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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이후의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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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05월호>

수 세기를 거치면서 카톨릭과 몇몇 동방 교회들은 오순절 이후 마리아의 생애에 관한 숱한 이야기들을 얼기설기 지어냈다. 그 중에는 영원한 처녀성이나 성모 몽소승천과 같이 확고한 교리로 굳어져온 이야기들이 더러 있고, 교리로 정착되지 못했어도 실천적 교리 그 이상으로 사람들의 믿음과 실행에 영향을 미쳐온 것도 있다. 또한 마리아가 사도 요한과 에베소에서 함께 머물렀다는 이야기 등 역사적인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들 뿐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마리아의 신화를 발전시키는 데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이 장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오순절 이후 생애에 대해 볼 것이다. 그녀의 가족, 소위 예수님의 “형제들”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그녀의 죽음과 장사됨에 얽힌 이야기들의 역사적 증거를 면밀히 검토할 것이다.

마리아의 가족
마리아는 요아킴과 안네 사이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중세 교회 시대 무렵만 해도 그들의 존재가 너무 당연시 되었기에 신성시 되었으며, 오늘날 까지도 7월 26일이 되면 카톨릭 교회는 성찬을 올리며 그들을 기념하고 있다. 성자로 추앙을 받던 요아킴과 안네는 신자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될 법도 하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간구하는 자들을 위한 중재자로 여겨진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Prot evangelium of James, 4세기], [the Gospel of Pseudo-Matthew, 6세기], [the Book of the Birth of Mary, 9세기]로 알려진 문서들(정경에 들어있지 않음) 이전에는 이 사람들에 관해 알 길이 없다.
이 문서들에 대한 신빙성을 놓고서 말이 많다. (이것이 믿을 만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먼저 기록 연대를 보더라도 문서들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건과 시기적으로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신뢰를 두기에는 어렵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적어도 처음 두 문서에서 저자들이 독자를 속이려 들었고, 그 일을 초기 교회의 중요한 인물인 마태와 야고보에게 덮어씌우려 했던 것이 분명하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일들에 이단 무리들이 연계되어 있음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Prot evangelium of James]를 보면 에비온파(Ebionite)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고, 도세티스트(Docetist)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Gospel of Pseudo Matthew]는 마니키안들(Manichaeans)과 프리스킬리안들(Priscillianists)에 의해 수도 없이 사용되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이런 전설들은 문서적 근거가 부족하며 또한 고고학적인 자료로도 충분히 확증될 수 없다. 이것은 고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역을 조사할 때 분명해진다. 나사렛에서만(“마리아의 집”으로 알려진 곳) 1955-56년, 그리고 1959-60년에 두 차례에 걸쳐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다양한 증거들을 통해 나사렛에서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처럼 교회의 모임은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행 2:46; 20:7).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의 가정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집안 유물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살펴보면, 작은방, 지하실, 사다리, 울퉁불퉁한 벽들로 이루어져 있고, 마리아에 관한 수많은 글들로 벽들은 마치 그림처럼 칠해져 있다.
앞서 이야기된 장소들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시대에 맞춰 건물의 구조를 바꾸고, 회심자들에게 침례를 주기 위해 필요한 시설물을 갖추었던 것이다. 여러 교회들에서 이후에 전해지는 말과는 다르게, 나사렛의 초기교회는 물에 잠기는 침례식을 거행했으며, 침례받는 사람은 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결국 그들은 오직 회심한 성인들에게, 완전히 물에 잠김으로 침례를 주는 신약의 본을 따라 행했던 것이다.
