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거짓 교리들 분류

대사, 기도, 참회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01월호>

1. 대사 大赦
카톨릭 교회는 살아 있거나 죽어서 연옥에 있는 신자들의 죄가 대사(Indulgence, ‘면죄’라고도 한다)를 통해 용서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신실한 자들은 대사를 통해 자신과 연옥에 있는 사람들의 죄로 인해 받게 되는 잠정적인 형벌을 면제받는다.”(374쪽, 1498항)
카톨릭 교리문답은 대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대사란 하나님 앞에서 잠정적인 형벌을 면제받는 것이다. 성도들은 교회가 정한 다양한 행위를 통하여 죄의 형벌을 면제받는다. 이 교회는 구속을 베푸는 권위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킨다.”(370쪽, 1471항)
여기서 설명은 더욱 복잡해진다. 지면 관계상 대사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교회가 정하는 선행과 그에 따른 형벌의 면제라고 말하는 것으로 일단 만족해야겠다. 대사에 관한 모든 규정은 물론 사람들의 전통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죄의 결과가 동일하다고 말한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아무리 하찮은 죄라 해도 죄의 결과는 항상 “사망”이다. 카톨릭은 대사를 통해서 죄의 삯을 지불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든 죄값을 지불하셨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선행을 하기 원하시지만, 선행은 구원에 필수 요소가 아니라 구원의 결과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가르친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되었느니라. 이 일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어 우리로 그것들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 것이라』(엡 2:8-10).
일단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면 선행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선행은 결코 구원의 필수 요소가 아니다. 또한 구원받은 후에 지은 죄들을 용서받는 데에도 선행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신약에는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 예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결코 죄사함의 조건으로 선행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카톨릭은 대사가 이미 죽은 자들을 도울 수 있다는 취지를 가지고 이 교리를 주장한다.
“정화된 상태에서 죽은 신실한 자들도 성도들과 동일한 교통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을 위해 대사를 얻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죄에 상응하는 일시적인 형벌이 용서될 수도 있다.”(371-372쪽, 1476항)
이것 또한 인간이 만든 전통이다. 하나님의 말씀 어디에서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다.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는 살아 있을 때뿐이다.

대사는 세 가지 면에서 전적으로 비성경적이다.
첫째, 예수님의 신성을 격하시킨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만이 죄들의 용서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카톨릭은 죄인인 카톨릭 신자의 선행을 통해서 죄들이 용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대사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카톨릭 교회의 굴레에 얽매이게 한다. 카톨릭 교도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카톨릭 교회가 제시하는 선행을 하면서 수고하고 애써야 한다. [카톨릭의 “선행”이 성경이 말하는 선행과 다르다는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성경이 가르치는 선행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행위지만, 카톨릭의 “선행”은 주로 교회의 의식을 행하는 것이다(미사, 묵주의 기도, 카톨릭 기도, 초에 불을 켜는 것 등).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선행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지 사람들을 교회에 예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셋째, 한 마디로 말해서 대사는 영적 사기극이다. 교회 회원들로 하여금 교회에 충성하게 만들어 놓고, 그것이 연옥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언젠가는 하늘나라로 가게 해준다는 거짓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선행”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말씀에 기록하신 것을 살펴보고 독자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에 의하지 않고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딛 3:5).

2. 기도 祈禱
카톨릭은 또 기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기도는 내적 충동을 자연스럽게 쏟아 놓는 것으로 전락되어서는 안된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기도에 대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성경이 기도에 대해 계시하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즉 기도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교회 내의 신성한 전통을 통해 성령께서는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다.”(637쪽, 2650항)
먼저 “기도는 내적 충동을 자연스럽게 쏟아 놓는 것으로 전락될 수 없는지” 성경적으로 살펴보자. 성경은 기도가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놓고 기도한 예가 수없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기도를 들으셨다.
『내가 내 음성으로 주께 부르짖었더니, 그가...내 음성을 들으셨도다. 셀라』(시 3:4).
『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나를 고쳐 주셨나이다』(시 30:2).
『내가 고난중에 주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나를 들으셨도다』(시 120:1).
『어느 때나 그를 신뢰하라. 너희 백성들아, 너희 마음을 그분 앞에 쏟아 놓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 셀라』(시 62:8).

