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거짓 교리들 분류

로마카톨릭의 비성경적인 교리(2) - 행위로 의롭게 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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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6월호>

“고행을 통하여”

1. 죄의 형벌로서의 고행

의로워지기 위해서 고대 이교도들은 아누비스의 저울 위에 소위 “선행”뿐만 아니라 신들의 진노를 피하기 위한 금욕과 “고행”도 쌓아야 했다. 아누비스의 저울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 미카엘의 저울 역시 신도들에게 같은 것을 요구했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은 죄가 용서되었을지라도 그에 따른 형벌은 해결되지 않았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제들을 통해서” 내리시는 하나님의 용서가 아무리 온전하다 하더라도 죄의 댓가는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인간은 그 댓가를 치러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하심에 인간은 언제나 미달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지기 위해 노력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 대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여전히 모든 사람이 “자기 죄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죄를 지은 사람이 아무리 상심하며 죄를 뉘우치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음과 한숨 소리와 살을 찢고 몸에 고통을 가하는 “고행”이 있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전한 구속을 이루어 놓으신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육체에 고통을 가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이상하게 들린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이 숭배하는 ‘신’(god)의 진짜 성격을 살펴 본다면 앞에서 말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게 된다.

2. 인간의 피를 요구하는 몰록 숭배

그 신은 몰록(Moloch), 즉 야만적인 피의 신이다. 몰록은 “왕”을 의미하는데, 홍수 이후 최초의 왕은 족장 체제를 무너뜨리고 동료들 위에 왕으로 군림한 “니므롯”이었다. 처음에 그는 “선과 진리를 밝혀내는 자”로서 숭배되었으나 그에 대한 숭배는 점차 그의 어둡고 무서운 용모처럼 변질되었다. 몰록이라는 이름은 처음에 잔인함이라든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점차 그의 이름 아래 인류의 도덕적 양심과는 상반되는 의식들이 행해졌으며 밀턴(Milton)의 다음과 같은 묘사가 그것을 잘 설명해 준다.
“무시무시한 왕 몰록은 인간 제물의 피와 그 부모들의 눈물로 더럽혀져 있었다. 타악기들의 시끄러운 소리때문에 불 가운데로 지나가는 그들의 어린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천박한 미신과 “무시무시한 잔인성”은 미개한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문명을 자랑하는 지역에서도 관영했다. 그리스, 로마, 이집트, 페니키아, 앗시리아, 영국 등은 한 때 동일한 신을 동일한 방법으로 숭배했다. 그 신이 가장 기쁘게 받는 것은 인간 제물이었으며, 인간의 신음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그의 귀에는 감미로운 음악이었고, 인간이 고통당하는 것은 그의 마음에 기쁨을 가져다 준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 신상의 손에는 “권위”의 상징으로서 채찍이 들려져 있으며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몇몇 제일에 그 채찍으로 자신들의 몸을 무자비하게 매질하도록 되어 있었다. 헤로도투스는 후시리스에서 이시스를 기리는 제일에 대해 “희생 제사의 의식이 끝나면 수천에 달하는 온 회중은 스스로를 매질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폭로하도록 허락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매질이 “누구를 기리기 위해” 하는 것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로마 제국에서 이시스의 숭배자들은 오시리스를 기리기 위해 같은 의식을 행했던 것이다. 그리스에서도 뱃사공들이 오시리스와 동일인물인 아폴로의 성지를 통과하는 때면 똑같은 고행을 해서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3. 난자당해 죽은 신을 달래기 위한 피흘림

