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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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 되었는가?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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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2월호>

매년 신학교 봄학기가 끝나면 나는 거의 자동으로 한반도 남부를 세 권역으로 나누어 가까운 지역부터 먼 지역까지 순회설교를 떠났다. 대개는 2박 3일간의 여정이었고, 원하는 지역(소도시)의 기차역, 버스 터미널, 재래시장, 바닷가 인근 어시장, 번화가, 교통순경이 지키고 서 있는 교통 정리대, 대학교 후문, 여객선 선착장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그 어디나 나의 사역지였다.



순회 설교를 떠날 즈음에 내리는 장맛비는 일종의 “통과 의례”였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어떤 도시로 들어설 때 비가 억수같이 오는 일도 있었다. 그대로 길을 따라가다가 버스정류장에 10여 명의 남녀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보면 날씨가 어떠하든지 간에 일단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래서 운전하는 형제에게 차를 세우라고 부탁한 뒤, 차에서 내려 땅을 밟으면 그 순간 하늘에서 주룩주룩 내리던 비가 그친 경우들이 몇 번 있었다.


나는 성능이 좋은 조그마한 확성기를 검은색 나이키 신발 주머니에 넣어 가까운 곳에 놓고 설교하곤 했는데, 놓아둘 곳이 마땅치 않으면 도로변이나 우체통 옆에 두기도 했다. 그러면 보행자들은 뜬금없는 확성기 소리를 듣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하늘을 쳐다보기도 한다. 내가 휴대용 의자 위에 서서 설교를 시작하면, 나를 돕는 형제들은 행인들에게 전도지를 전해 주면서 “예수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말하고, 행인들은 전도지를 받아 간다. 보행자들이 많아지면 그 자리에서 좀 더 오래 설교했고, 그렇지 않으면 설교를 한 주기(보통 20-30분 정도) 한 후에 다른 곳으로 옮겨가곤 했다. 포항의 수산물 시장이나 순천, 여수, 곡성, 구례 지역의 거리 장터에서는 장사하는 아주머니들이 홍차도 주고, 박카스도 놓고 갔으며, 목포에서는 어떤 아주머니가 “아, 부럽다!”라고 숨죽이며 말하기도 했다.


여름 장마철에는 언제 비가 그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어느 곳에서라도 사람들이 보이면 운전하는 형제에게 차 좀 세워 달라고 말한 후 차에서 내렸다. 때로는 고속도로에서 어떤 도시로 진입할 때 마귀가 겁을 주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내 아들이 마련해 준 찬송가 트럼펫 행진곡 연주를 듣는다. 지금까지 여름 장마 통에 비를 맞은 적은 없었고, 우산을 들고 설교했던 적이 경남 하동 장날에 딱 한 번 있었다.
해가 지면 그날의 스케줄을 마치고 여관으로 가서 몸을 씻었고, 가능하면 그 고을 특산물 전문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대도시에서는 교통량이 많은 사거리에서 교통경찰이 교통 정리하는 곳에 서서 설교할 때가 여러 번 있었는데, 마치 거리설교를 위해 준비된 자리인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신호 대기 중인 차들은 거의 다 창문을 열고 설교를 들었다.


서울에서는 신촌 연세대학교와 세브란스병원 건너편에서 매주 금요일 오후 4시에 설교했는데, 이따금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다니는 한 나이 든 여인이 <행복으로의 초대>를 나누어 주었다. 그때마다 그 아주머니에게 “나는 침례교 목사인데, 당신이 순복음교회 신문을 나눠 주고 있으면, 행인들이 나를 순복음교회 목사인 줄로 착각할 것 아니오? 내가 여기서 40분만 설교하고 갈 테니, 당신은 그다음에 신문을 나눠 주시오.”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하루는 안양에서 산다는 어떤 목사가 “나의 사역지”에 강대상까지 갖추고 와서는 전도사쯤 되어 보이는 남녀 두 사람과 함께 나의 자리에서 개역성경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내가 즉시 그에게 여기는 내 자리라고 말했더니, 길거리에 내 자리, 남의 자리가 어디 있느냐며 시비를 걸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당신은 선취 특권도 모르오?”라고 하면서 저 아래 노상에 자리 잡은 레코드 장수도 그 자리를 선취했기에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지만, 그는 내 자리에서 옮기지 않았다. 그는 암송하는 성경 구절도 없었는지, 아니면 개역성경을 읽으면서 설교하려고 했는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었는데, 그 순간 바람이 불어 책장이 넘어가자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다. 나는 그곳에서 4년 6개월 동안 매주 금요일 오후에 설교했는데, 나의 심장에 이상이 있어서 더 이상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는 의사의 진단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나의 부목사들에게 인계하고 그곳에서의 거리설교를 끝내야 했다.