2세기 말 내지 3세기 초에 이르러, 신실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갈릴리 회당 건축 양식을 따라 그 자리에 “마콤 카도쉬”(성스러운 장소)를 세웠다. 이곳이 유대인 회당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 지역교회의 것들과 일치하는 여러 건축 시설물들 중에서, 의식을 위한 침례탕과 제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그리스도인들의 회당이었기에, 믿음의 표식들(배, 각종 십자가들)과 수많은 문서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2세기까지는 마리아와 그녀의 가족에 대한 기록을 볼 수가 없고, 3세기에 비로소 마리아 숭배에 관해 이야기할 만한 고고학적 유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 중 처음 것은 “XE MAPIA”라는 것으로, 누가복음 본문과도 전혀 다른 아베 마리아(Ave Maria)에 관한 첫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그 당시 지역모임으로 하여금 마리아 숭배를 끌어내기 위한 술책이었던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게 지금 온전히 자리잡을 수는 없었다. 한 여인이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두 번째 기록에는 훨씬 폭넓고, 한층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기록을 보면 마리아 숭배에 관해 언급하고 있고, 그녀에게 감사드리는 의식들로 가득함을 보게 된다. 그 글에 대한 번역을 재현해 보는 것도 가치 있으리라고 본다.
“마(리아?)가 있는 성스러운 자리 그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당장 그녀의 휘황 찬란한 얼굴(이름?)을 기록하라.”
이 글이 누구를 언급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마리아와 그녀가 그 당시(3세기)에 숭배를 받고 있었음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 이전(3세기 전) 나사렛에는, 마리아 숭배에 관해 아무런 흔적도 없었을 뿐더러 그녀의 부모라고 하는 요아킴과 안네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
마리아의 가족으로 추정되는 자들과 연관해서 떠오르는 또 다른 지역이 있는데 바로 “아인 카렘”(Ain Karem)이다. 6세기 테오도시우스(Geyer 140,6)는 마리아의 가족이 등장한 장소가 아인 카렘일 가능성이 있음을 내비쳤다. 수도승 에피파네스(9세기, PG 120과 264)와 [Pseudo Peter of Sebaste, 9,10세기]의 글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7,8세기) 달력에도 9월 28일 축제와 관련한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모든 증거들이 말기에 나왔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인 증거는 더 이상 절대적인 근거가 될 수 없다. 분명, 유적들이 1세기 여러 지역들에 대해 밝히 보여준 것은 사실이며, 그 중 두 곳은 엘리사벳과 스카랴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밝혀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를 만한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 만일 그 근거가 충분치 못하면, 수많은 유적들은 그 지역에 있어서 한낱 이교도 숭배의 중심지임을 보여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된다.
드러난 증거에 대해 공정하게 보건데, 1세기 동안 이 지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배가 있었다는 확신이 없다. 하지만 고고학적 유물들이 이교도들의 숭배와 연관되어 있음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안네와 요아킴에 관한 한, 관련 자료가 없다는 것은 절대적인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 전문가들은 마리아의 부모와 관련된 신뢰할 만한 역사적 사실 근거가 부족함을 볼 때, 여하튼 심기가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 부족을 토대로 상당한 영향을 가지고 일련의 허무맹랑한 구전들이 생겨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예컨데, 마리아의 어머니라는 안네가 성자로 추대되어 수많은 추종자들로부터 숭배를 받고 있는 나라들이 한둘이 아니다. 4세기경 그녀를 위한 사원이 하나 세워진 이래로, 그녀의 명성은 그칠 줄 모르고 하늘로 치솟았다. A.D. 50년에 저스티니안(Justinian) 황제는 그녀를 기념하여 콘스탄티노플에 교회를 세웠고, 그 후로 7월 25일, 9월 9일, 그리고 12월 9일이 되면, 그녀에게 성찬을 드려왔다. 8세기 무렵, 그녀에 대한 숭배는 서방을 가로질러 확산되었다. 1584년 교황 그레고리 8세는 칙서를 보내어 7월 26일을 그녀의 성찬일로 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네가 실존했다는 문서나 고고학적 증거가 없는데도, 어째서 이 인물이 가증스럽게도 그런 명성을 누렸던 것일까? 해답은 마리아의 신화에서 나타나는 주요 특징, 다시 말해 이교도 관습에서 흘러나온 신화들을 자연스럽게 흡수해 버린 점에서 발견된다. 아닌게아니라, 1세기 당시의 이교도들은 안네라 불리는 여신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페니키아인인 디도(Dido)의 누이이며, 안나 페레나(Ana Perenna)로 알려진 그녀는 로마 시인인 오비드(Ovid)에 의해 칙령전달자로 언급된다.
