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이단종합 분류

다락방 운동 - 비성경적인 다락방식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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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09월호>

현대 기독교의 특징 중 하나는 교단을 초월하여 연합을 하는 데에 있다. 사회 전반적인 화해와 연합의 분위기를 그대로 타고 교회들도 절대적인 진리를 외치기 보다는 하나된다는 것이 마치 지상명령인양 거기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교단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 왔었다. 서로 비방하고 정죄하고 물어 뜯으면서도 교단의 세력들은 점점 확대되었고, 그것이 곧 선교이고 복음화인양 여겨졌었다. 그러다가 은사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꾸준한 “노력과 공로”(?)로 교단들은 독자적인 교리들을 양보하고 연합하는 길만이 유일한 선교의 길이라는 데에 의견을 모으게 되었다. 여기에 선교단체들도 한 몫 했다. 그들은 여러 교회들에서 특별한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이기에 특정 교단에 얽매이지 않고, 모인 사람들도 신학자들이나 교역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특정한 신학이나 교리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그들로 인해 초교파 연합 운동이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는데, 이처럼 교회도 교단도 아니지만 교회와 연관성을 갖고 교회들에 영향을 주게 되는 이러한 특정 집단들이 이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단체들의 문제점은 첫째, 신학이나 교리가 없으므로 교계의 풍조에 따라 이리 저리 밀려 다닌다는 것과, 둘째, 자기들의 전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된 것을 누룩처럼 확산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그 전하는 방식도 매우 자극적이어서 교단 교회들에서 무료해진 사람들을 현혹시키기에 매우 적절하다. 예를 들어 현대적인 노래나 문화행사로 젊은이들을 끌어들인다거나, 성경에서 특정한 한 부분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그 부분에 관한한 대단한 존재로 느끼도록 현혹하는 것 등이다. 이들은 결코 성경 자체를 강조하지도 않고,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통하여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장성하심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도록 돕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들 단체에 맞는 “요원”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단체들 중, 최근 한국 교계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다락방 운동”이다. 다른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교파와 관계없이 각 교회들로부터 사람들을 모아 자기 사람들로 훈련시킨다. 여전히 대한예수교 장로회라는 간판은 달고 있지만, 선교단체들과 마찬가지로 교단을 초월해서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각 교회들에서 문제가 되니까 아예 별도의 교단으로 독립해 버렸다. 그들은 잘못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누룩을 퍼뜨리고 있는데, 말했듯이 그들은 회원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성장시킨다기보다는 하나의 전도 요원으로 만들고 있다. 여기서 “전도 요원”이라는 말이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는 분명히 아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상적으로 성장한 다음 그 말씀의 칼을 여러 방면으로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성경을 봐도 무슨 구절이든지 한 부분, 즉 전도와 세계 복음화에만 맞춰서 보기 때문에 도저히 전 인격적으로 성장시킨다고 볼 수 없다. 전도, 세계 복음화,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하지만 이들이 정작 하고 있는 전도와 세계 복음화는 과연 성경적인 것인가?

그들은 전도를 말하는데, 그 전도란 죄 때문에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보혈을 전해 지옥에서 하늘로 끌어 올리는 단순한 복음이 아니다. 그들의 전도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복음으로서의 전도이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우리가 주변 상황을 쳐다 보면 파괴된 자연, 악한 사회 환경, 경제적, 정신적으로 겪는 집안 문제 등, 그리스도인들에게 악영향을 주는 상황들이 너무 많이 있다. 이러한 모든 문제에서 해결될 수 있다니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이다. 그래서 그들은 입버릇처럼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강조한다. (위트니스 리의 지방 교회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오 주 예수여”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보았는가? 제도 교회 교인들이 입버릇처럼 “주여,” “할렐루야” 하는 것을 들어 보았는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왕직, 선지자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분의 이 세 직분에 속한 권세로 말미암아 우리도 그 권세를 누린다는 것이다. 마귀를 결박할 수도 있고, 천사를 동원할 수도 있고, 모든 축복을 향유할 권세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문제들은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되었는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면 그 모든 문제와 저주들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어떤 마귀에게 사로잡힌 불신자가 구원을 받게 되면, 그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니까 선지자적 사역이 행해진 것이고, 죄를 용서받았으니까 제사장적 사역이 행해진 것이고, 마귀를 쫓아낸 것이니까 왕적 사역이 행해진 것이라는 것인데, 문제는 이렇게 구원받게 되면 단순히 죄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문제들, 즉 정신문제, 생활문제, 가문의 문제, 자녀의 문제 등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들은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원인인 마귀를 굴복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죄인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한 죄인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그의 혼이 구원받아(벧전 1:9), 죽으면 하늘에 간다는 것과 주께서 오실 때 부활한다는 것(고전 15:51-54), 또 그의 영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며(요 3:5),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요 1:12), 양자가 되어 미래에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을 상속받게 되는(롬 8:17) 등 많은 의미를 띤다. 하지만 어느 하나 이 땅에서의 모든 문제를 해결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창세기 3장에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 시작된 인간과 땅에 대한 저주는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구속될 때(롬 8:18-23), 즉 주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가 휴거될 때 일어나는 것이다. 실제로 누가 구원받았다고 그의 문제가 싹 해결되었는지 확인해 보라. 그들은 “사실은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었지만 아직 하나님의 시간표가 이르지 않아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아니다. 분명히 모든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은 피의 구속이었다. 그것은 우리 혼의 구속이며, 우리의 영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우리는 아직 저주받은 피조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 저주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육신은 아직 저주받은 아담의 육신을 입고 있다. 그래서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것을 소망하는 것이다. 지금 육신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었다면 왜 영광스런 몸을 기다리고 살아야 하겠는가? 단지 그리스도인은 이 악한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을 뿐이다.
