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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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 못한 이야기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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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6월호>

항암 치료를 받는 암 환자에게 위협을 주는 병세가 수십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심각한 증세는 약제의 독성 때문에 기억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나의 신앙 간증을 펴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가장 큰 어려움은 지난날 나의 생애 동안 경험했던 사건들을 제대로 기억해 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내가 거듭난 때가 1978년 7월 23일이었으니까, 벌써 40년도 더 넘은 과거사를 회상하는 일은 정상적인 기억력을 지닌 사람도 어려운 일이며, 더구나 말기 암을 두 가지나 견뎌 내야 하는 환자에게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구원받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비록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한글개역성경을 성경인 줄 알고 읽었을 때 그것은 마치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불편함을 참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었다. 미국에 가서 신학 공부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한 수업 시간에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변개되었다는 사실을 듣고서는 심장이 터져 버릴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열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주님께서는 나의 기도에 경청하시고 나를 부르시어 <한글킹제임스성경>을 번역하여 출간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현재까지 62판을 펴냈고, 25만 권 이상 보급하게 해 주셨다.
독자들은 손에 들어온 어떤 책을 읽었을 때 각자 나름대로 그 책에 대해 평가만 할 뿐, 타인이 겪은 먼 과거의 일들까지 끌어당겨서 거기에 자신의 상상을 첨가하여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021년 4월 12일에 나의 자서전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 이따금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과거사들이 기억날 때면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고, 때로는 간헐적이지만 더 자주 느꼈기에, 빼먹은 부분들을 세월의 강물에 씻어서, 틀어진 퍼즐을 독자들에게 맞추게 해 주고 싶어 이렇게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그 사명감은 나뿐만 아니라 책을 쓰는 모든 저자들의 의무이자 성의라고 판단되어 먼지 낀 과거사를 다시 한번 사래질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혼이 주를 자랑하리니 겸손한 자가 듣고 기뻐하리라』(시 34:2).
『너희는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주를 구하는 자들의 마음이 즐거울지어다』(시 105:3).
『그리하여 나로 주께서 택하신 자가 잘되는 것을 보게 하시며 주의 민족의 기쁨 가운데 즐거워하게 하시고 주의 유업을 자랑하게 하소서』(시 106:5).
『우리의 자랑이 이것이니 우리의 양심의 증거라. 이는 우리가 진지함과 경건한 성실함으로 하되 육신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에서 행하고 또 너희를 위하여 보다 풍성히 행한 것이라』(고후 1:12).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교회들 앞에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의 증거를 보이라』(고후 8:24).

■ “아도니람 저드슨”의 선교지 미얀마(버마)에 가다 ■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어찌하겠느냐? 그들의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화시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 기록된 바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고 함과 같으니라』(롬 3:3,4). 이 말씀은 아도니람 저드슨 목사에게 미얀마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서나 자기의 영달을 위해서 미얀마를 택하지 않았고, 오직 인류의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해야겠다는 열정으로 지구촌에서 가장 미개한 나라 중 하나인 미얀마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아도니람 저드슨(1788-1850)은 어린 시절부터 매우 총명하여 세 살 때 성경을 읽었고, 일곱 살 때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과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도 알았다. 그의 나이 열 살 때는 해양 항법을 공부했으며 헬라어를 번역하기도 했다. 열두 살 때는 요한계시록을 주석하려고 했을 만큼 그의 천재성은 두각을 나타냈고, 열여섯 살 때는 미국 프로비던스대학교(현 브라운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많은 우등상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플리머스(Plymouth)에 있는 회중교회의 목사였으나, 젊은 저드슨은 별다른 생각 없이 세상의 어두운 면도 경험하고자 했다. 연극 무대에서 작품을 쓰는 작가의 길을 열망한 저드슨은 브라운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뉴욕으로 가서 연극 회사에 입사했다.


며칠 후 저드슨은 거처를 정하려고 변두리 여관에 묵었는데, 밤중에 옆방에서 어떤 젊은이가 고통스럽게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다. 그는 밤새도록 옆방 사람의 신음 소리와 때로는 숨이 멎는 듯한 소리에 시달려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아침 여관 주인에게 어젯밤 옆방에서 소리 질렀던 사람은 어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죽었다고 대답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제이콥 에임스(Jacob Eames)라고 했다. 그는 브라운대학교에서 자기와 친했던 친구로,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자기에게 인간적으로 영향력을 크게 끼쳤던 사람이었다. 저드슨은 이 비극적인 일로 충격을 받았고, 바로 그날 고향 플리머스로 돌아와 즉시 사역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지만 오직 주의 권고만이 서리라.』(잠 19:21)라는 말씀이 그의 마음을 압도했다.