로마인들도 그녀를 보고 (축배의 잔을 비운) 물의 요정의 모습을 떠올렸다. 또한 그녀는 켈트족의 이교도 전통에서 다나(Dana)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Fir-Bolg를 쳐부신 반신반인의 민족의 여신으로 제시된다.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이렇게 잡다한 이교도 전통들이 성 안네 숭배사상에 덧붙여져 왔다. 스페인 투델라(Tudela) 지방을 예로 들면 그 곳에는 성 안네 축제가 거행되면 거인들이 몰려드는데,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켈트족 신화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을 흉내내는 것이다. 물이 있는 한, 안네를 위한 스페인 바다 축제에서 그 의식을 볼 수 있다.
누군가가 문서와 고고학적, 인류학적 자료들을 일일이 검토한 후에 증거를 찾아낸다면 자신의 교회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카톨릭 교도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 그들은 안네와 요아킴을 마리아의 부모랍시고 신처럼 받들고 있고, 숭배의 대상이요, 기도를 들어주는 분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미안한 일이지만, 그들이 실존했다는 증거는 결단코 그 어디에도 없다. 수많은 축제들로 성 안네를 숭배하는 자들은 자신이 기독신앙 훨씬 이전의 고대 종교의식, 다시 말해 로마 여신인 안네 혹은 켈트족의 여신인 다나가 종교적으로 숭배를 받았던 이교도들의 기원을 가진 종교의식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수세기를 거쳐왔지만, 축제의 이름이나 그 과정에 그다지 변한 것이라고는 없으니 말이다.

예수님의 형제들
마리아 숭배를 조장하는 카톨릭 교회와 또 다른 교회들이 그녀의 가족을 허구로 만들어 낸다면, 그녀의 실제 가족을 없애버리는 또 하나의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신약에는 예수님께서 네 형제들(야곱, 요세, 시몬, 유다 - 마 13:55, 막 6:3)과 적어도 두 명의 누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처음에 네 형제들은 주님의 사역에 대해 믿지 않았다(요 7:5).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그들의 품에 맡기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위탁하기를 바라셨을 법하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런 상황은 급변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형제인 야고보에게 보이셨고(고전 15:7), 이 일로 그들 모두를 회심하도록 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들이 오순절 무렵, 마리아와 함께 첫 그리스도인 집회에 일원으로 동참했기 때문이다(행 1:14).
그 후 수년 간,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여러 기둥 중 하나였고(갈 2:9), 나머지 형제들은 자신의 아내들과 함께 사역을 하였다(고전 9:5). 오직 신약의 증거를 통해서(다른 역사 자료들로도 확증되지만) 예수님에게 형제들과 누이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역사적으로 볼 때, “형제들”이라는 말이 어떤 관계를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밝혀보려는 시도가 신학과 교리에 근거를 두어 문제들을 야기시켜 왔다. 따라서 지난날 수많은 저자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중요하다.
유대 역사학자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예수님의 형제들을 카톨릭이 대개 이해하고 있는 사촌이 아니라, 친형제들이었음을 분명히 이해했다. 야고보를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님의 형제”라고 언급하고 있다(Antiquities XX,200). 예수님의 형제들을 일컫는 말로 유대인 저자들이 사용하는 아델포스(Adelphos)라는 용어는 이후에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유대교와 2세기까지 있었던 증거들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사촌도 아니요, 친척도 아닌, 말 그대로 “형제들”이었다. 카이사랴의 유세비우스, 헤게시푸스 터툴리안, 존 크리소스톰 등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교부들도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크리소스톰은 예수님의 어머니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은 아니더라도) 그리 높은 점수를 주고 있지는 않는 듯하며, 야고보를 예수님의 형제요, 마리아의 아들로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아델포스(adelphos)와 아델페(adelphe)도 각각 “형제,” “자매”를 의미하며,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그렇게 불려지는 사람들은 마리아의 아들들이요,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어떤 경우는, 헬라어가 그들의 모국어였다. 그래서, 그들이 형제가 아니고, 친척이라면 사복음서는 싱게니스(synguenis, 형제 - 눅 14:12)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사촌이었다면, 이에 해당하는 적절한 아넾시오스(anepsios, 조카 - 골 4:10)였을 것이다. 결국, 헬라어와 초기 몇몇 교부들의 관점에서 보면, 오직 한 가지 해석만 있을 수 있다.
