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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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사 : 나의 간증 “완결” -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 되었는가?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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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3월호>

미국 국무성으로부터 주한 미국 대사관을 비롯한 한국 내 7곳의 미국 정부 시설의 보안 공사를 맡은 업체의 한국 지사 대표로서 9명의 미국인 엔지니어와 일을 하던 18개월 동안, 나는 선지자 엘리야의 고독을 몸소 느끼며 주님의 명령에 따라 일했다. 당시 국내의 시대상은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혼란스러웠다.


특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퍼져 있던 “좌익 용공 세력들”(오늘날 속칭 586세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부산 미국 문화원에 방화를 저지르고, 주한 미 대사관의 벽을 타고 침입하여 대사관저로 들어가는 등의 범죄를 일삼으면서 세상과 언론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미국 영주권을 신청해 놓은 상태였던 나는 미국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였는데, 빨갱이 대학생들이 한국 내 미국 정부 시설들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중범죄들을 저지름으로써 내가 한국에 돌아와 성경(사복음서)을 출간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6년 만에 미국에서 귀국한 경위는 앞서 설명했기에 여기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하루는 미 8군 영내에 있는 121병원의 행정 장교인 켈리(Kelly) 대위가 어떻게 알았는지 내 집으로 전화를 했기에 미 8군으로 가서 그를 만났다. 누가 그에게 나를 소개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와 교제하다 보니 그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임을 알게 되었고,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내가 <킹제임스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 8군 영내에는 채플(chapel)이 두 곳 있었는데, 그는 한 곳에서 내가 간증할 기회를 주었고 그때마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의 전신인 <새성경>(그때는 신약만 출간했음)을 가져오게 해서 미군들에게 선물로 사게 해 주었다. 그는 나에게 무척 친절했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사람들을 대했다.


그 당시 미국 “성서침례친교회”(Baptist Bible Fellowship)의 선교 담당 책임자였던 밥 그레이(Bob Gray)가 한국에 와서 그들이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미 8군 장교 식당에 모아 놓고 강연을 했는데, 밥 그레이는 주 강사로, 나는 부 강사로 정해져 있었다. 나는 그때 미 대사관과 미 8군 출입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 밥 그레이 목사는 약 15분간 시간을 쓴 후 나에게 45분의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 나는 45분간의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여 한글개역성경의 오류들에 대해 강의했다. 강의를 마치고 그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100여 명이 넘는 인원이 모인 것 같았다. 그들 선교사 중에 찰스 로스(Charles Ross)라는 선교사가 송탄에 영외 교회를 세워 목회하고 있었는데, 미군이 약 12명이었고 나머지는 한국인들이었다. 찰스 로스 선교사가 오산 비행장 영외에 있는 교회로 나를 초청했기에 그곳에 가서 설교했더니, 그중 4명의 미군이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제작하는 데 보태 달라고 하면서 자기들의 한 달 치 봉급을 헌금했다.
또 한번은 찰스 로스 선교사가 한국에 파송된 BBF 선교사들을 대전에서 모이게 할 테니 한글개역성경의 문제점에 대해 강의를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다음 주에 강의를 준비해서 주한 선교사 가족들이 모인 대전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한글 성경의 문제점에 대해 설득력 있게 제시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과연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는지, 어떻게 해서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오겠다고 지망했는지, 누가 그들을 이 나라에 파송했는지 실로 의심스러웠다. 내가 다녔던 미국 신학교 출신들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대동소이했다.
하루는 미 8군 행정 장교 켈리 형제가 성경 200권을 가지고 미 8군 영내의 제2채플로 와 달라고 해서 나는 성경을 준비하여 그곳으로 갔다. 누가 그날 행사의 주최자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파송된 100여 명의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족 및 지인들이 한글개역성경의 오류들에 관한 강의를 듣기 위해 모여 있었고, 그 광경을 본 나는 눈물이 날 만큼 하나님께 감사했다. 강의가 끝나고 헤어질 때 거의 모든 참석자가 성경을 한 권씩 사 갔다. 나는 켈리 형제로부터 여러 번 큰 도움을 받았는데 그의 주소를 알 수가 없어서 연락이 끊겼다. 그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께 사랑받는 종이 되었으면 한다.


