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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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격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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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9월호>

하나님의 사역에 열매 없는 이유가 비단 구원받지 않은 자들이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적인 일을 육신적인 방법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오해하면서 무턱대고 덤벼드는 자들도 그 일을 망쳐 버린다. 비행기를 조종할 줄 모르는 사람이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 비행하려고 하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전혀 가당치도 않은 일을 하려고 하는 그 무모함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는가? 만일 당신이 그 비행기에 타고 있는 승객으로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놀라겠는가? 이처럼 많은 무자격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기독교계의 현실이다. 육신적인 사람이 영적인 일을 하는 것은 비행기를 조종할 줄 모르는 사람이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후자는 “육신적으로” 전멸시키는 일이지만, 전자는 “영적으로” 전멸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무자격자인가?

첫째, 그는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다.


신학교를 졸업했으니 목사를 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사회인의 통념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받은 지혜와 영력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적인 수단이나 육신적인 방법으로 수행되는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으로 그 일을 하겠다고 덤비는 자들과 한통속인 자들은 자기가 배운 “출신 학교”를 교계 앞에 내세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많은 일꾼을 필요로 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는 곡식이 추수하도록 이미 하얗게 되었음이라』(요 4:35). 『참으로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들이 적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의 주께 기도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시라고 하라』(눅 10:2).


주님의 나라에서는 이처럼 일꾼이 많이 필요하다.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는 유일한 방법은 확실한 복음뿐이다. 이 일은 교회를 여러 개 세우고 크게 세운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며, 복음을 제대로 전파하는 일꾼들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복음 전하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곳이고,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말씀으로 양육시키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은 사람이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교회에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일꾼도 있어야 한다. 성경을 가르치려면 성경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이 나라에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는 교육 기관이 있던가? 그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단 신학 과목들은 성경적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

둘째, 그는 헌신과 쓰임받는 것을 혼동하는 사람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가 구원받은 대로 복음을 전해서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 이것은 기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구령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기본적인 일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반드시 서게 되는데, 그때 선이든 악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으로 행한 것들을 받게 된다(고후 5:10).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구원받은 이후의 선한 행위는 모두 상과 연계된다. 천년왕국에서 주어질 유업도 자기의 헌신과 섬김에 따라 할당받게 된다(골 3:24).


구원받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곧 “헌신”이다(롬 12:1,2). 헌신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뜻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자기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헌신하지 않으면 자기 뜻이 하나님의 뜻과 평행선만 긋게 될 뿐 결코 일치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성도가 헌신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뜻 밖에서 열매 없는 일을 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그런 생애에서 들이는 노력과 시간과 돈은 낭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헌신은 목사나 전담 사역자가 되는 것과 무관하다. 그것은 현재 자기의 몸을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하는 것이다. 가짜 교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헌신하는 형제자매들을 이용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탐내는 것은 “마귀적인 행동”이다. 또한 헌신은 구원받았을 때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드려진 제물의 모습이기도 하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기 이전의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인 사람이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대로 살려면 자아가 죽은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는 육신이 발로하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삶을 실현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헌신하는 것은 최선의 의무이다. 만일 헌신하는 사람이 “저를 이런저런 제물로 써 주십시오.”라고 했다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처사인가? 헌신에 “어떤 조건”이 수반되면 헌신이 될 수 없다. 제단에 올려진 제물은 말을 할 수도 없고 취사선택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어떤 사람들이 “너는 내 것이라.”든지, “내가 너를 큰 부흥사로 불렀다.”든지, “내가 너를 크게 들어 쓰겠다.”든지 하면서 자기를 부각하는 것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헌신이 아니라 자기의 “야망”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 대형 교회들의 양상을 보라! 새벽 기도회에 많이 모이는 것을 보고 그들을 추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노래하든지 책을 쓰든지, 설교하든지 가르치는 일을 하든지, 선교사로 일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성경이 가르쳐 주지 않던가?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한 가지 분명하게 알고, 또 부끄럽게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쓰셔서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을 시키시는 분이 아니요, 또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사람을 시키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분도 아니라는 점이다.