그 후 저드슨은 아내 앤과 결혼했고, 그로부터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녀와 함께 인도로 떠났다. 1812년 2월 1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살렘을 떠난 지 약 4개월 만인 1812년 6월 17일에 인도 캘커타에 도착하였다. 이후 그는 미얀마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렇게 미얀마에 침례교회가 시작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해외 선교의 열매였다. 해외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나 디도 같은 헌신적인 일꾼들을 예비하셨다가 때가 되면 선교지로, 곧 복음에 있어서 미개한 나라로 보내셨다. 영국인 존 페이튼을 남태평양 섬들로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라. 우연같이 보이지만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열정을 지닌 선교사들을 식인종들이 사는 남태평양 여러 섬들로 보내셨다. 하지만 페이튼의 아내가 식인종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었어도, 그들에 의해 살해된 이전 선교사들의 시체를 그곳 무인도에서 한 끼 식사로 먹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녀는 자기가 먹었던 식사가 이전 선교사들의 시체에서 잘라 낸 살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그 자리에서 토해 버렸다.


한국에서의 나의 초기 사역은 앞선 선교사들로부터 소임을 받아 선교지를 개척하는 그런 평범한 사역이 아니었다. 나의 하루 일과의 첫 번째 목표는 <킹제임스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었다(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그 목표를 이루고 나면, 저녁을 먹은 후에 밤 9시까지 신촌에 있는 7평 남짓한 작은 사무실에서 신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미얀마 양곤 대학 내에 있는 아도니람 저드슨 교회>


당시 펜사콜라성경신학원(Pensacola Bible Institute, 현 킹제임스성경신학교)은 미국 플로리다주 펜사콜라에 있는 럭크만 목사님이 설립한 신학교의 한국 분교인 셈이어서, 교재, 교수 방법, 시스템 등을 그대로 따라야만 된다는 협약이 있었다. 첫 학기에 9명의 학생이 모였는데 그들은 대부분 성숙한 사회인들이었다(KBS 직원, 대학원생들, 기존 교단 신학교에서 떨어져 나온 상급반 학생들 등으로 구성). 강사는 나 혼자였고, 교재는 럭크만 목사님이 쓰신 23권의 얇은 책자들이었다. 이것은 알반 더글라스(Alban Douglas) 선교사가 쓴 <가정성경공부 100과>를 근거로 만든 책자들로서, 훗날 나는 그 책자들을 하나로 편집해서 <피터 럭크만의 조직신학>(1,040페이지)으로 만들었다. 당시 나는 영어로 된 교재를 눈으로 읽으면서 입으로는 우리말로 가르쳐야 했었다.


나는 2006년 여름에 미얀마를 방문했었다. 당시 미얀마에는 우리와 교제하던 현지인 선교사 로저 마웅(Roger Maung)이라는 준비된 선교사가 사역을 펼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허리 디스크가 심해서 잘 걷지 못했기에 강원도 강릉에 있는 한 종합병원 원장이 자원해서 나와 동행하기로 했다. 마웅 형제를 양곤 공항에서 만나 숙소인 한 호텔로 가서 짐을 풀었는데, 으리으리한 관광호텔로서 아마 양곤(옛 수도)뿐만 아니라 미얀마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특급 호텔이었던 것 같았다. 마웅 형제와는 다음 날 아침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날은 일단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마웅 형제가 와서 우리 일행을 안내했는데 목적지는 그들이 모임을 하는 신학교였다. 당시 미얀마는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라 임시로 세워진 국가 같았다. 호텔과 식당들은 가격이 턱없이 비쌌고 사치품들 역시 아주 고가였다. 한번은 함께 간 병원장과 저녁을 먹었을 때 내가 가져간 미얀마 돈으로는 밥값을 다 지불할 수 없어서 식당 종업원을 호텔로 데려와 나머지 금액을 지불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환율의 차이가 있었다. 그들의 상품은 주로 내국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관광객들을 위한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마웅 형제의 신학교로 향했는데 도착해서 택시 문을 열려고 하였으나 열리지 않았다. 그 원인은 택시가 고물이기 때문이었다. 택시 기사가 전선을 한 가닥 빼서 다른 선에다 연결하니 그제야 택시 문이 열렸다. 택시 기사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영어로 설명하고 미얀마 성경으로 읽어 달라고 마웅 형제에게 부탁했는데 그는 미얀마 성경을 가져오지 않았다. 결국 그 기사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했다. 나는 마음이 언짢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얀마 양곤에 있는 신학생들과 함께>