내가 대한항공에 근무했을 당시 극동방송의 김장환 목사를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 호텔 로비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구원받기 전이라 술도 한 잔 거나하게 하고 담배도 피우고 있었는데, 그가 복음 비슷한 것을 말했을 때 나는 거절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우연히(?) 한 권의 책을 읽다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믿고 거듭났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에 호놀룰루의 같은 호텔 식당에서 김 목사를 다시 만났다. 그에게 인사하며 구원받았노라고 말해 줬더니 그가 무척 기뻐했다. 그 후 서울에서 쉬는 주일에 그의 교회가 있는 수원까지 가서 두 번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중 한 번은 가수 조영남 씨가 와서 신학 공부를 할 것이라며 통기타 치고 노래도 불렀던 기억이 난다.
내가 항공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유학 가면서 김 목사에게 인사를 하러 갔을 때, 그는 교단 배경을 알아보고 공부하라고 권면했다. 그의 뜻은 미국 남침례교 학교로 가라는 것이었으나, 나는 나대로 근본주의 침례대학에 갔다. 그로부터 6,7년이 지난 후에 김 목사와 조찬기도회에서 만났는데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아마도 그는 내가 취직자리 하나 부탁하러 오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가 국민일보를 만들었을 때 그가 가세하여 지지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의 신앙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1988년 어느 겨울날, 극동방송 사장 비서실이라면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날은 수요일이었는데 “내일 아침 조찬기도회가 있으니 참석해 달라.”라는 사장님의 전언이라고 했다. 몇 시에 가면 되느냐고 했더니 아침 6시라고 했다. 겨울철 아침 6시면 깜깜하기에 무슨 기도회인가 싶었지만 나는 그 요청을 수락하고 한번 가 보기로 했다. 그 시간에 극동방송으로 갔더니 지하에 있는 어떤 장소에 미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한국 목사들을 비롯하여 약 30명이 모여 있었다. 내 왼쪽에는 모 재벌 그룹의 부회장이, 또 오른쪽에는 새마을 운동 본부장이었던 김집 박사가 자리했다. 그 시간에 했던 일이란 인사말이나 설교도 없이 개역성경을 한 구절씩 돌아가면서 읽고 아침을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별 희한한 조찬기도회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조찬기도회를 왜 한 것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이 사역에 대한 김 목사의 관념인 것 같았다. 그는 어디서 그런 것을 배웠을까? 미국 밥존스대학교(Bob Jones University)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가 의아해졌다.


그보다 앞서 1988년 4월의 어느 날엔가 극동방송 직원들에게 설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방송국에 가서 설교했다. 당시 부사장이었던 송 모 씨가 잠시 자기 방에 가서 차 한잔하자고 해서 따라갔다. 그가 대뜸 한다는 말이 요한복음의 시제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하겠다며 성경 구절 몇 개를 언급했다. 나는 그때 <한글킹제임스성경>의 전신인 <새성경>(신약)에 앞서 출간한 “사복음서”가 있었기에 펼쳐서 하나씩 짚어 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다 옳다고 대답하면서 이 성경이 나오면 자기 교회에서도 쓰겠다고 말했다. 그가 밥존스대학교 출신임에도 성경에 관해 관심이 있는 것을 보고는 개역성경으로 찌든 이 나라에서 동지를 만난 것 같아 매우 기뻤다. 그 후 <새성경>(신약)이 출간되었고, 서교동 소재 서교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게 되어 그에게 설교해 줄 수 있겠느냐고 전화했더니 그러겠다고 대답해서, 그날 우리는 여러 손님을 초대해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옆에는 그 방송국 총무국장이요, 사장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유OO 목사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송 부사장이 나타나지 않자 유 목사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자리를 떴다. 끝내 송 부사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무책임한 거짓말쟁이 목사였는데,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날 설교는 내가 했다.