세상과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큰 부흥사로 불렀다,” “내가 너를 크게 들어 쓰겠다.”라고 말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는 “미세한 음성”을 들었다면서 거짓말을 한 것인데, 그가 음성을 들었다면 그것은 마귀에게서 들은 음성일 뿐이다. 아도니람 저드슨, 존 페이튼, 허드슨 테일러 등 수많은 신실한 선교사들을 오늘날 배교한 교단 선교사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폭스의 순교사>에 등장하는 순교자들을 오늘날 배교한 교회들의 목사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헌신하지도 않은 사람이 쓰임받기를 기대했다면, 그는 무언가 대단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두 가지 것”에 있어서 분명하고 확고한 자세를 지녀야 하고, 그러한 자세는 끝까지 견지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시지도 않은 자들을 아무 곳에나 멋대로 들어 쓰시던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확고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원본이 어쨌다느니, 외국어 성경이 어쨌다느니 하는 것은 모두 성경에 대한 확고한 자세가 아니다. 자기가 읽어서 영적 양식을 얻을 수 있고, 삭제와 변개가 없는, 자기 나라말로 된 성경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다음으로는 “세상”에 대해 분명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 세상이 무엇을 제시한다 해도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해야 하며, 세상이 아무리 아늑하고 편안해 보여도 그것은 사랑할 대상이 못 된다는 확고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
이상 “두 가지 확고한 자세”를 갖춘 사람만이 하나님의 돌보심 가운데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



셋째, 그는 하나님의 도구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이 바른 성경이라고 하자, 자기 교회도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쓰고 있으니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로 간주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현상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킹제임스성경>을 쓴다는 것과 <킹제임스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학교를 졸업했다거나 무슨 학위를 받았다는 것과 성경을 안다는 것 사이에도 대단한 차이가 있다. 무슨 신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의 학위만 신뢰한 채 교회를 맡기거나 전담 사역자로 일하게 하는 것 역시 비행기를 조종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비행기를 조종하라고 내맡기는 것과 매한가지다. 조종사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항공 학교에 입학하여 면장을 딸 때까지 비행기를 열심히 배우라!
영적 안목이 없는 사람들은 커다란 교회 건물, 세간에서 유명하다고 소문난 목사, 모여든 사람들의 수 등으로 사역을 평가하려고 한다. 물론 작고 협소하고 더러운 건물보다야 크고 깨끗한 건물이 백번 낫다. 알려지지 않은 사람보다 잘 알려진 사람이 더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을 두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인 양 착각하지 말라. 하나님의 평가는 그것과 정반대다. 사역은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므로 사람이 많다는 것은 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알곡이냐 쭉정이냐”의 문제가 남아 있다. 회중들이 알곡은 몇 안 되고 쭉정이만 많아서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해도 무감각하다면 그게 무슨 사역인가?
마귀가 공격할 가치도 없는 교회라면 그런 교회가 하나님 앞에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또 그런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칼”이라면 잘 갈려 있어야 하고, “그릇”이라면 깨끗하게 씻겨 있어야 하며, “가루”라면 반죽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에서 잘 쓰임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가 준비되지 않았으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했다면 포도원을 망쳐 놓는 “작은 여우”가 되는 것이다(솔 2:15). 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무턱대고 목사 안수를 준다든지, 초 ․ 중 ․ 고등학교 교사라고 해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과연 그런 목사가 교회의 양 무리를 잘 돌볼 수 있겠는가? 그런 교사가 학생들에게 어떤 영적 지식을 가르칠 수 있겠으며, 또한 그 학생들은 그에게서 무엇을 배워 영적 각성을 꾀하겠는가? 그런 자는 사역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사역을 훼손시키는 사람이다.


의사는 병을 치료할 뿐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는 권한이나 능력이 없다. 의사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의사 자신도 인간의 범주와 한계 안에서 제약을 받을 뿐이다. 그런데도 의사와 환자 간의 관계는 대단하다. 환자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상담 시간을 준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요, 처방한 약을 시간에 맞추어서 의사가 제시한 방법대로 먹어야 한다. 왜냐하면 병의 치유는 곧 생명의 기간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가? 그는 죄인에게 죄가 용서되었음을 알릴 수 있다. 그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그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공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사람에게 그가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시켜 줄 수 있다(요일 5:12,20).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종이 아니겠는가? 병을 고치는 의사와 영생을 확인시켜 주는 그리스도인을 비교해 보라. 죄인에게 영생을 얻게 하고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역자가 해야 할 영적인 일이다. 이런 영적인 일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수행하려는 시도가 가능하겠는가?


