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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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에 뿌리내린 음녀의 누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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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12월호>

한동안 숨어지내던 지방교회는 한국복음서원의 활발한 서적출판과 아울러 크게 확산되고 있으며, 워치만 니의 후광을 업고 맹렬한 기세로 그리스도인들을 흡수해 가고 있다. 대학가에도 이미 「에클레시아」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선교단체로 등록이 되어 있어 어느 정도 제도권에 진입하고 있는 것 같다.
지방교회는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의 복음전도자 워치만 니 형제가 교단 분열에 대한 문제점에 대해 나름대로 “성경적” 처방을 내린 후 본격화되었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4. 교회의 지방적 입장」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중국의 공산화 이후 대만에서 워치만 니의 후계자로 알려진 위트니스 리(이상수)에 의해 확산되기 시작한 지방교회는 1960년 미국의 아나하임에 본부를 두고 전세계로 퍼져나가 현재 세계 1000여 개 도시에 지부를 두고 있다. 그들의 말로는 모든 지방교회는 (지방교회란 용어는 local church, 즉 일반적으로 “지역교회”로 번역되는 용어를 이들 그룹이 독특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행정의 독립을 원칙으로 하고 다만 서로 “교통”(교제, fellowship이라는 말을 독특하게 사용함.)을 할 뿐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일사불란한 조직체를 이루어 위트니스 리를 정점으로 카톨릭 교회 못지 않은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위트니스 리는 자기 자신이 사도 바울을 계승하는 사도라고 여러번 주장했다.

현재 우리나라 교계에는 워치만 니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둘로 갈라져 있다.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좌, 행, 참> 등과 같은 경건 서적들이 크게 호응을 얻고 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책들이 읽히고 있다. 반면 위트니스 리에 대해서는 다양한 비판들이 제기되었고, <현대종교>, <목회와 신학> 및 기타 기독 언론들에서 지방교회의 교리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을 해 왔으나, 그들의 비판은 핵심을 벗어난 피상적인 비판에 머문 느낌이다. 더구나 이들을 비판한 교단 신학자들이 성경과 성경 해석에 대한 입장에 있어 지방교회에 못지 않게 빗나가 있다는 사실은 본 학회지를 통해 여러 번 제시된 바 있다.

이에 필자는 지방교회에 1년 이상 몸담고 있었으며 3년 이상 위트니스 리의 회복역 신약주석성경, 라이프스타디, 하나님의 신약경륜을 비롯한 100여 권의 단행본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지방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들 중에는 지방교회가 극구 반대한다고 하는 로마 카톨릭, 즉 큰 바빌론 음녀가 집어넣은 누룩들이 상당히 있다. 이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지방교회의 교리들과 책자들로 미혹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지방교회에 몸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눈을 뜨고 진리에로 돌이키도록 함이다.

1. 최종권위

이사야 14장에는 인간의 창조 이전에 이미 기름부음을 받은 그룹이었던 루시퍼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탄은 인간 창조 직후 인간에게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질문을 던졌다(창3:1). 이 도전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유혹에 넘어져 타락한 인간에게는 사탄의 반역하는 성품이 주어졌고 이후 인간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존재로서 운명 지워졌으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는 기회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거듭남으로써 죽었던 영이 살아난 사람들은 이제 믿음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 있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최종권위로 삼게 된다. 문제는 여전히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해서 그 권위를 찬탈하려고 하는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만을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로 삼는 사람들 속에 이 말씀 이외에 철학과 전통(골2:8), 그리고 과학(딤전6:20)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로 받드는 사람들을 침투시켰고, 로마 카톨릭은 더 나아가 “유일하고 하나뿐인 사도적 교회”인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권위임을 내세움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들은 디모데전서 3:15을 그 근거로 내세우지만 이 구절에서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유기체를 말하는 것이지 로마 카톨릭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지방교회는 마태복음 13:33의 여인이 계시록 17장의 음녀이며 이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다. 이 면에서는 모든 개신교회들보다 앞서 있는 셈이다. 문제는 지방교회도 역시 자기들의 “지방교회”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교회로 내세우고,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교회에 더 권위를 두고, 결국은 로마 카톨릭 교회처럼 하나님께서는 지방교회만을 통해서 진리를 계시하시고 따라서 지방교회만이 성경의 올바른 해석자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결국 주님의 모든 이름들 위에 크게 하신(시138:2) 하나님의 말씀보다 흠 많고 점 많은 구원받은 죄인들로 이루어진 조직체인 지방교회가 더 권위를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한 자들이기에 이들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고 섭리로 보존하신 그 성경을 분별해 내지 못하고 여러 가지 성서들을 다 사용하며 그 중에서 자신들이 번역해 낸 회복역(Recovery Version : 형제회 창설자인 넬슨 다비의 다비역 성서를 근간으로 해서 지방교회 “학자”들이 편집 번역하고 위트니스 리가 주석을 단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성서)을 최고의 성경으로 받드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들이 성경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세상에 나와 있는 모든 성서들을 다 활용하면 좋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절대적이고 무오하신 그분의 말씀을 보존하셨고(시12:6,7) 그 성경만이 유일하고 최종적인 권위가 된다고 하는 건전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교회에 있어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권위는 성경이며, 성경이 교회로부터 권위를 얻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로 교회가 성경으로부터 권위를 얻는 것이다. 2000년 교회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권위로 받아들이지 않는 참된 교회는 이제껏 없었다.