말씀보존학회는 1988년 12월과 1989년 3월, 두 번에 걸쳐서 사복음서를 출간했다. 1988년 어느 날, 당시 C.C.C. 순출판사를 맡고 있었던 김성영 목사(전 안양 성결대학교 총장)가 김준곤 목사의 심부름으로 내가 살고 있는 합정동 집으로 찾아왔다. 김준곤 목사가 30년간의 C.C.C. 사역을 회고해 보니 이렇다 할 결실이 없는 것 같아 우리가 펴낼 <새성경>(신약, 1990년 3월 출간)을 보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석에서 그렇게 하라고 승인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한글킹제임스성경>의 신약성경 초판이 김준곤 목사가 서문을 쓰고 순출판사 명의로 3천 부가 출간되어 서점들에 발송되었다. 그런데 김성영 목사가 하는 말이, “만일 팔리지 않으면 나 보고 다 회수해 가라는 것”이었다. 불쾌하기도 했지만, 김준곤 목사의 결심을 존중해서 나는 이 땅의 출판문화와 거래 상황을 전혀 모르지만 그래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식의 합의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고, 미국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어 일주일간 갔다 와야 하니 돌아와서 다시 상의하자고 제안했다. 일주일 후에 김성영 목사와 다시 대면했는데 그는 동일한 조건을 계속 고집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이 일을 하자고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당신들과는 함께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순출판사는 서점에 나가 있는 <새성경>(신약)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이 얼마나 큰 마귀의 장난인가!


하지만 우리의 반석이시요, 요새이신 주님께서는(시 31:3) 회수할 것이 없도록 다 팔리게 하셨고 남은 것이라고는 순출판사 창고에 있는 64권뿐이었다. 김준곤 목사는 가장 현명한 판단을 했다가 사탄의 계략을 감지하지 못한 채 아쉽게도 호기를 놓쳐 버렸다. 만일 C.C.C.가 그 일을 했더라면, 김준곤 목사는 우리나라 130여 년의 교회사에서 가장 소중한 사역의 일환을 담당하여 바른 성경을 보급하는 데 그의 역량을 발휘했을 것이고 그의 사역은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도 그가 받을 상이 컸을 것이지만, 결국 실기하고 말았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누구라도 멸망할 것이나,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보상을 받으리라』(잠 13:13). 하지만 그들은 지혜가 없었다.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면 지식이 네 혼을 즐겁게 할 것이며, 분별이 너를 보호할 것이요, 명철이 너를 지켜 악인의 길과 비뚤어진 것들을 말하는 자로부터 너를 구해 내리라』(잠 2:10-12).