한번은 2004년 초여름, 미국에서 다섯 명의 목사들이 우리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시내 호텔의 방값이 비싸다는 것을 알았기에 시내에서 숙소 잡는 것을 아예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 용산 미 8군 드래곤힐스호텔에 아는 미군 친구가 있어서 그곳에 다섯 명을 묵게 했다. 그들 중에는 이탈리아에서 경비행기를 빌려 그의 아내와 함께 비행 연습을 한 다음, 그 비행기 안에 미국 칙 출판사의 만화 전도지를 2만 부 넘게 싣고 날아올라 바티칸 상공에서 13분 동안 그 전도지들을 뿌린 후에 착륙하여, 빌린 비행기를 반납하고, 예약해 놓은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무사히 미국으로 돌아간 친구도 있었다. 그는 <바티칸 상공에서의 13분, 13 Minutes Over The Vatican>이라는 책을 통해 그가 수행한 “전도지 투하 작전”에 관한 이야기를 남겼으며,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공립학교들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여 수천 명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 교회가 지원하는 18명의 해외 선교사 중 한 명이다. 우리 교회는 오지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에게 미화 100달러씩 지원한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그처럼 화려한 이력을 가진 그일지라도, 내가 사용하는 작고 야무진 확성기를 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연세대 앞으로 거리설교하러 갈 준비를 하면서 구경하려면 같이 가자고 했더니 그가 따라나섰다. 그는 길거리를 가득 채운 인파를 보고는 흥분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급기야 연세대학교 정문 옆 담장에 올라가 영어로 거리설교를 했지만, 거리의 소음 때문에 영어 설교를 경청할 사람은 없었다. 그는 나에게 통역 좀 해 달라고 소리 질렀지만,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그 자리에서 그를 위해 통역해 줄 여유는 없었다. 열정 있는 복음 전파자 중에 수많은 인파를 앞에 두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연세대와 세브란스병원으로 건너오는 인파가 한 번에 300명이라고 했을 때(그곳을 잘 아는 독자라면 공감할 것임), 10번이면 3천 명이고, 30번이면 9천 명인데 그보다 더 좋은 거리설교 장소가 어디 있겠는가? 서울뿐만 아니라 한반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최상의 환경이다. 나는 2009년 4월에 담석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담석 제거 수술을 받았다. 2주간 입원해 있는 동안 수간호사 2명을 구령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온 전화.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출간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95년 10월경, 캐나다 토론토의 유원환이라는 사람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자기는 토론토에서 사업하는 사람인데, 토론토에서 한국인 교회를 시작하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해외에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육성하는 한국인 교회를 시작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겠는가 싶어서 그에게 몇 가지를 질문한 후에 기도해 보고 연락을 주겠노라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로부터 2주 후에 나는 캐나다 토론토로 출발하여 유원환 형제 내외를 공항에서 만났다.


그 가정에는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두 명 있었는데, 착하고 예쁘게 보였으며 둘 다 바이올린 연주 실력이 뛰어났다. 큰딸은 나중에 럭크만 목사님의 신학교(PBI)를 졸업한 인재였다. 유 형제는 서울에서 한 중소기업의 노조 위원장을 했었고, 아내는 서울의 모 은행 실업 농구팀에서 선수로 활동했었다고 들었다. 그는 토론토의 번화가 영스트리트(Yonge Street, 우리나라 명동 같은 곳)에서 종업원들과 더불어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렇게 목 좋은 가게를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사업을 포기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을 하겠다는 결의가 남달라 보였다. 알고 보니 그들에게는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매일 밤 가게를 닫고 집에 가서 그날 번 돈을 헤아리고 나면 자정이 훌쩍 넘어 버렸고, 또한 다음 날 새벽에 가게 문을 열어야 하기에 잠을 못 자서 생활의 리듬이 깨져 버리는 고충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인 신문에 이 목사님이 오신다는 광고를 실었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모일지는 자신도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모임 장소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영스트리트에 있는 그의 가게에서 불과 2,3분 거리에 있었다. 건물은 컸지만 오래되었고 난방용 스팀 소리도 시끄러웠으며 실내 전등조차 희미했다. 그의 말을 듣고 따라가 보기는 했지만, 나 자신도 과연 이곳에 사람들이 얼마나 모일지 의문스러웠다. 접이식 의자가 약 40개 정도 준비되어 있었는데,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는 그를 가게로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교회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주님 외에는 도움을 구할 곳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초라하게 되지 않도록 이 40개의 의자를 신실한 사람들로 다 채워 주시옵소서.”


