6
1) 공생애의 치유사역
『하나님께서는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도 치료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성도를 치료하십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치료의 능력이 넘쳐나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3)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기간에 치유사역을 펼치신 것은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 곧 다윗의 보좌에 앉기 위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고전 1:22)에게 치유를 통해 증명해 보이신 일이었다. 또한 주님은 치유의 표적을 통해서, 주님 자신이 ‘너희’ 곧 ‘이스라엘’을 치료하셨던 구약의 주 여호와 하나님(출 15:26)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딤전 3:16)이라는 사실도 증명하셨다. 주님이 보내신 치유의 공생애는 주님 자신이 메시야 왕국을 가져오실 유대인들의 합법적인 왕이요,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주님이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을 치유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십자가 이전’의 공생애 치유사역을 ‘십자가 이후’에 등장하는 신약 그리스도인들을 치유시켜 주시는 일과 결부시켜서는 안 된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딤후 2:15).
2) 십자가 이전과 이후로 나눠 적용된 이사야 53:4-6
조목사는 중생의 필연적인 결과인 ‘치료’를 가르치기 위해서 마태복음 8:17과 베드로전서 2:24을 인용한다.
『나아가서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치료 사역에 대해 성경은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고 말씀하셨습니다.』4)
『이러므로 오늘날 인간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치료입니다. 누가 이런 인간을 치료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 성경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5)
조목사가 인용한 마태복음 8:17과 베드로전서 2:24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사건을 예언한 이사야 53:4,5,6을 인용한 것이다.
마태복음 8:17은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저자의 권한으로 ‘이사야 53:4’을 변형시켜 인용하신 부분이다. 『실로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지었는데도』(사 53:4)가 『그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느니라.』(마 8:17)로 인용된 것이다. “육체의 치유”가 일어나는 마태복음 8장의 베드로의 집에서의 상황은 분명 “십자가 이전”의 일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주님은 십자가 이전에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치유의 표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을 구약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시자 유대인들의 왕으로 제시하셨다. 조목사가 인용한 마태복음 8:17은 십자가 이후에 등장하는 신약 그리스도인들의 치유와는 무관한 구절이다.
또한 ‘이사야 53:5’을 인용한 베드로전서 2:24은 마태복음 8:17과는 달리 물리적인 치유의 구절이 아니다. 그것을 다음 25절과 함께 해석할 때 그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들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낫게 되었느니라. 이는 너희가 길 잃은 양들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혼들의 목자와 감독에게로 돌아왔음이니라』(벧전 2:24,25). 전체 구도는 “죄로 인한 방황”과 “회심”과 관련이 있다. 즉 주님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신 목적은 우리가 죄들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24절).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낫게 된 ‘치유’라는 것은(24절) 우리가 길 잃은 양들 같았으나 우리 혼들의 목자와 감독에게로 돌아온 ‘회심’을 뜻하는 것이다(25절). 이 사실은 베드로전서 2:24이 인용한 이사야 53:5의 바로 다음 구절에서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 우리는 모두 양같이 길을 잃어 각자 자기의 길로 돌이켰으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도다』(사 53:5,6).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는 것은 “목자를 떠난 길 잃은 양 같던 우리 모두의 죄를 주님께 지움으로써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임을 구약의 이 구절 역시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치료가 아니라 죄인의 회심을 다루는 “영적 치유”임을 의미한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는 주님의 십자가 이전의 물리적인 치유 표적을 위해서는 이사야 53:4을 인용하시고, 십자가 이후에 일어나는 죄로부터의 영적 치유(죄인의 회심)를 위해서는 이사야 53:5을 인용하심으로써 십자가 이전과 이후의 치유의 의미와 그 목적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려 주시고 있다. 십자가 이전의 물리적인 치유와 이후의 영적 치유를 구분하지 못함으로써, 조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중생이 곧 질병의 치유를 뜻하는 것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3. ‘성령의 치료’ 근거 구절로 삼은 로마서 8:11
『또한 그리스도의 영은 치료의 영이요, 부활의 영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령은 우리 속에 계시며 우리를 치료하십니다.』6)
조목사는 위의 인용 부분에서 성도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치료’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를 위해 로마서 8:11을 인용했는데, 이것을 바른 성경을 근거로 설명해 보도록 하자.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분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분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으로 인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기서 “너희의 죽을 몸”(your mortal bodies)은 ‘너희의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일단은 죽게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로마서 8:11의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의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을 장차 영원히 죽지 않아도 될 실제적인 몸으로 변모시켜 주신다는 것을 뜻한다. 이 말씀은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질병의 저주에서 벗어난다는 주장과 무관한 구절임에도 순복음의 ‘치료’를 위해 오용된 것이다.