2. 성경해석

위트니스 리는 그의 책들에서 공공연히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며 비유적으로 (Allegorically and Spiritually)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밝히고 있다. 구체적인 실례를 여기서 일일이 들 수는 없으므로 한 가지만 예를 들겠다. 나머지 부분은 위트니스 리의 그 어떤 책을 참고로 해도 확연히 드러난다. 요한복음 14:2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처소를 마련하러 가신다고 하셨다. 3절에서는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그들을 주님께 영접하여 주님이 계신 곳에 그들도 있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이것이 새 예루살렘과 주님의 재림에 대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에 따르면 처소(place)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으로 성령이 거하실 사람의 영을 말하고, 다시 오신다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이런 식으로 일관성 있게 “그럴싸하게” 해석하므로 많은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게 보이고 너무도 잘 꿰어 맞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진리의 지식으로(딤전2:4) 무장되지 못한 사람은 속기가 쉽다. 그러나 이러한 풍유적, 비유적, 영적인 성경 해석은 배교한 유대 철학자 필로에 의해 시작되어 클레멘트, 판태누스, 그리고 오리겐에 이르는 알렉산드리아의 성경 변개자들의 성경 해석 방법이었다. (예를 들면 필로는 카나안 땅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위트니스 리도 똑같은 해석을 한다. 오리겐은 출애굽기의 산파들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며, 사내 아이들은 혼의 이성적 능력이요, 여자 아이들은 혼의 자연적 성품을 말한다고 주장했다. 교황 그레고리 대제(540-604) 역시 욥은 그리스도이고, 욥의 아내는 욥의 육신적 성품이며, 욥의 일곱 아들들은 사도들과 성직자들이며, 욥의 세 딸들은 세 종류의 충성된 평신도이고, 욥의 친구들은 이단이며, 7천 마리의 양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알레고리적 해석을 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권위로 삼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최종권위로 삼는 헬라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식에 입각해 (물론 철학과 과학을 도구로 해서) 성경을 뜯어 고쳤고 그 산물이 바로 오늘날 <킹 제임스 성경>(영어의 경우)과 <한글 킹 제임스 성경>(한글의 경우)을 제외한 모든 변개된 성서들이다. 따라서 최종권위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고 있지 못한 지방교회가 잘못된 성경 해석 방법을 택했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

3. 교리에 대한 태도

지방교회의 최종목표는 모든 교파가 해체되고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한 지방(도시)에 하나의 교회로 단합하는 것이다. 이 경우 각 교단들의 교단 교리들은 모두 용납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라면 어떤 교리를 갖고 있더라고 모두 용납된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든, 침례를 받든 상관 없다. 여자들이 머리에 무엇을 덮든 말든 상관 없다. 방언을 하든 안하든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교파 분열은 교리에 의한 분열이기에, 한 지방에 한 교회만 세워진다면 교리의 차이점은 서로 용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리를 누룩이라고 부르시면서 조심하라고 경고하셨고 신약 곳곳에서도 거짓 교리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히13:9, 요이9, 계2:24, 딤후4:3, 딤전4:1 등). 심지어는 마귀들의 교리들이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딤전4:1). 그런데도 교리의 차이점을 모두 용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4에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신 이래 계속해서 나누시는 분이다. 레위기에서는 정결한 짐승과 불결한 짐승을 나누시고, 이방인과 유대인을 나누시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나누시고, 심지어는 영과 혼을 나누시기도 한다(히4:12-14).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리에 의해 나누어진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교리를 따르는 자들과 사람들과 마귀들의 교리를 따르는 자들로 나뉘는 것이다. 성경을 주신 첫 번째 목적은 (딤후3:16)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앞서 올바른 교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교리란 특정한 주제에 대한 진리이다. 예를 들면 구원에 관한 교리를 구원론이라고 하는데, 은혜로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은 건전한 교리요, 믿음에 행위를 더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거짓 교리이다.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리요, 구원받았을지라도 다시 타락하면 지옥에 간다는 것은 마귀의 교리인 것이다. 환란 전에 교회가 휴거된다는 것은 진리요, 교회가 환란을 통과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거짓 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진리의 지식에 이르려면 이 교리들을 올바로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딤후2:15). 그런데도 지방교회는 교리를 매우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면서 교리란 곧 교리논쟁과 분열을 가져오는 “못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잘못된 태도는 결국 체험 위주의 신앙생활로 이어지고, 말로는 “생명의 느낌”(혹은 기름부음) 등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감정과 자기 최면에 (“오! 주 예수여”를 수십 번씩 중얼거리면 자기최면에 안 걸릴 사람은 없다.) 속아 살아 간다. 정말로 지방교회 집회소에서 들려 오는 것처럼 “오!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이 진실이 되려면 요한복음 14:23,24의 말씀대로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4. 교회의 지방적 입장