시계는 오후 6시를 가리켰고, 그때까지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토론토는 북쪽 지역이라 겨울이면 해가 일찍 저물었기에 초조함과 불안감은 더욱 크게 엄습했다. 나는 다시 한번 더 주님께 기도를 드렸다. 오후 6시 30분이 되자 사람들이 한 명씩 들어오더니, 예정된 시각인 7시에는 준비한 40개의 의자에 한 좌석도 빈자리가 없었다. 나는 유 형제의 소개를 받고 강단에 서서 <한글킹제임스성경>의 중요성과 캐나다 토론토에 한국인 교회가 세워져야 할 필요성에 대해 한 시간가량 강의했다. 유 형제 내외는 그날 참석한 방문객들을 사전에 예약해 둔 한국 식당으로 안내하여 저녁을 함께했고, 이것은 그날 토론토성경침례교회의 설립 총회가 형성된 계기가 되었다.


그 무렵 미국 뉴햄프셔(New Hampshire)주에서 CPA(공인회계사)를 하고 있던 김경환 형제가 서울로 전화를 했다. 그는 자기를 소개하면서 자기 교회 목사가 내가 졸업한 “Pacific Coast Baptist Bible College”의 동창이라며 미국에 올 기회가 있을 때 뉴햄프셔에 꼭 한번 들러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캐나다 토론토에서의 성경핵심강연회 일정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CA)에 소재한 한 감리교회에서 세 번째 부흥회를 개최하는 일정이 있었고 거기서부터 미국 중부와 동부까지 갈 예정이었기에, 몇 주 후에 뉴햄프셔에 가도록 스케줄을 만들어 보겠다고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스머나 교회”는 한국 감리교 목사가 개척한 교회였는데, 주님께서는 그 교회를 부흥회 모임 장소로 허락해 주셨다. 나는 무려 세 번이나 그 교회에서 <한글킹제임스성경>의 중요성을 알리는 성경핵심강연회를 열었고, 그 주변 도시들에서 찾아온 목사들과도 좋은 교제를 할 수 있었다. 오클랜드(Oakland, CA)의 한 장로교 목사는 서울대 화공과 출신으로 미국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귀국하는 길에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누군가의 권면을 받고 오클랜드에서 교회를 시작했는데 교인 수가 2백 명이 넘었다. 문제는 그의 성경 실력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전할 줄 몰랐다. 죄인들을 구령할 줄도 몰랐다. 그는 나에게 서울에 가면 어떤 설교 테이프도 좋으니 참고할 만한 책들과 함께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스머나 교회에서 소위 전도사로 일하고 있던 한 자매가 나에게 봉투를 하나 건네주면서 차나 한잔 드시라고 해서 받았는데, 밤에 숙소에 와서 열어 보니 1천 달러가 들어 있었다. 함께 동봉한 카드에는 “내가 수년간 십일조를 모았는데, 누구에게 줄까 하면서 기회를 보다가, 마침 이 목사님을 만나게 되어 남편의 동의를 얻어 목사님께 드립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나의 미주 선교 여행에서 강사료 등으로 받은 돈은 아마도 1만 달러 이상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돈들을 전부 우리 교회에 드렸다. 나는 처음 사역을 시작한 이후 50개월 동안 월급을 받는 것을 잊었었다. 담당 집사가 월급을 받으셔야 하지 않느냐고 묻기에 “맞아, 월급을 받아야죠.”라고 대답했다. “얼마 드리면 될까요?”라고 묻기에 “얼마 받으면 되겠어요?”라고 반문했더니 그도 웃고 나도 웃었다. “지금까지 받지 않고 살아왔으니 지난 것은 없는 것으로 하고, 이제부터 월 50만 원을 주시오.” 몇 달 지나서 월급은 70만 원으로 올랐다.


