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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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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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9월호>

오늘날 수많은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로마 카톨릭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여러 교단 중 하나라는 말을 듣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연합을 위해 믿음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도 화합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지난 시대의 성도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수호했던 성경의 진리들은 오늘날 연합이라는 미명 하에 타협되며 또 완전히 배제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향해, 또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 책은 다른 모든 것보다 연합을 중요시하며 추구하는 현상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것이며, 독자들로 하여금 믿음을 수호할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참된 성경적 교리를 견고히 붙잡도록 촉구할 것입니다. “주여, 영국왕의 눈을 뜨게 하옵소서.”라고 외쳤던 틴데일의 최후의 기도처럼, 오늘날 교회는 눈을 뜨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본문 중에서.


서문

1953년 여름, 유난히도 화창했던 어느 날 오후 역사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교실에 앉아 있던 남자아이들 대부분은 수영이나 크리켓 경기 같은 딴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 날 역사 수업의 주제는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이었다. 나는 전혀 흥미로울 것 같지 않은 이 수업을 들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수업이 후에 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 날 들은 내용은 나의 상상을 사로잡았으며, 내 마음을 움직였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때 스쳐가는 섬광 같았던 그 무엇을 나는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한 시간의 수업을 통해 나는 기독교가 무엇이며 무엇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지를 아주 실제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희생과 자기 부인, 그리고 진리에 대한 타협하지 않는 사랑이었다. 그때 나는 아직 내 삶을 완전히 뒤바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지만, 바로 그 날 이미 씨는 뿌려졌고 그 씨는 뿌리를 내려 수 년 후에 나는 그리스도께로 회심하게 되었다.
그 여름 날 오후 역사 선생님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순교자들과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그들의 굳은 의지를 매우 감동적으로 이야기해 주셨다. 또 그들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그들 믿음의 최종 권위로 끝까지 고수했다는 점을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윌리엄 틴데일의 생애와 영국의 종교개혁의 기초를 마련해 준 그의 성경 번역과 그로 인해 1536년에 있었던 그의 화형사건에 대해 말씀하셨다. 진리를 비추는 빛이 타올랐으니, 그것은 루터가 성경에서 재발견한 교리,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것과 사도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썼듯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라는 것이었다. 헨리 8세가 1538년에 국민에게 배포했던 성경은 틴데일과 그밖의 사람들의 노력으로 얻어진 결과의 절정이었으며, 빌보르드 화형대의 이슬로 사라져간 틴데일의 최후의 기도, ‘주여, 영국왕의 눈을 뜨게 하옵소서’에 대한 놀라운 응답이었다.
종교 개혁가들은 일단 고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으면 그것에 대해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화형당한 많은 순교자들이 성경의 단 두 단어 때문에 죽음을 택했다. 만일 그들이 그 단어들을 옆으로 재껴 놓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좀더 ‘폭넓게’ 해석했더라면 그들은 목숨을 건졌을 뿐 아니라 번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요 생명이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사망은 그 쏘는 것이 없었고, 음부에게도 승리가 없었다(고전15:55).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쓴 첫번째 편지에서 주의 만찬과 관련된 두 개의 단어는 ‘나를 기념하여’였다. 이 단어들을 강조하면서 그들은 성체성사 때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실재’(實在)하신다는 로마 카톨릭의 교리를 부인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 신조의 핵심인 화체설을 부인했는데, 이는 그 교리가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일, 즉 갈보리에서 단번에 치러진 희생 제사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존 로저스(John Rogers)는 헨리 8세 통치 기간에 틴데일의 성경 번역에 동참했으며 열 아이를 둔 가장이었는데, 메리여왕의 통치 하에서 화형당한 첫 번째 순교자였다. 1555년 2월 스미드필드의 화형장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한 프랑스 대사는 ‘결혼식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순교사를 집대성한 존 팍스는 그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밝은 용모로... 시편 51편을 암송하면서 사형장으로 향했다. 그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침착한 태도에 기뻐하며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다. 불 속에서 재로 변해가면서 그는 불꽃에 손을 씻었다.’
사람들은 로저스의 마음을 바꾸려고 온갖 시도를 다했다. 화형대의 장작더미에 불이 붙기 직전까지도 그의 신념을 철회하기만 하면 사형을 면할 수가 있었다. 성체성사에 대한 사악한 견해를 철회하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을 때, 다른 수많은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나는 내가 전파한 것을 내 피로 인치겠다’고 말했다.
열아홉 살의 윌리엄 헌터(William Hunter)는 미사에 참석하고 성체성사를 받으라는 칙령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 같은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죄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마음과 정신을 가졌으며, 양심을 거슬러 미사에 감히 참여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내 아들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아들을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헌터는 1555년 5월 에섹스의 브렌트우드의 화형장에서 순교했다.
1555년 발리올 대학 밖에서 화형대의 이슬로 사라져간 휴 라티머(Hugh Latimer) 주교와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 주교의 이야기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다. 특히 라티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수 세기가 지났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평안하십시오, 리들리 선생, 남자답게 죽음을 맞이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꺼지지 않는 촛불을 영국에 밝힐 것입니다.’