김준곤 목사는 고등학교 시절 나의 교목이었고, 그의 동생은 나와 같은 반 친구였는데 요절했다. 내가 대한항공 조종사를 그만둘 무렵, 미국 알래스카 앵커리지(Anchorage, AK)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보잉 747 비행기를 탔는데 그날은 “비번”이었다. 비번을 항공 용어로 “Dead Head”라고 한다. 비행하는 조종사들은 살아 있고, 비행하지 않는 조종사들은 잠이나 자면서 50%의 수당을 받는 모습을 꼬집어 미국 공군에 있는 누군가가 지어낸 용어로 생각된다. 당시 나는 일등석에 짐을 얹고 비행복을 갈아입은 상태였는데, 마침 김준곤 목사가 부인과 함께 그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그는 나를 몰랐지만 나는 알아보았고, 제복을 걸고 나서 나를 소개하며 인사했다. 그는 무척 반가워했다. 특히 그의 죽은 동생의 친구라고 하자 더욱 반가워하면서 우리 학교 출신들도 조종사가 있느냐고 놀라워하며 묻기에 3명이나 있다고 대답했다. 기내 식사가 끝난 후 다과를 들면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나는 그에게 이제 곧 조종사 생활을 접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매우 놀라면서 어떤 연유로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이에 나는 얼마 전에 구원을 받았는데 성경에 관한 공부를 하다 보니 국내의 책들로는 혼란만 가중되고 어떤 것이 옳은 지식인지 알 수 없어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노라고 말하면서 진리를 아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결행해야 할 일 아니겠냐고 대답했다. 그런 다음 내가 고등학교 다녔던 3년 동안에 왜 복음을 전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구원받는 데 도움은 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그래서 나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는 군대에서부터 비행기를 탔는데, 그때 사고가 나서 죽었다면 저는 지옥에 갔을 것 아닙니까?”라고 되물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그는 얼굴색이 변하면서 몹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그는 시간이 될 때 서울 정동에 있는 자기 사무실로 한번 방문해 달라고 말했다. 나는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에 C.C.C. 중간 간부들에게 설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정동과 청와대 뒤편 부암동에서 몇 번 설교한 적이 있었다.


내가 1987년 10월 25일 한국에 귀국하여 주한 미 대사관과 미 문화원, 대사관저, 부산 미 문화원을 포함해 7개 공사 현장 감독을 하게 되었을 때부터 주님의 음성을 몇 차례 더 들었는데, 그 음성은 “너는 누가 설교를 해 달라고 하면 교파를 따지지 말고 설교해 주고, 누가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성경을 가르쳐 주라.”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그대로 실행했다. 나는 주님의 명령대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등 교파를 가리지 않고 성경을 배우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심지어 어느 여자 미용사 학교의 초청을 받아 설교하러 간 적도 있었다.
대전침례신학교에서는 원문비평학을 한 학기 동안 강의했고, 그곳 선임 선교사와 약 2시간에 걸친 원문비평학 토론을 통해 그곳 부총장의 잘못된 성경 지식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그는 나이가 지긋이 들었는데, 자기의 제자들에게 잘못 가르친 죄를 어떻게 속죄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주소를 알고 있으면 그들에게 직접 찾아가든지 편지를 쓰든지 해서 솔직하게 양심 고백하고 옛 교과서들을 불태우라는 말을 전하라고 말해 주었다. 그는 내게 감사를 표명했다. 선임 선교사라는 자에게는 영국인 신학자 딘 버간(Dean Burgon)이라는 원문비평학자를 아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달라스신학대학원의 제인 하지스(Zane C. Hodges) 교수는 아느냐고 물었더니 역시 모른다고 했다. 교수랍시고 원문비평학을 운운했던 자들의 실체가 드러나 버린 것이다. 그곳에서 3학년 학생들에게 “반카톨릭 교회사”를 한 학기 동안 가르쳤는데, 학생 중에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내 집까지 찾아와서 잠을 자고 간 학생들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문사들에 논단을 기고했던 필자 중에는 우리가 펴내는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에 게재된 나의 논단을 선호하는 목사들도 있었다. 우리 교회가 합정동 섬유노조빌딩에 있었을 때 하루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신사 한 분이 오전 예배 시간에 참석하려고 방문했다.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오전 예배가 끝난 후에 그분을 모시고 설렁탕 집에 가서 점심을 대접하고 자기소개를 부탁했더니 그는 안양 성결대학교 학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다음 주에도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는 이 두 번째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 목사님이 알미니안주의자인지 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내가 기독교 신문들에 기고한 논단들 때문인데, 내가 칼빈주의자들을 사정없이 비평한 논단들을 보았던 것이다. 이에 “나는 알미니안주의자가 아닌데요.”라고 말했더니, 그는 깜짝 놀라면서 “그러면 칼빈주의자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칼빈주의자도, 알미니안주의자도 아니라고 했더니, 그는 그러면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내가 웃으면서 “나는 그리스도인인데요.”라고 했더니, 그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나 같은 그리스도인을 처음 본 것이다. 특정 교파에 갇혀서 자기가 지닌 지식의 칼로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는 소위 신학자들이란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보라! 그들은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 자기가 동의하지도 않는 신학 교리를 자기 멋대로 싸구려로 만든 비겁한 작자들이다. 그들은 성경을 공부하기는커녕 진리의 지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오로지 퇴직 후에 지급될 교수 연금만 받아먹으려고 성경에 대한 신념을 팔아먹은 자들과 다름없었다.