구원받았을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생각은 은사주의의 소위 “만사형통론”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은사주의의 특징은 단순히 방언하고 신유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사주의에서는 물질축복이 곧 그의 영적인 척도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을 정도다. 다락방에서는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지만, 십자가에서 해결된 모든 문제를 향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는 은사주의와 같다.

다락방 운동에서 강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마귀를 쫓아내는 영적 전쟁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마귀를 쫓아 내거나 마귀를 결박하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그것은 창세기 3:15에서 여자의 씨가 뱀의 씨의 머리를 부순다는 예언을 십자가 사건에 잘못 적용하면서 생긴 오류인데, 여기다가 마귀를 쫓아내는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사역으로 연결시킨다. 이 근거를 요한일서 3:8, 즉『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는 마귀가 처음부터 죄를 짓기 때문이라. 이 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셨으니, 곧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에서 찾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의 왕적 사역을 말한다기 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하는 구절이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왕되심을 말하는 부분을 구약부터 찾아보라. 지금 우리를 영적으로 다스리시는 영적인 왕으로서의 구절들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은 이 땅을 실제적으로 다스리시는, 실제적인 땅의 통치자의 의미로 사용되는 구절들이다(삼하 7:12, 사 9:7, 단 2:44, 시 46,47편, 마 4:17; 25:31 등 수 백 구절).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에 관한 사역은 주로 그분의 재림에 맞춰져 있지, 초림에 맞춰져 있지 않다.
또한 그들이 모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만 한정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 직분을 말하는 것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칭에는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사람의 아들)와 다윗의 아들이 있다. 이 세 이름은 그리스도의 세 직분과는 별도로, 그분의 사역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구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은 그분의 신성을 말하고, 인자라 함은 그분의 인성을, 그리고 다윗의 아들이라 함은 이스라엘의 왕되심을 말한다. 그리스도라는 세 직분은 각 구절들과 상황들에 따라서 모두 하나님의 아들에 적용되기도 하고, 인자에게 적용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요한일서 3:8은 그분의 신성을 다루는 구절이다. 사탄은 이 세상의 통치자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 세상의 신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통치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왕국을 대적한다는 의미요, 이 세상의 신이라는 것은 죄라든지 그밖의 세상에 속한 것들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의미이다. 요한일서 3:8은 마귀를 말하지만, 마귀의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도 인간에게 죄를 짓게 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 죄를 사하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요한일서 3:8 본문도『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셨으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세 가지 사역과 굳이 연결시킨다면 오히려 죄를 깨끗게 하시는 제사장으로서의 사역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야 조금 더 합당할 것이다.)
또한 그들의 마귀 쫓는 일들을 보면, 한 개인을 압박하는 마귀를 쫓는 것만이 아니라, 한 지역을 관장하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들어 다락방 요원들이 어느 지역을 전도하려 하는데, 그 지역이 불교가 심한 지역일 때, 기도로 “집중사격”하여 마귀를 결박시킨 후 그 지역을 복음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개개인에게 들어 있는 마귀들을 쫓아내신 적은 있어도 한 지역에서 마귀들을 쫓아 내신 적은 없다. 사도 바울도 아테네에서 우상들이 많아서 영이 괴로워하기는 했지만(행 17장), 그곳에서 마귀를 축출하거나 결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지역에서는 구령을 많이 하지 못했었다. 더욱이 가문을 사로잡고 있는 마귀라든가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마귀들을 어떻게 기도로 물리칠 수 있는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지난 97년도에 미국 풀러 신학교의 교회성장학자인 피터 와그너라는 사람이 순복음교회의 초청으로 방한한 적이 있다. 그도 역시 특정 지역을 관장하는 마귀를 물리치라는 말을 했는데, 그러는 가운데 “도시 전체가 구원받은” 한 예를 제시한다. “과테말라에 있는 알몰롱가라는 도시입니다... 전에는 빈곤과 질병의 도시였던 곳에 그 도시를 붙잡고 있던 영이 ‘마쉬몬’이라는 영이었는데, 이제는 마쉬몬이 힘을 잃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그 악령을 쫓는 기도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400명에게 축사를 하였습니다. 다른 목사님들도 악령 쫓는 것을 시작했어요. 그래서 악한 영들의 세력이 다 떠나게 되었습니다.” 피터 와그너의 이 예화는 오늘날 다락방 운동에서 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결국 다락방 운동도 “교회 성장론”에 대한 한 분야일 뿐이다.