우리는 전몰장병기념일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 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들의 희생을 기념하며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리라’고 말한다. 수 세기 동안 교회와 국가는 모두 종교개혁 때 자신들의 믿음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살다가 죽어간 사람들을 기념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필자는 딸의 병 때문에 성 바돌로메 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병원은 런던의 스미드필드광장, 즉 16세기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고통당했던 바로 그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병원과 스미드필드광장 사이에는 중세에 세워진 담장이 서 있는데, 그 담장 위에는 그곳에서 죽어간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기념패가 있다. 기념패에는 아래와 같이 짤막한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이 지점으로부터 몇 피트 떨어진 곳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화형당한 존 로저스, 존 브랫포드, 존 필롯 등 하나님의 종들을 기념하며. 숭고한 순교자들이여, 그대들을 칭송하노라.’
순교자들이 죽어갔던 그 지점을 점유하고 있는 두 개의 영국 성공회 교회, 성 바돌로메 대성전과 성 바돌로메 소성전은 그들이 서 있는 땅의 역사를 그다지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그 두 교회에서 판매되는 책은 화형대에서 사람들이 죽어갔던 1550년대에 수도원에서 살았던 도미니칸 수도승들에 관해 말하고 있을 뿐, 존 로저스나 스미드필드에서 순교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방문객들을 관리하는 한 관리는 순교자들과 자기들의 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밖에서 화형 당했죠. 몇몇 아일랜드인들이 해마다 와서 그 곳에서 기념 의례를 치릅니다.’ 그 같은 견해는 그 두 교회에서 치러지는 종교 관습에도 반영된다. 다시 제정된 미사의 희생제사에서 말이다. 아침에는 주님을 ‘기념하는’ 성체성사가 있고, 오후에는 주님의 ‘실제적 존재’가 이루어지는 의식이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 성공회의 두 교회의 제단 사이에 위치한 지점에서 불타 죽어간 사람들은 오늘날 잊혀진 것이다.
필자가 밀 힐 학교의 역사수업을 들었을 당시에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어느 학교에서나 당연하게 가르쳐졌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에큐메니칼한 분위기 속에서 물의를 빚을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자 종교개혁에 관한 부분은 점차적으로 삭제되었다. 문교부는 최근 새로 편성되는 교과과정에서 종교개혁에 관한 부분을 완전히 삭제시킬 것을 권고한 바 있다. 마가렛 대처 집권시에는 관계 부처 장관에 의해 그 같은 견해는 묵살되었었다.
이 책의 일차적인 목적은 복음을 수호하다 죽어간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왜 그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희생해야 했는지를 잊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메리여왕의 박해 때 거짓 교리에 반대하다가 죽어간 자들 중에서는 아무도 성인으로 선언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성인들’이 아니며, 더욱이 어떤 영적인 덕목을 갖추어 후대 사람들이 ‘거룩한’ 자들로 분류하고 그들에게 기도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을 수호하다 순교한 이들은 죄 된 인간을 그렇게 숭앙하는 것을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단지 성도들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었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들로서, 그들의 행동과 그들이 보여준 모범은 우리 역사를 빛내주고 있다. 그들의 용기와,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순종은 종교와 제도화된 교회가 장악했던 영향력을 깨뜨리며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는 것이다. 그들은 회개와 용서라는 신약의 단순한 메시지, 즉 예수님과 그 분께서 십자가에서 치르신 죄를 위한 단번의 희생제사를 믿는 개인적인 믿음만이 구원에 요구되는 전부라는 것을 전파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값없는 선물이며, 그것을 받을 자격이 우리에게는 전적으로 없다는 것을 성경으로부터 알았다. 『온전하게 되심으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고』(히브리서 5:9). 그들은 성경 전체를 믿음으로써, 그것에 의해, 또 그것을 위해 살고 죽음으로써 주님께 순종했다.
그러한 믿음이 오늘날에는 드문 것 같다. 도처에서 보이는 것은 타협뿐이다. 서구문명을 비추던 빛이었던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격하되면서 사라져버렸다. 국가 교회 지도자들은 다른 종교들이 ‘하나님께로 이르는 또 다른 많은 길들’이며 또 ‘동일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다양한 분야들’이라고 말했다. 여왕이 참석하는 영연방 경축일 예배는 더이상 기독교의 예배로 인정할 수 없으며, 걸프 전쟁 시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방어를 위해 파견된 연합군 군목들은 자기들이 ‘복지 장교’들이라고 속였다.
오늘날 영국에는 ‘사랑 복음’이 퍼지고 있는데, 이는 복음의 소위 ‘긍정적인 부분’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와 구주로 선포되셨기 때문에 그 분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이며, 교리상의 차이들이 하나가 되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고, 진리를 주장할 수는 있어도 오류를 지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순교자들은 그들 시대에 그와 같은 입장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논쟁을 피하고, 자기들을 박해하는 자들과 많은 ‘긍정적인 부분들’에서 동의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에게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고 확증할 것과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들은 카톨릭의 오류와 우상숭배를 보았고, 책임 있는 지도자로서, 양무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야 하는 목자로서 그것을 폭로하고 계속해서 항거했던 것이다. 그들은 쉬운 길을 택하여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기독교 신앙의 다른 많은 진리들에만 집중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인간을 기쁘게 하기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영국의 교회는 미신과 우상숭배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제도로만 남아있었을 것이다. 윈스턴 처칠의 말을 빌자면, 종교적, 영적 갈등의 영역에서만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많이 빚지고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위험은 타협을 통하여, 인간이 이룩한 화합을 추구한다는 구실 하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순교자들의 피로 인친 성경의 진리들을 배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분리되어 나온 지점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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