4. 병의 치료와 관계없는 ‘새로운 피조물’
조목사는 중생의 결과로 되는 ‘새로운 피조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넷째,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복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무엇보다도 영혼이 잘되는 복을 받습니다... 또한 범사에 잘되는 복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 건강과 장수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7)
<한글킹제임스성경>은 고린도후서 5:17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변개된 <개역성경>에는 “모든 것이”가 삭제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새로워져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이전의 모든 육신적 욕망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도 아니고, 죄짓는 것을 멈추게 되었다는 것도 아니다(롬 7:14-18).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전에 없던 무언가가 성도 안에 생겼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 ‘무언가’는 바로 새로운 성품, 곧 영적인 성품이다. 즉 죄에 대해 강한 양심을 갖게 되고, 술·담배를 끊게 되고, 성경을 공부하고 싶어지고,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부르고 기도하고 싶어지게 되는 것, 구원받기 전에는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새 성품이 우리 안에 형성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영적 시야’가 생긴 것이다.
고린도후서 5:17의 전후 문맥에 의하면, ‘새로운 피조물’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산다(15절). 사람들과의 육신적인 교제를 중단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사렛의 목수가 아닌 주 하나님으로 알고서 그분과 교제한다(16절). 죄인과 하나님의 화해를 위해서 화해의 말씀, 즉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대사가 된다(19절). 여기에는 조목사의 ‘건강과 장수의 축복’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범사에 잘되는 복’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전에 없던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가능하게 된 새로운 피조물을 육신적인 환경이 바뀐 존재로 전락시킨 것은 매우 비성경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5. 그리스도인의 치료에 관한 성경적인 관점
조목사는 ‘기독교는 치료의 종교’라며 예수께서 모든 교회들에게도 신유의 역사를 베풀라고 지시하셨다고 했지만,8) ‘예수’께서는 모든 ‘교회들’에게 신유의 역사를 베풀라고 지시하신 적이 없다. 또한 그는 『기독교의 복음은 치료의 복음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를 증명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총을 통해 영혼과 육체와 생활을 치료받고 건강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9) 라고 기술했지만, “복음”이 언급이 되는 성경 어디에서도 그것과 동반된 물리적인 치료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단, 마가복음 16장에서 병자의 안수와 회복과 관련된 신유의 표적이 언급되는데, 이는 ‘왕국복음’의 표적으로서 천년왕국이 지상에 세워지기 전에 실행될 것이다. 신약 교회 시대와는 무관하다. 위의 두 내용에 대해서는 ‘신유론’과 관련하여 자세히 다룰 것이다.)
“성경”은 죄인이 구원받는 순간 그의 혼이 육신의 “죄들의 몸”을 벗는 영적 대수술이 일어난다고 말씀한다(골 2:11). 바로 그 “성경”은 우리가 그 순간 혼의 구원은 받았어도(벧전 1:9) 죄들이 거하는 그 몸은 구속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한다. 『그들[피조물]뿐만 아니라 성령의 첫열매들을 가진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되는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느니라』(롬 8:23). 성경은 ‘피조물’이 겪는 “썩어짐의 속박”을(21절) 모든 창조물이 함께 신음하며 겪고 있으며(22절), “우리,” 곧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썩어짐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23절). 질병의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이 “몸”을 벗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질병에 걸리지 않는 새 몸을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 그 몸은 성도가 이 육신의 장막을 벗은 뒤(고후 5:1,2) 부활할 때 입게 되며, 살아서 휴거되는 자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입게 된다(고전 15:50-53). 그 이전에 병의 저주에서의 해방을 논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무관한 ‘순복음’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앞서가려는 ‘다른 복음’인 것이다(갈 1:6-8).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더하지도 빼지도 말아야 한다. 이것은 성경의 명령이다(신 4:2, 잠 30:6, 계 22:18). 잠언의 말씀은 거기에 더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으로 책망을 받을 뿐만 아니라 거짓말쟁이로 여겨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면 병의 저주에서 해방된다는 주장이 비록 ‘긍정적으로’ 들린다 할지라도, 그것이 복음의 진리에 첨가된 것이라면 주님의 구원 계획과는 무관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모든 죄악”(all iniquity)에서 구속하셨다(딛 2:14). 병에서 구속한 것이 아니다.10) 결코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 곧 ‘다른 복음’으로는 죄인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보혈로 거듭난 성도에게 있어 질병은 더 이상 “저주”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감사함으로 알려지게 할” 기도의 제목이 된다(빌 4:6). 죄인이 구원받은 후 갖는 질병은 주님께서 성도를 다루시는 방편이고(고후 12:7-9), 주님께 기도하게 하는 방편이며(약 5:14,15), 속 사람을 강건케 하는 방편이 된다(고후 4:16). 그러므로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시각으로 질병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BB
주석)-----------------
1)조용기, 『보혈의 신비』, (서울: 서울말씀사, 2006), pp.135-136.
2) Ibid., p.148.
3) Ibid., p.147.
4) Ibid., p.162.
5) Ibid., p.181.
6) Ibid., p.115.
7) 조용기,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서울: 서울말씀사, 2002), p.76.
8)『보혈의 신비』, p.166.
9) Ibid., pp.166-167.
10) Ibid., pp.27-29.

전체 56 / 1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