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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영원한 동정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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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05월호>

카톨릭과 동방 이교도의 마리아 숭배

로마카톨릭 사상에 있어서 하나의 핵심이 되는 것은 마리아를 영원한 동정녀로 믿는다는 사실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난 호에서 보았듯이, 그러한 믿음은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에 대한 언급이 반복되는 신약성경과 상충되며, 성경에는 담고 있지 않는 기독교의 각종 자료들과도 그러하다.
마리아 숭배 사상에 일가견이 있는 카톨릭 저자들은 그러한 교리가 성경이 아니라 이후에 전승된 이야기에 근거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피타크(J.M. Carda Pitarch)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특별한 승인을 받은 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정녀 탄생이란 측면과는 달리, 그녀가 동정녀 출산을 경험했음을 의미하는 그 어떤 성경적인 증거도 없다는 것이다. 마리아의 처녀성에 대한 이러한 다른 측면은 후대에 받아들여진 믿음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언급된 마리아 숭배 연구가의 확언은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전부 옳은 이야기다. 성경은 마리아를 영원한 동정녀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교리가 후대에 유입된 신학임을 알아야 한다. 즉, 오래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믿음은 4세기 이전까지는 수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교리와 관련된 중요한 증인들 중 한 사람은 5세기 중엽 “마리아는 그를 잉태했을 당시, 처녀성을 지키고 있었기에 동정녀로서 아이를 낳았다.”(DS 291)라고 주장했던 교황 레오 황제로부터 시작한다.
A.D. 521년, 또 다른 교황인 호미스다스(Hormisdas)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머니의 처녀성에는 손상을 주지 않은 채” 탄생했다고 기록했다. A.D. 649년, 교황 마틴 1세에 의해 권력을 쥐게 된 로마의 시노드(Synod)는 마리아가 “순결함을 잃지 않은 채로 아이를 낳았고, 출산 이후에도 그녀의 처녀성을 지켰다.”(DS 503)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노골적으로 비난을 퍼부었다. 그 무렵 시작된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에 대한 믿음은 보편화되었고, 회의 문서들에서 그것을 언급하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었다. A.D. 693년, 톨레도(Toledo) 공회에서 마리아는 “처녀이면서 잉태했고, 처녀이면서 아이를 낳았고, 출산 이후에도 온전한 순결을 잃지 않고 처녀성을 보존했다.”(DS 571)라고 기록되었다. 그 교리는 중세 시대와 반 종교개혁 동안에 유난히 강조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마리아에 대해 “처녀의 순결함”과 그녀의 “영원한 처녀”임을 언급한 2차 바티칸 공회에서 이미 강조되었다.
역사적으로 그 기간을 엄밀히 살펴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첫 3세기 동안은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에 대해 믿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신약성경에서 드러난 것처럼, 마리아에게 아들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보편적이었다. 4세기가 시작된 무렵에 와서야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에 대한 사상에 문이 열렸으며, 보편화된 방법으로 중세 시대의 서막을 향해 그 사상을 확고히 다졌던 것이다.
기독교계에 이후의 수많은 결과들을 초래했던 이러한 중대한 변화는 무엇에서 기인한 것인가? 이렇듯 이상한 교리의 기원에 대해 이어서 분석해 볼 것이다.

첫 번째 근원
신약성경 다음으로 마리아 숭배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문들 중 하나가 <야고보의 초기복음, Prot evangelium of James>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스도 탄생까지의 마리아의 생애(I-XVI)와 예수님의 기적적인 탄생(XVII-XXI)과 사카랴와 아이들의 죽음(XXII-XXV)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된 이 작품은 예수회의 포스텔(Guillaum Postel)에 의해 이름붙여졌다. 그는 라틴어로 번역했으며, 표제는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에 관해서 별 언급이 없는 성자 야고보의 초기 복음 또는 역사 이야기, 마르커스(B. Marcus)에 의해 기록된 복음 이야기, 1552년 바셀의 테오도르 빌리앙드레에 의해 언급된 복음 전도자 마가의 생애.