카톨릭에서 가르치는 기도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기록해 놓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교도들이나 하는 방법이라고 하시면서 금하신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이 하는 것처럼 헛된 반복을 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로 생각함이라』(마 6:7).

또, 카톨릭은 성경이 기도에 대해 계시하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교회의 신성한 전통이 가르치는 대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성경이 기도하는 법에 대해 가르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톨릭 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가 생기기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기도했고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성경의 인물들은 카톨릭 교회의 도움 없이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자연스럽게 쏟아 놓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구해 낼 것이요, 너는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50:15).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구하는 것들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알려지게 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쏟아 놓는 것을 받아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권장하신다.

성경의 기도와 카톨릭의 기도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성경은 카톨릭의 기도 방법을 저주하고, 카톨릭 교회는 성경적 기도를 정죄한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그들이 주께 부르짖었더니 구원을 받았고, 그들이 주를 신뢰하였더니 수치를 당하지 않았나이다』(시 22:5).

3. 참회 懺悔
카톨릭에서 요구하는 또 다른 선행에는 “참회”가 있다.
“대사는 죄를 가져가지만 죄가 야기시키는 모든 부조화를 다 치료해 주지는 못한다. 죄에서 건져냄을 받은 죄인은 완전한 영적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 죄를 바로잡아줄 수 있는 행위를 더 해야 한다. 자신의 죄들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 이러한 보상을 ‘참회’라고 부른다.”(366쪽, 1459항)
전 세계 수백 만의 카톨릭 신자들은 이러한 선행으로 그들의 죄들을 보상해서 ‘완전한 영적 상태’를 회복할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고 믿고 열심히 참회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관행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강등시키는 또 다른 ‘사람의 전통’임을 밝혀준다.
그리스도께서는 갈보리에서 우리의 죄들에 대한 완전한 값을 이미 지불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완전한 영적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 선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신뢰를 두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신다.
『또 그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음이라. 이제 이것들을 용서하신 곳에는 더 이상 속죄제가 없느니라』(히 10:17-18).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죄들을 결코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죄들이 용서되었기 때문에 죄에 대한 더 이상의 제물이 없다고 선언하신다. 즉 죄를 용서받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놓으셨다. 그런데도 카톨릭 교리문답은 계속해서 인간이 만든 규칙들을 늘어놓고 있다.
“참회자가 하는 참회는 참회자의 개인적 상황이 고려되어야 하며, 그의 영적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가능하면 그가 범한 죄의 성격과 경중에 상응하는 것이어야 한다.”(367쪽, 1460항)
카톨릭 교리문답은 참회에 포함되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참회는 기도, 제물, 자비의 행위, 이웃을 섬기는 일, 자의적인 자기 부인, 희생 등으로 이루어지며, 여기에 인내로 십자가를 지는 일이 포함된다.”(367쪽, 1460항)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를 위해 어떠한 선행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주여, 주는 선하시고 기꺼이 용서해 주시며, 주를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자비가 풍성하시나이다』(시 86:5).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하신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되는 줄 알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워지고자 함이라. 이는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음이라』(갈 2:16).
카톨릭 교리문답은 심지어 참회가 죽은 자들까지도 도울 수 있다고 가르친다.
“교회는 또한 죽은 자들을 위해 자선, 대사, 참회의 행위를 하기를 명한다.” (269쪽, 1032항)

벽돌로 집을 짓듯이 그들은 전통 위에 전통을 계속 쌓아간다. 그리하여 모두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범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자신의 희생이 첨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또다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강등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비성경적 교리가 신자들을 카톨릭 교회에 예속시키는 것이 단순히 우연이란 말인가? 여러분은 누구의 편에 서기 원하는가? 사람들의 전통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단정하노라』(롬 3:28).

전체 108 / 4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