매질뿐만 아니라 신을 달래기 위한 의식으로서 숭배자들은 몸을 칼로 베고 깊은 상처를 내기까지 했다. 줄리우스 퍼르미쿠스(Julius Fermicus)는 이렇게 말한다. “신비종교의 엄숙한 의식이 거행되면서 그 신이 심하게 부상을 당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장면 하나 하나가 순서대로 재현된다.” 오시리스는 난자당해서 죽었다. 따라서 그의 운명을 모방하기 위해 살아 있는 인간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그들은 자기 몸을 칼로 베고 상처를 입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알의 사제들이 엘리야와 경쟁할 때 그들 신의 호의를 얻기 위해 『크게 부르짖고 그들의 방식대로 칼과 단창으로 몸에 상처를 내어 피가 나오게』 했던 것이다(왕상18:28).
이집트의 토착민들은 일반적으로 채찍은 사용했지만 칼은 잘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몸이 조각조각 잘려져 죽은 오시리스의 죽음을 자기들의 몸에 최대한 재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집트의 카리안들은 더 심하게 칼로 자기 얼굴을 베었다.”라고 헤로도투스는 말한다. 이러한 의식을 볼 때 우리는 모세의 율법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의 어떤 살점도 베어내서는 안되며 너희에게 어떤 문신도 새기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28).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자랑했던 로마인들도 야만적이고 잔인한 검투사들의 경기를 즐겨 관찰했는데, 경기를 벌이는 목적은 바알의 사제들을 자해하도록 만든 그것과 동일했다. 즉,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희생이었던 것이다. 퍼스(Fuss)는 “검투사들의 경기가 새턴(Saturn)에게 드려지는 신성한 것이었다.”라고 했으며, 아우소니우스(Ausonius)의 글은 “12월의 마지막에 그들은 낫을 들고 있는 하늘의 아들을 인간의 피로써 달랠 목적으로 원형극장에서 검투사들을 서로 싸우게 했다.”고 말한다. 이 문장에 대해 저스투스 립시우스(Justus Lipsius)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검투사들은 농신제 때 싸웠는데 그들이 싸운 목적은 농업의 신 새턴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추측컨대 그 이유는 새턴이 하늘의 신이 아니라 지옥의 신이었기 때문이리라. 플루타크(Plutarch)는 그의 저서 <요약, Summaries>에서 ‘로마인들은 크로노스신을 땅 속 지옥에 사는 신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이것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인 것은 “플루토”(Pluto - 지옥의 신. 편집자 주)가 “새턴”, 즉 “숨은 자”와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턴이 실제로 어떻게 죽임당했는지를 살펴 보면, 한때 온 세상을 지배했던 로마의 영광스런 이름에 오욕을 남겼던 그 야만스런 관습의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칼로 토막나서 죽었다. 이 사실을 상기해 볼 때 그의 생일에 그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몇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칼로 토막내게 해서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수단

이교도들에게 있어서 자기들의 몸을 칼로 상처내고 찌르는 고행은 그들의 신을 달래고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함과 동시에 아누비스의 저울에 쌓일 그들의 “덕행”이 되는 것이었다. 카톨릭에서 고행의 의미는 그와 동일한 목적을 가질 뿐 아니라 고행하는 모습 자체도 이교도들의 야만적인 그것과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
그들이 바알의 사제들처럼 칼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피를 흘리는 것을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자기들의 수많은 죄를 없애주는 최상의 고행으로 여겼던 것은 분명하다. 이것과 바알 숭배자들이 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한 것과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르겠는가? 게다가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은 카톨릭의 광신도들이 ‘오시리스의 채찍’을 그대로 빌어온 것이다. 독자들은 로마 교회의 제일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 몸을 채찍질했던 ‘채찍질 고행자’(Flagellant)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 역사의 초기에는 그러한 채찍질이 완전히 이교도의 관습으로 여겨졌었다. 초대 기독교 변호자의 한 사람이었던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는 그러한 방법으로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의 진노를 달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교도들의 생각을 비웃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카톨릭 교회는 그러한 고행을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주요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 성 금요일(부활절 전의 금요일-편집자주)에 로마나 마드리드 및 카톨릭의 다른 주요 도시에서는 군중들이 모여서 고행자들이 자기 몸의 마디마디에서 피가 솟구쳐나올 때까지 자기 몸을 채찍질하는 것을 지켜본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한답시고 정해놓은 날에 마치 그 분을 기리기 위해 그런 고행을 하는 것으로 가장하지만, 이상하게도 오시리스의 숭배자들 역시 그들 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날에 똑같은 것을 행했던 것이다.
아무리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영광받으신 우리의 구주께서 자신이 이루어 놓으신 완전한 구속을 모욕하며, 그 분의 보혈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가련한 죄인들의 등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보충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식을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여기시리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한 의식은 모두 몰록의 숭배에나 걸맞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