그들은 마귀와 싸우는 영적 전쟁을 강조하지만, 주로 우상 숭배 등 직접적인 마귀들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그런데 사실 마귀는 그러한 것보다 더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을 숨기고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넘어뜨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적인 문화가 교회 안으로 침투하는 것이 그것인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타락한 현대 음악이 교회의 예배 음악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경배와 찬양 등의 명목으로 드럼과 전자 악기들을 사용한다. 그들은 그러한 악기들로 찬양을 하며 은혜를 받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 은혜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열광이 다른 방법으로 표출된 것뿐이다. 그것은 사탄이 뿌려 놓은 세상적인 요소를 교회 안으로 가져 오려는 교묘한 침투일 뿐이다. 그런데, 지난 여름 L.A.에서 다락방 운동의 한 행사로 열린 “렘넌트 2000 대회”에서는 청소년들이 힙합 댄스를 추며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는 행사를 가졌다고 하니, 그들은 실상 마귀를 쫓아낸다 하면서도 마귀에게 놀림당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어쨌거나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왕, 제사장, 선지자라는 세 직분을 이해하고, 그러한 의미로 영접을 해야 정말로 영접을 하는 것이라고 하니, 이것은 진정한 복음이 아니다. 다행히 그러는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의미를 깨닫고 영접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구원받겠지만,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죄인의 구원은 십자가의 보혈로 받는 것이지, 왕의 재림으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다락방 운동의 이러한 일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다소 특이한 용어로 특이하게 제시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한국 교계 내에서 수시로 있었던 일들이다. 은사주의에서 부분적으로 그러한 일들을 했고, 선교단체들에서 부분적으로 그러한 일들을 했고, 십자가에서 마귀의 머리가 부숴졌다는 생각은 장로교 및 기존 교회들의 생각과 동일하다. 요즘 많은 교회들에서 다락방을 비판하고 이단시까지 하고는 있지만, 어찌보면 그들은 이유없는 비난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교리는 기존 교회들, 특히 장로교의 교리와 같고, 어떤 면에서는 기존 교회들이 다락방보다 훨씬 못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전파한다. 그들의 비판의 진정한 이유는 다락방 운동이 자기들 교회의 교인들을 빼앗아가고, 자기들 교단의 목사들을 빼앗아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락방 측은 자기들에 대한 비판을 대할 때면 항상 “다락방은 기존 교회들과 다른 점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와 너희는 다른데, 너희는 틀렸고 우리는 옳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믿는 것은 당신들이 믿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왜 우리를 이단이라고 하느냐?”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다른 교회들은 전도를 안하고 우리는 전도를 한다 하며 우월한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이것은 그들이 한국 교계와 지속적으로 끈을 맺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교단과 관계없이 다른 교회들을 자기들의 단체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다락방에 속해 있는 한 목사가 우리 교회에 방문한 적이 있다. 필자가 그에게 가서 몇 마디를 나누던 중, 진리의 지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라는 말만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만 하면 그 말만을 반복하고 피해 버리기에 더 이상 말을 잇지는 못했지만, 그때 필자가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도데체 그리스도에 대해서 얼마나 아느냐는 것이었다. 예수가 그리스도며, 그분은 왕이시고 제사장이시고 선지자이시고, 이것을 알고 그분을 영접하면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모든 것이라면 그는 몰라도 한참 몰랐던 것이다. 진정 그리스도를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
진정 그리스도를 알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인 바른 성경을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강조하면서도 “그리스도”라는 말이 무수히 삭제되어 있는 개역성경을 보겠는가? 그리스도의 말씀이 변개되지 않은 바른 성경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 다음엔 그 말씀을 차근히 공부해야 한다. 성경에는 참으로 많은 말씀들이 있다. 십자가의 구속에 대한 말씀도 있지만, 율법에 대한 말씀도 있고, 왕국에 대한 말씀도 있다. 특히 예언의 말씀은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다. 베드로전서 1:19은『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어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 예언의 말씀을 주의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한다. 물론 예언만 강조해서도 안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의 모든 부분들과 주제들을 골고루 아는 가운데 진리의 지식을 얻고 그리스도의 장성하심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양날가진 칼은 한 가지만 베는 협소한 칼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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