<야고보의 초기 복음>은 그렇게 서방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포스텔은 <야고보의 초기 복음>을 동방 교회들의 정경으로 잘못 제시했다. 그는 그것을 심지어 마가복음의 서문이라고까지 주장했다. 15개 이상의 필사본들에 대해서는 티센돌프가 실제 본문을 수정했다. 이 “복음”에 관한 이후의 모든 판본들이 실제적으로 그러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그 기록연대를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저스틴(m.165)은 예수님이 동굴에서 탄생한 상황을 참조하거나 “jaran labusa”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야고보의 초기 복음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초기 복음과 산파를 통해 마리아가 동정녀임을 뒷받침한다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언급이 서로 관계를 가질 가능성이 더욱 크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통해 입증되는 것은 신학자들이 그 문서에 대해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전승되어 온 유사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m.311)가 유아들의 대학살을 언급하기 위해 초기 복음(Prot evangelium)을 사용했기 때문에, 3세기 말 무렵에는 꽤 알려져 있었다.
“예수님의 형제들”을 요셉의 전처에서 얻은 아들들로 해석했기 때문에 오리겐은 그것을 이용했을런지도 모른다(m.253-4). 그것이 살라미나의 에피파네스(m.403)뿐만 아니라 니사의 그레고리(m.394)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초기 복음(Prot evangelium)은 3-4세기경에 널리 알려져 이용되었고, 적어도 그 일부분이 마리아의 처녀성을 뒷받침하는 산모와 예수님의 형제들을 언급하기 때문에 이 문서의 존재는 확실하다. 예수님의 형제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인 야고보는 그 작품의 저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 배경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이다. 이 작품은 정경에 있는 마태, 누가복음처럼 마리아가 아이를 낳기 전에 처녀였음을 인정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인품에 관해 불순하다고 주장할 만한 가능성 앞에 보호장벽을 쳐놓고, 다른 성행위들의 차원을 뛰어넘은 처녀성의 우월함을 향해 미묘한 암시를 만든다.

마리아는 처음부터 남다른 본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마리아가 남편의 씨가 없이 잉태한 것은 이삭, 삼손 그리고 침례인 요한과 같은 성경 인물들과 어떤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수긍하기 어려운 그녀의 어린 시절은 그녀의 순결을 보증하기 위한 모든 수단들로 동원된다.
마지막으로, 메시아를 잉태한 처녀로서의 본성과 어머니의 순결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마리아가 잉태 전부터 출산 이후에도 처녀였다는 주장은 글의 처음부터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 16장에는 그녀가 거뜬히 통과했으며, 간음에 대해 결백함을 입증했던 물시험(water test)에 관해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떠한 역사적 자료나 복음서들에서도 확증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마태복음 1:18-19과 같은 구절로 거부되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그것(시련의 물)을 가지고서 요셉에게 마시게 했다. 얼마 후 그를 산으로 보냈고, 온전하게 돌아왔다. 요셉은 마리아에게 마실 것을 주고 그녀를 산으로 보냈고, 온전하게 돌아왔다. 그런데 그들에게 죄악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20장에는 그녀가 출산 중에도 처녀임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가 이후의 대중 종교에 전해졌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혼동스럽기만 하다.
“산파가 동굴에서 나오자 살로메와 마주쳤고, 말하기를 ‘살로메야, 살로메야, 너에게 일러줄 말이 있으되, 내가 전에 결코 보지 못했던 기적이라. 한 처녀가 자신의 본성에 거슬러 아이를 낳았노라.’ 이에 살로메가 말하기를, ‘주 나의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시는 한, 내 손을 넣어서 그녀가 처녀임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한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믿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살로메가 그녀의 본성에 손을 넣고서 외쳐 말하기를, 나의 부정함과 믿음 없음에 화 있으리라. 이는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시험하였고 내 손이 불에 타 끊어짐이라.”