나는 네덜란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와서 장로교 신학교에서 “교수 짓”을 하는 교수 한 사람을 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그런 자들의 신은 자기들의 배다. 『그러한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배를 섬기는 것이니 정중한 말과 그럴듯한 언변으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8). 나는 그와 식사를 한 적도 있다. 그는 내 고등학교 후배였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에필로그


우리가 성경침례교회를 마포구 서교동에서 창립했을 때, 어떤 사람이 전세로 얻은 25평의 장소를 사글세로 빌려 교회를 시작했다. 그때는 1992년으로서, 조용기, 김기동, 박옥수 같은 푼수들이 출현하여 자기들의 교회가 하나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처럼 나팔을 불어 대던 시기였다.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여의도에 큰 교회를 지어 놓고 모든 시내버스가 여의도에 있는 자기들의 교회를 지나가도록 만들었다. 교회 안에는 은행 분점도 들어와 있었다. 그들이 소개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는데, 그저 병 낫고, 방언 받고, 부자 된다는 등의 “5중 복음과 3중 축복”으로 많은 사람을 현혹하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마치 은사주의의 발원지인 것처럼 소개했던 것이다.


내가 교회를 세웠을 당시 사탄도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나는 교회를 파괴하는 마귀의 공격을 여섯 번이나 겪었다. 만일 마귀의 공격을 받는 이런 영적 전쟁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교회를 마포구 서교동에서 처음 시작한 이후 합정동 섬유노조빌딩 2층에 있는 50평 규모의 장소로 옮겼을 때 대학생들이 모여들었지만, 이준승이라는 자가 그 35명 중에서 12명을 데리고 나갔다. 그다음에 60명쯤 되었을 때는 김영균이라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 조교수가 20여 명을 데리고 나갔으며, 그다음 180명을 갓 넘겼을 때는 나의 처조카인 이재명이 40여 명을 데리고 나갔다. 부목사로 일했던 이창희도 몇몇 사람들을 데리고 나갔고, 영어 번역을 곧잘 한다던 윤여성 내외는 교회 안에 속칭 “돈이 될 만한” 전문 직업인들만 골라서 나가더니 장안동에서 모임을 차렸다. 마귀는 성경대로 믿는 교회의 등장을 가장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 와중에도 새로운 성도들이 계속 찾아와서 빈자리를 메꾸었다. 우리는 4년 8개월 동안 섬유노조빌딩에 있으면서 럭크만 목사님 내외의 방문을 받았다. 당시 섬유노조 위원장은 우리가 교회 간판도 달지 못하게 했다.


그 무렵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우리 교회는 방화동에 새로 건축 중이던 10층짜리 상가 건물에 7층(406평)을 분양받았다. 그 희열을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나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이제는 장소에 대해 더 이상 기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아마 주님께서는 “네가 무엇을 아는데?”라고 하셨을 것이다. 젊은 학생들이 꾸준히 교회를 찾아왔기에 계속해서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싶었다. 처음에는 펜사콜라성경신학원(Pensacola Bible Institute)으로 시작했는데, 10년쯤 지나고 나니 교회에 속한 젊은이들이 거의 다 3년 과정을 수료해서 더 이상 공부할 학생이 없었다. 그래서 킹제임스성경신학교(King James Bible College)로 교명을 바꾸어 “온라인”으로 가르칠 계획을 구상하고 다시 시작했다.