이 교리는 지방교회가 세워진 근거가 되는 것으로 지방 교회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최후의 보루이다.
워치만 니 형제는 구원받은 후에 자기반 학생들 100명에게 복음을 전해 99명을 구령했다고 한다. 그런데 함께 교제하던 이들을 어느 날 일부는 장로교 선교사가, 일부는 감리교 선교사가, 그리고 일부는 침례교 선교사가 자기들 교회로 데려가 자기들이 얻은 열매처럼 본국에 보고했고, 그 이후로 그들은 각자 그 선교사들의 교단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워치만 니 형제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아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었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중국의 3대 교단(장로교, 감리교, 침례교)에서는 그를 초교파 전도자로 임명해서 중국 전체를 복음화하고자 했다. 워치만 니는 자기의 설교를 듣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여러 교파로 갈라져서 다른 교회에 다니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세 교단이 합쳐서 하나가 되라고 권고했고, 그럴 경우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물론 이 제안은 거절되었고 교단의 분열에 고뇌하던 워치만 니 형제는 성경을 읽다가 교회들 앞에 붙여진 도시의 이름들에서 “영감”을 얻어 고린도 성읍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church)가 단수로 되어 있고 갈라디아 지방에는 교회들(churches)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교회는 각 지방(성읍)에 하나씩만 있어야 하고 교회 앞에는 도시 이름 이외에는 붙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교회 분열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워치만 니 형제가 그리스도의 몸된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각 지역에 세워지는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혼동했다는 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1:2)는 고린도 성읍에 살고 있는 모든 거듭난 사람들, 즉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고린도에 세워진 단 하나의 지역교회(local church)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당시 지역교회가 하나밖에 안 세워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후 여러 개의 지역 교회들이 세워졌을 것이다. 문제는 이 하나님의 교회를 고린도에 세워진 단 하나의 지역교회라고 착각하였고,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지역교회의 회원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데 있다.
갈라디아서 1:2의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편지하노니』라는 말은 그야말로 지역교회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맥에 따라 “교회”라는 단어는 주님의 몸된, 보이지 않는 유기체로서의 교회(엡 5장), 구약의 불러낸 무리인 이스라엘(행 7장), 이교도들의 성전(행19:37), 지역교회들(갈1:2) 등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문맥을 살펴 확인해야만 한다.
지방교회는 현재 서울에만 10개가 넘는 집회소를 갖고 있으면서도 “서울 교회”라는 이름 하나만 사용하고 집회모임은 따로 갖는다. 함께 모여 주님을 경배하지 않는데도 이름만 하나로 갖고 있으면 그것이 하나의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서울 교회 제1집회소, 제2집회소... 과연 이런 이름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지역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교단에 가깝다. 외국의 경우 대도시에서는 도시 이름이 아닌 구 단위별로 이름을 따로 부른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주장이 있다고 한다. 필자도 한때는 한국 교회들의 분열을 놓고 마음 아파하다가 이 지방적 입장의 교리가 성경적이고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순수한 생각으로 “천안교회”에 합류하여 생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온전한 성경을 통해서 오늘의 축복된 자리로 인도해 주셨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교단들이 생기고 교파들이 창궐하고 이단들이 득세하게 될 것들을 미리 성경에서 예언하셨고 순수한 무리들(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말함)은 소수일 것을 라오디케아 시대에 대한(계 3장) 명백한 계시를 통해 보여 주셨다. 잘못된 성경, 잘못된 성경해석, 잘못된 교회론에 입각해서 잘못된 교리도 포용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없다.
이 외에도 삼일하나님(삼위일체를 독특하게 부르는 말),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 징계와 보상, 종말론, 성령과 사람의 영 등에 있어 매우 위험스럽고 비성경적인 교리들이 너무도 많이 있지만 이 모두는 올바른 성경과 올바른 성경해석을 내버린 결과로 얻어진 열매들이기에 자세한 언급은 차후로 미루도록 하겠다.
바울이 자기 민족의 구원에 대해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필자도 한때 함께했던 지방교회 형제자매들이 진리로 돌이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지면상 더 자세히 더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는 짚고 넘어간 것 같다. 이제껏 지방교회를 비판해 왔던 소위 “정통”, “보수”, “복음주의자”들 역시 최종권위와 성경해석 방법과 교리에 관해서는 지방교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극단적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 은사주의 등 역시 하나님의 최종권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올바른 방법론으로(딤후2:15, 고전2:13) 성경을 공부할 때만이 바로잡혀질 수 있을 것이다. <바른 성경을 찾아서>, <진리의 지식을 찾아서>, <바른 신학을 찾아서> 등을 비롯한 본 학회의 책자들이 독자 모두에게 유익한 도움을 줄 것으로 확신하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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