마웅 형제가 우리 일행을 안내한 장소는 비교적 깨끗했고, 남녀 신학생 수는 약 30명쯤 되었다. 그들의 눈빛은 그리스도인의 자긍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45분 이상 설교한 후 초청을 했는데 거의 다 초청에 응했다. 그날 나의 설교에 경청했던 남녀 학생들은 매우 순수했으며, 나에게 설교에 대한 반응 그 이상의 순수함을 전달해 주었다. 내가 그들의 눈빛에서 발견한 것은 진리와 복음을 향해 반향을 일으키는 그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 그 자체였다. 외국인 목사에게 으레 내보이는 식의 예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목마른 길손이 산길에서 발견한 옹달샘에 감사하는 눈빛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요한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길을 지나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만나신(1절) 사건이 나온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가 죄를 지은 것이니이까, 이 사람이니이까, 아니면 그의 부모니이까?』(2절)라고 여쭙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요, 오직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때가 낮일 동안에 나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들을 행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라』(3-5절).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으라.”』(6,7절)라고 하셨다(“실로암”은 해석하면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이다). 이에 소경은 실로암으로 가서 씻은 후에 앞을 보면서 올 수 있었다(7절).


눈을 뜬 그 소경은 그 후로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며 묻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동일한 대답을 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해서 네 눈이 떠졌느냐?”고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내게 말하기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고 하더라. 그 사람들이 “그가 어디 있느냐?”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모르노라.”고 하더라』(10-12절).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롬 3:23,24).
『형제들아, 잠든 자들에 관해서는 너희가 모르게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가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살전 4:13).
『그러나 나를 거슬러 죄를 짓는 자는 자기 혼을 해치는 자니, 나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은 죽음을 사랑하는 자들이라』(잠 8:36).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으면서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의심하는 대목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만일 당신이 그런 위선적인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다녔다면, 아무리 순수한 복음 설교를 들었다 하더라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날 밤 나는 나의 주치의(병원장)와 함께 미얀마를 떠났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형제자매들은 나를 배웅하러 공항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호텔을 떠나면서 그 학생들이 공항에 올 줄로 생각하고 여비 중에서 1천 달러를 따로 챙겨 주머니에 넣고 그들이 오면 주리라고 결심하고 기다렸으나 끝내 그들은 오지 않았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나의 주머니를 확인해 보니 그 1천 달러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 내 주머니들을 점검해 봐도 그 1천 달러가 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택시 안이나 공항 어디에서 빠진 것이 분명했다. 나의 생애에서 그날 밤에 야기된 나의 어리석고 인색한 행보를 그처럼 후회한 적이 없었다. 물론 나의 나머지 여비는 그대로 안전했다.
내가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도 나의 신중하지 못했던 처신을 두고 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다음 날 교회에 출근하여 남은 여비를 비서에게 주면서 내가 잃어버린 현금 1천 달러를 다시 한번 곱십으며 은행에 입금하라고 당부했다. 은행에 다녀온 비서는 내 말만 믿고 “여기 1천 5백 달러가 있는데요. 우리 교회 계좌에 넣어 주세요.”라고 했더니, 은행원이 “2천 5백 달러인데요!”라고 말했다고 했다. 내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1천 달러가 어떻게 그 여비에 그대로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고 나의 비서도 모르며, 은행 여직원도 모르고 미얀마 신학생들도 모른다. 오직 주님만이 아신다!


아도니람 저드슨이 미얀마를 자신의 선교지로 택한 때부터 그가 겪은 박해들을 예상했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내가 보고 겪은 그 나라의 상황들은, 어떻게 미얀마라는 미개한 나라에 침례교 선교사를 보내 주셔서 오늘에까지 이르렀는가를 교시로 남겨 주었을 뿐이다. 당시 나는 시간을 몇 등분으로 쪼개서 사용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지만, 생소했던 그 나라까지 선교지로 관심을 두게 된 일은 지금도 나의 뇌리를 자꾸 자극해 주고 있다. 더군다나 현재 미얀마 군부가 국민의 주권을 무시하면서 자국의 국민을 무시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100년도 못 사는 존재들이고, 심지어 죽은 이후에는 지옥의 불길 속에서 뜨겁다고 외칠 마귀의 종들임을 깨닫고 통회하며 각성해야 할 것이다. 군부의 불법에 항거한 젊은이들은 누구인가? 대부분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이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주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이로다』(시 116:15).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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