신학교 강사로는, 김기준(숭실대)과 조승규(인하대)를 오랫동안 믿음의 생활을 신실하게 한 사람들로 여기고 그들에게 여러 과목을 맡겼으며, 이창희에게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치게 했고, 나머지 과목들은 내가 다 맡았다. 김기준과 조승규는 초창기부터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과 여러 가지 서적을 출간하는 등 무척 고생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그들에게 신학교 방학 때 이스라엘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에게 내 사무실 옆에 방을 하나씩 주어 일하게 했는데, 김기준은 번지르르한 얼굴에 비해 사무실을 너무 더럽게 사용해서 내가 두 번이나 그의 사무실을 정돈해 주었다. 나는 당시에 물질적인 여유가 없었지만, 한 사람당 5백만 원의 비용을 지불해서 약속한 대로 두 사람을 이스라엘에 보내 주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스라엘을 여행하고 돌아왔을 때 나에게 무슨 선물을 사 왔는지 아는가? 독자 여러분은 놀라지 마시라. “수건”을 사 왔는데, 그들은 그것을 선물로 여겼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부엌에서나 쓰는 “행주”(20cm×20cm)였다. 그들의 인격과 나에 대한 존경심이 그 정도였던 것이다. 상식 이하의 인간들을 신뢰하고 함께 사역했던 내가 너무 초라하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 주신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참아 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자기들의 육신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말았다. 결국 나는 그들을 쫓아냈다. 특히 김기준은 돈을 너무 밝혔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 이것을 욕심내는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슬픔으로 자신들을 찔렀도다』(딤전 6:10).


끝으로 내가 미국 영주권을 쓰레기통에 버린 후, 1992년에 빈털터리로 새롭게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님으로부터 받은 돈은 김포 고촌에 새로 지은 “교회 건물”(140억 원)과 “강화 교육관”(25억 원), 내가 머물고 있는 “쉼터”(5억 원, 미국 목사들 5명이 수년간 지원한 돈으로 부지를 매입한 것인데, 그중에서 럭크만 목사님은 수년간 매월 830달러 이상 보내 주셨다.) 등 170억 원에 달한다. 특히 고촌에 있는 교회 건물은 건축하는 데 140억 원이 들었지만, 나는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서 건축 헌금을 걷지 않고 완공했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하나님께서 이 땅에 허락하신 바른 말씀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은 1994년 4월 12일에 신구약 합본이 출간된 이래로 지금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판매되어 25만 권 넘게 보급되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히 4:12).


<한글킹제임스성경>과 개역성경을 한데 펼쳐 놓고 열심히 베껴 쓴 성경 도둑들은 왜 자기들이 그런 허접쓰레기 같은 저작을 성경이라고 내놓았는지 무어라 할 말이 없다. 특히 성경 도둑 정동수는 우리 성경을 표절한 가짜 목사다. 그런 자들이 성경 번역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궁금하다. 그들이 성경을 번역한 원고가 있는지 묻고 싶다. 강화에 있는 성경침례교회 교육관에는 “한글킹제임스성경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어서 바른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와서 성경 번역 원고와 성경 번역을 위한 연구 자료들, 연구 자료들을 기반으로 한 나의 박사 학위 논문, 초판 성경들, 세계 각국 언어로 올바르게 번역된 성경들을 둘러볼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영국의 유서 깊은 트리니테리안성경공회(Trinitarian Bible Society) 사역의 결과물로서, 그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 그 나라의 언어로 “표준원문”(Textus Receptus) 성경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 말씀보존학회는 처음 설립된 이래로 그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이 출간한 영어 원서들을 국내에 있는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계획 안에서 겸허히 순종하여 신실하게 섬긴 하나님의 종들에게 내려 주신 축복들이요 열매들이다. 할렐루야! BB [이번 호를 끝으로 “나의 간증” 연재가 종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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