이렇듯 부인할 수 없는 결정적인 측면들이 모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에 대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무진 애쓰고 있는 카톨릭 저자들은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형제라는 단어는 영어로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우겨 왔다. 그들의 주장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사복음서가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 그리고 예수님의 누이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거의 대부분이 헬라어 문화권인 사람들을 위해 헬라어로 사도행전, 마가, 마태,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들이 야고보와 예수님의 다른 형제들을 지칭하는 말로 굳이 아델포스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사촌”이나 “친척”을 말하는 다른 단어가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더군다나 힘들다.
게다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교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존 크리소스톰이나 터툴리안과 같은 신학자들도 역시 예수님의 형제들이 마리아의 아들들이었음을 믿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유대인 저자들이 주후 1세기에 있었던 그들 문화 속에 “형제”의 중요성을 보편화시켜버린 것이다.
사실상, 처음부터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을 옹호하는 자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너무 허술했으며, 4세기 제롬은 예수님의 형제들이 사실상 친형제들이었다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결혼하기 전에 요셉이 낳았던 자식으로 치부해 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한 처녀성에 대한 그들의 사상을 고수했던 것이다. 제롬의 이러한 사상을 몇몇 동방교회들이 뒤이어 따랐다. 제롬이 부끄러워할 일이지만, 그같은 해석은 3세기까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한 해석은 이름도 엉터리인 이교도 문서의 도움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카톨릭 저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에는 가짜 교리를 변호하는 데 염려없던 역사가들의 입장에서 이제 예수님의 형제들이 문자 그대로 형제들이며 마리아의 아들들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당연한 선택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또다시 카톨릭은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부족한 그들의 교리적인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아예 역사적인 증거를 없애왔던 것이다.

마리아의 죽음과 묻힘
A.D. 30년 오순절 이후로, 우리는 마리아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녀가 오순절 직후에 죽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사도행전에서 그녀에 관해 누가는 두번 다시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이 기록한 신약성경의 나머지 글에서도 그녀에 대한 언급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녀가 요한과 함께 에베소에 있었다고 애써 이야기를 꾸미려 해도(사실, 여행자들이 거기서 그녀의 무덤이라고 하는 것을 본다), 그런 이야기는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이다. 웨스트팔리아(Westfalia)에서 태어난 안나 카델리네 에메리치(Ana Catherine Emmerich :1774-1824)에 의해 이 소문은 더 퍼져나갔다.
이 아우구스티누스 수녀는 마리아가 사도 요한과 에베소로 갔었고, 에베소 남쪽 파나가기 카풀리(Panagagui Kapuli)에서 죽었다는 주장을 했다.
수만 명의 카톨릭 교인들이 여전히 안나 카델리네 에메리치의 생각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체스코(Franciscan) 성직자인 유겐 호아디(Eugen Hoade)같은 반카톨릭 작가들은 학자들 다수가 그 견해에 대해 “완전 공상”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마리아의 시체가 마지막으로 어디에 안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마리아가 장사된 곳에 대해 최초로 문서화된 자료는 “Transitu mariae”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모데스트(PG 86,3288,3299)와 소프로니우스(PG 87,3821), (예루살렘의 족장들과 7세기 저자들)로부터, 그 이후에는 베데 부주교(Liber de Locis Sanctis, 306), 데베의 히폴리투스, 크레테의 앤드류(PG 97,1074)와 다마스커스의 요한, 그리고 다른 이들(PG 96,729)로부터 받은 보고서가 있다.