한편 토론토의 유원환과 미국의 회계사 김경환, 두 사람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배교자들로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이 되었다. 왜 그런가? 성경대로 믿지 않고 그들 멋대로 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나선 자들은 그 누구라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고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목사를 하려는 자들이다. 그런 부류의 인간 중에는 미국이나 캐나다에 이민을 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자기가 자신에게 안수하고 목사 행세하는 자들도 많다.


유원환은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신학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지 않았기에 자기 나름대로 자신을 목사로 내세우기 위해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구령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와 성경 공부를 하자고 강권하면서 그를 제자로 삼으려 했다. 그 결과 그는 피터 럭크만의 <에스겔> 주석서가 출간되었을 때 이미 그 주석서를 3회 통독한 토론토 교회의 한 성도에게 자기와 에스겔 주석서를 공부하자고 제안하면서부터 그 실체가 드러났다. 그의 아내도 그 점을 알았기에 남편을 따라다니면서도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그의 아내는 살인적인 일정을 이겨 내지 못하고 만성 피로로 인해 죽고 말았다. 유원환은 자기 아내가 죽자,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서 이혼당한 여인을 꼬셔서 자기 아내로 삼았다. 바이올리니스트로 전도유망했던 작은딸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었고, 끝끝내 완치되지 못한 채 요양병원에서 하나님 곁으로 갔다. 그러자 PBI를 졸업한 큰딸이 견딜 수 없었는지 가출을 했다. 두 아이에게 각별했던 나로서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유원환은 간증이 없었다. 그는 결국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 사역하려고 했다. 그의 행보에는 성령님께서 그를 인도하신다는 일말의 증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렇듯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되고 말았다.


또 한 사람, 미국의 회계사 김경환은 나를 한국에서 불러들여 나의 신학교 동창생이라는 자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자신이 목사 안수를 받은 것처럼 나에게 자신을 목사인 양 소개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로 와서는 장례식장에서 설교해 주며 생계를 유지해 오던 슈라이브(Schreib) 목사의 아버지로부터(그 역시 목사였음) 온타리오(Ontario, CA) 한구석에 있는 바로 그 아버지가 목회하던 미국인 교회를 인수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르지만, 분명 돈을 후히 주었을 것이다. 그 목사는 그 돈을 받고 미국인 교인들을 김경환에게 넘겨줬다. 분명하게 교회를 인수했다면 오롯이 김경환의 교회의 교인들만 남았어야 할 텐데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한국어로 설교하는 예배는 김경환이 진행하고, 영어로 설교하는 예배는 슈라이브 목사가 진행하는 것이었다. 교포 사회이다 보니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이민 1.5세나 2세들은 당연히 영어로 진행하는 예배에 참석했다. 결국 한 지붕 아래에서 서로 다른 설교를 듣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는 그 교회의 이름을 “Bible Baptist Church International”이라고 명명했다. 이처럼 김경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엉터리인데, 자신을 목사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가 어느 한 날에 나를 만나러 한국에 와서 한다는 말이, 우리 킹제임스성경신학교에서 졸업생들에게 수여하는 학위들(신학사, 신학 석사, 신학 박사)을 자기에게 발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 무척 놀랐으나, ‘그가 우리 교제권 밖의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어디서 신학 공부를 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얼마나 난처했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세 학위증을 다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나의 큰 실수였다. 그의 말대로 그는 자기

사무실에다 걸어 놓으려고 했었다. 나는 한순간의 오판으로 비성경적이고 인간적인 선심을 쓴 셈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어리석은 처사였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에 그가 다시 한국으로 나를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그 세 가지 학위증을 이사하다가 다 잃어버렸는데 다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의 눈에 그가 무엇으로 보였겠는가? 마귀의 졸개로 보였다. 그는 목사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를 그때부터 마귀에게 점유당한 자로 여겼다. 그가 썼다는 책들[1. <교회 개혁을 위하여 바른 성경으로 돌아가자> 2. <교회 개혁을 위하여 바른 믿음으로 돌아가자> - 각각 127페이지임]은 책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이 책들을 보면 그의 지식과 신앙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킹제임스성경을 믿는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목사로 부르신 증거가 있는가? 그는 내가 만난 소위 목사 중에서 가장 형편없는 가짜 목사였다. 그는 설교할 줄 모르는 자로서 유튜브에서 지껄이는 것을 설교인 줄로 안다. 왜 설교를 못 하는가? 설교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Bible Believers)이라는 칭호를 거두어 버렸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이제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마음이 부패하고 믿음에 관해서는 버림받은 자들이라』(딤후 3:8). BB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