우리가 보기에 너무 저속한 이 이야기는 살로메의 용서와 예수님에 대한 경배로 끝을 맺는다. 저자의 의도대로 된 셈이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아닌 두 증인(모세의 율법이 선포하고 있듯이)에 의해 그녀가 여전히 처녀임을 육신의 방법으로 입증받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처녀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데, 이는 출산 후에도 계속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저자는 더 널리 그것을 전한다. 마리아의 다른 자녀 출생과 관련해서 그녀의 처녀성은 막을 내리지 않았다. 이유인즉, 예수님의 형제들은 단지 요셉의 전처에서 난 아들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누구였다는 것에 대한 저자의 그와 같은 설명은 이어서 훌륭하신(?) 작가들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 또 힐러리와 지 암브로세 그리고 어거스틴에 의해 지지를 받게 되었다. 비록 “형제들”이라는 단어를 혈육으로 해석해버린 제롬으로 어차피 넘어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복음서에 제시된 진리를 벗어나면서까지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을 이렇듯 엄중하게 지키는 이유와 마태의 설명과는 일치하지도 않는 물시험 사건들을 고안해 내는 연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로 그 본문이 이교도에서 기원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기로는 에비온파 무리들에서 이 작품이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믿으려는 유대인들은 있었으나, 그의 신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음식법에 관해 엄격한 그들도 때로는 처녀성을 지키는 것이 결혼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성에 대한 금욕을 예찬하기에 이르렀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영원한 동정녀의 전형으로 결부시킨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은 특히 그들의 마음을 부추기게 했을 것이다. 마리아가 영원한 처녀였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대단한 축복을 받았을 법한 그녀의 위치가 꺾기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역시나 그의 작품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몇몇 유대인들로 인해, 마리아를 향해 던져졌던 부당한 비난에 대항하여 그녀의 인품을 보호하려는 목적에 부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점은 그들의 최대 공격 수단 중에 하나로 자리잡고 있었다. 신약에서 이에 대한 흔적을 찾아보지만, 가장 광범위한 자료는 외경과 교부들과 유대인들의 글들에 나타난다.
2세기 문서인 빌라도 행전(Acts of Pilate Ⅱ.3)에는 맨 먼저 예수님을 향해 던져진 비난이 명확히 드러난다.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 먼저, 네가 간음으로 인해 태어났다는 것이라.” 터툴리안도 마찬가지로(De Spectaculis XXX,3) 그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은 창녀(quaestuiaria)의 아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통상적인 것이라고 했다.
실제 유대인의 자료들을 보면,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훨씬 모욕적인 내용이 있다. 탈무드에는 예수님이 “이방인의 아들”(son of Panthera)이라 불리는데, 이것은 그가 마리아의 사생아요 이름뿐인 용사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타나님 기간, 즉 2세기 초의 유대인 율법학자들과 연관이 있다. 미쉬나(Mishnah Yebamot 4,13)에도 마찬가지로 A.D. 2세기 시작 무렵에 시므온 벤 아짜이(Simeon ben Azzai)가 예수님이 “사생아”로 태어났음을 확증하는 A.D. 70년 이전의 계보를 어떻게 발견했는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한 모욕적인 구전은 아모라임 기간(A.D. 200-500년) 내내 되풀이 되었고, 톨레도 예수(Toledot Yeshu)의 중세 전설들에서도 그러했다. 아마도 4세기를 넘는 시점에서 생겨났던 것으로 판단된다.
의심 많은 몇몇 유대인들의 잘못된 비난을 보면,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며, 무엇보다도 포악한 로마 군대의 일원인 한 이방인(Panthera)과 관계를 가져온 간음한 여인의 아들임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상반된 견해는 팔레스타인에서 뿐만 아니라 이방 지역에서도 생겨났다. A.D. 177-180년경에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 글을 쓴 이교도 철학자인 셀수스(Celsus)는 단지 유대인의 자료들로부터 영감을 얻고서는 예수님은 사생아요 그의 어머니는 창녀라는 주장을 폈다.
야고보의 초기 복음은 이러한 주장뿐만 아니라, 마리아라는 인물을 변호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야고보의 초기 복음은 데 스트릭커(De Strycker)가 “창작 성인 전기”(creative hagiography)라 이름붙인 것을 완성한 것이다.
그 의도는 훌륭했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저자는 목적이 아무리 선할 지라도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잊었던 모양이다. 정확히 거짓말에 힘입어서 거짓말의 아비(요 8:44)와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 될지는 몰라도, 진정한 역사학자라면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에 대한 믿음이 신약에서뿐만 아니라 신뢰할 만한 역사자료들(기록된 문서든 고고학 유물이든 간에)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러한 믿음은 A.D. 3세기에 쓰여진 작품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것은 A.D. 62년에 죽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의 이름으로 잘못 제시되었으며, 이단인 에비온파(Ebionite)로부터 그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마리아의 부정(不貞)에 대해 신성모독이라는 관점과는 정반대의 관점을 주입하려는 구실로 생겨났다. 하지만, 마리아와 예수님의 훌륭한 이름을 보호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역사적 진실이 아닌, 헛된 이야기들을 꾸며내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세기를 거치면서 일말의 증거도 없는 문서의 내용을 훌륭한 자료로 제시하려고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증거를 무시해 온 사람들이 수백만에 이른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우 정당한 근거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카톨릭이 비난하는 것은 더욱 슬픈 일이다.
결론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라는 교리는 마리아 숭배 사상에 있어서 확고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성경적 근거나 심지어 역사적인 근거조차 부족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카톨릭 학자들조차도 이러한 교리는 성경에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 교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후의 신학적인 진보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진보는 4세기까지는 실제적인 중요성을 갖지는 못했고, 중세까지는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으로 나아가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원이 3세기의 에비온파(영지주의 운동에 더욱 어려움을 가진 이단종파)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야고보의 초기 복음의 목적이 일부 긍정적이었다 할지라도, 그 근원이 이단적이고, 저자는 거짓되며, 신학은 비성경적인데다 내용마저 성경적, 역사적 자료들과 반대된다는 사실에 차마 못본 척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마리아 신화”의 초석을 하나 세웠다는 커다란 오류에서 기인한다. 야고보의 초기 복음이 없었더라면, 마리아 숭배사상의 더 큰 진전은 분명히 지금과 같지는 않았으리라는 이야기가 나올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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