마리아의 죽음과 연관된 모든 자료들은 겟세마네로 알려진 동산, 즉 올리브 산 건너편 여호사밧 골짜기의 케드론에 있는 새 무덤에 묻혔다는 데에 의견을 일치한다. 다시 말해, 마리아는 에베소에서 죽지 않았고 신약에서 그녀에 관해 마지막으로 언급한 곳은 예루살렘에서였다. 카톨릭 교리와는 반대로, 그녀의 시체는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고 단지 묻혔다.
1972년 2월, 홍수로 인해 겟세마네에는 마리아의 것으로 주장되는 무덤이 물과 진흙으로 뒤덮였다. 그 지역을 관리하던 그리스와 아르메니아 주민들은 그 땅을 복구하도록 명령을 받았고, 그 일로 인해 B. 바거티는 그 땅에 대한 고고학적인 분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 장소가 마리아의 무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데오도시안 I세(A.D. 379-395년)가 통치하기까지 손도 안 대고 방치된 1세기 장례터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 증거에 대해 전체적인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리아가 예루살렘에서 장사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확실하게 타당한 근거를 제공한다.
주후 5세기가 지나고 마리아를 숭배하기 위해 이곳에서 각종 사원들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적어도 14세기까지는 마리아의 몽소승천 교리와는 무관했다. A.D. 1130년 십자군들이 무덤을 재건했을 당시에는(1099년에 하켐에 의해 파괴된 듯함) 그 장소를 마리아의 죽음과 장사된 장소로만 연관지었을 뿐, 승천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또 한번, 역사 기록은 이후에 생겨난 마리아 신화와 부딪히게 될 운명을 가진 것 같다.

결 론
마리아의 말년에 관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역사적인 정보들은 극히 제한적이다.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초기 교회의 회원인 것은 알려졌지만, 오순절 이후에 그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고대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를 보면 그녀가 예루살렘에서 죽었고 장사되었다는 것이 거의 분명하다. 사도 요한과 에베소로 떠났다는 발상은 전설에 불과할 뿐이다.
역사적인 자료들도 기독교 신앙이 자리잡던 초기에는 마리아의 처녀성이나 성모 몽소승천에 관한 교리 혹은 요아킴과 안네로 불리는 마리아의 부모의 신원에 관해 믿을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마리아를 둘러싼 숭배의 흔적은 더더욱 발견할 수 없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오늘날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신약성경과 많은 교부들은 마리아에게 자녀들이 더 있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더욱 분명한 것은 고고학 자료들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과 실제로 예루살렘에 있는 무덤이 그녀의 것으로 확인한 사실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승천에 관한 언급은 적어도 중세 이전에는 없다.
카톨릭 교회에 의해 요아킴과 안네가 신성시됨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그들이 존재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없다. 마리아의 어머니라고 주장되는 성 안네는 지금도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숭배받고 있으며, 이로써 안네와 다나와 같은 이교도 여신들의 숭배사상을 단지 카톨릭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문서와 역사적, 고고학적 자료들에서 볼 수 있는 것, 즉 성경으로나 성경 이외의 자료들에서 모두 충실하기를 원한다면, 또 증거의 비중을 따지기 이전에 정직하게 임하고자 한다면, 또 신뢰할 만한 기준을 두고 진리를 확립하고자 한다면, 자료에서 드러나는 진실과 수백만 명이 믿는 것(믿음은 훌륭할는지 모르나 확고한 증거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 것) 사이에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바다가 있다는 것을 분명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제3장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신화가 성경적, 역사적 실존 인물인 마리아를 어떻게 점차적으로 왜곡시켰고 각양각색의 이교도 신들에서 유래된 장식품들로 대체시켰는지에 대해 심도있게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로 들어가기 전에, 마리아의 신화에 대해 두 가지 본질적인 측면에서 그 기원을 볼 것인데,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과 그녀의 몸과 혼의 승천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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