신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은 아니다. 그는 외양적 조건을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내적 조건은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쓰실 때는 먼저 “부르심의 증거”를 내보이신 후에 들어 쓰신다. 하나님께서 쓰실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증거들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는 것이다(롬 11:29). 하지만 인간적인 발상으로 하나님의 일을 했을 때는 거기에 후회가 있을 수 있으며, 중도 하차하는 일도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넷째, 개인의 욕망 충족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벌이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현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육신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려 했다가는 이상한 그리스도의 모습만 나타나게 된다. 로마카톨릭의 교황이나 추기경이나 신부가 드러내는 그리스도는 주일 아침 그들의 미사에서 고기와 피가 되어 식인종들의 음식과 음료가 된다. 제도화된 교회에서 제시하는 그리스도는 나무나 플라스틱 십자가에서 찾아야 한다. 은사주의 교회에서 제시하는 그리스도는 방언해야 하고 안수하면서 병을 고쳐야 한다. 그런 자들의 집회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뒤로 넘어지게 하는 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자, 여기에 세상에 관한 한 어떤 사유를 불문하고 자기 자신을 단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자백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세상에 대해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던 자아가 서서히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그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로 변모되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성령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육신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아가 살아나면 육신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육신적인 생각”은 그 자신을 하나님과 대적 관계에 있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사망”이기까지(롬 8:6) 하다. 육신을 따라 살면 그 결과는 사망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사는 길은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다.


육신이 한번 나서서 설쳐 보라. 그런 상태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어떻게 발산시킬 수 있겠는가? 분노를 터뜨려 본 적이 있는가?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찾아올 사람이 있겠는가? 육신이 설치면 거기에는 “육신의 일들”만 드러날 뿐이다. 간음, 음행, 더러운 것, 음욕, 우상 숭배, 마술, 원수 맺음, 다툼, 질투, 분노, 투쟁, 분열, 이단들, 시기, 살인, 술 취함, 흥청거림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이 드러나는 것이다(갈 5:19-21).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현현할 수 있으며 전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데, 그것도 매 순간 성령으로 충만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육신이 다시 육신의 일을 드러내게 되고, 마귀는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갖가지 모양으로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게 만들고 육신적인 상태를 조장함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


사도 바울은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하면서 그런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전 15:31).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그가 그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이다. 세상이 자기에게 못 박히고 자기도 세상에 못 박힌 것이다(갈 6:14).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면 못 박힌 상태에 있어야 한다. 거기서 내려오면 안 된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갈 2:20).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조건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자아가 죽은 사람만이 주님을 따를 자격이 있다. 그 사람이 진정으로 헌신한 그리스도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사람은 잘못 들어온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계획을 덮어놓고 자기 계획을 실현하려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아가 죽은 사람만이 하나님에 의해 쓰임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가 말하노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이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이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라』(사 55:8,9).
자기의 생각과 지혜가 하나님의 생각과 지혜보다 낫다고 여기면서 어떤 일을 결행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 것 같은가? 하나님의 우월하심을 인간의 입으로 감히 어떻게 다 묘사할 수 있겠는가?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분이요, 세계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관장하시는 분이다! 그분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무에서 유를 생성하시며, 지혜의 원천이 되시고, 모든 보화의 보고이신 분이 아닌가!


벌레 같은 인간이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하나님을 논할 수 있겠으며, 또 그분께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70,80년 사는 인간이 영원을 사시는 하나님께 무엇을 가지고 대항할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온 땅은 내 앞에 잠잠하라.”(합 2:20)라고 명령하신다. 벌레 같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손을 들고 무릎을 꿇는 일뿐이다. 사람의 생각으로 옳게 보이는 길이 있어도 어떤 길의 끝은 죽음이라고 하셨다(잠 14:12; 16:25).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더 잘 살고 더 잘 이루려고 하지, 망하고 죽으려고 그 일을 하겠는가? 그러나 주님께서 “네 생각으로는 옳게 여겨질지 모르겠으나, 네가 나와 상의하지 않고 네 멋대로 행하면 패망하게 된다.”라고 하실 때, 인간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세상 사람들에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는 그 성도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도 알고 있고, 성경의 존귀함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본질을 알고 슬퍼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구원받은 죄인이 아니라 “순종하는 종”이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연단받은 성도들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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