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이송오 목사 설교 분류

예수께서 우시더라 [요한복음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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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06월호>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구절입니다. 사람은 자기 감정을 억제할 수 없을 때 울게 됩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은 남모르게 행한 선행이 아름다운 결과로 드러났을 때입니다. 그러기에 눈물은 순수한 감정의 발로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눈물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며』(사 25:8),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계 7:17; 21:4)고 말씀하셨습니다. 히스키야왕이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죽을 준비를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나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호소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보라, 내가 네 연수에 십오 년을 더해 주겠노라.』고 하셨습니다(사 38:5). 여러분도 진지하게 기도할 제목이 있다면, 또 하나님께 진실로 고하면 들으신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여러분이 눈물로 호소할 때에 주님께서 경청하실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묵묵히 주님을 희생적으로 섬기는 성도들의 기도, 눈물, 사랑을 다 알고 계십니다. 자기 희생을 감수하고 자기보다 더 불행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도와줄 때에 인간은 감동합니다. 이 일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베다니의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고서도 이틀을 더 기다리셨다가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요 11:11).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능력있는 그분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죽었을 때에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잠들었다고 표현하십니다. 왜냐하면 다시 일으켜 세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내가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가노라.』 하시고는 14절에서 자기 주위에 있는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나사로가 죽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5절에서 『내가 그곳에 있지 아니하였음을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왔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어서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죽음 뒤에는 심판이 있는 것을 인간들로 하여금 알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었더라면 마냥 살 것처럼 거드름 피우는 인간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라.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시켰다고 하셨으니 만물이 그의 아래 복종하였다고 말씀하실 때 만물을 그의 아래 복종시켰던 그분은 제외된 것이 분명하도다』(고전 15:26,27). 주님께서 죄의 결과로 온 사망을 이기셨을 때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시키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심판주이시며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또 이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되면 그때 "사망이 승리 속에 삼킨 바 되었느니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 15:54).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을 볼 때 인간은 울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들은 그 죽음을 비웃을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음부야,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고전 15:55)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라면 그 교인들에게 구원받았으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설교해야 합니다(롬 6:4,5). 성도들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왜 우셨는가?
1. 주님은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히 4:14-16).
예수님께서는 생애 동안 세 번 우셨습니다. 첫 번째는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거절함으로 인해서 예루살렘이 당하게 될 비극을 미리 보시고 우셨습니다(눅 19:4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후 예루살렘 외곽에서는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렸고 예루살렘은 약탈당했으며 무수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겟세마네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우셨습니다(히 5:7). 죄인에게 퍼부으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지나가게 해주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에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으실 이유가 없으셨지만 우리 때문에 그 진노의 잔을 받으셨고,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 잔을 받으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24). 세 번째로는 본문에서입니다.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죄로 인해 죽음을 맛봐야 함을 보시고 분개하고 슬퍼하실 수밖에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마귀들려 미친 자기 아들을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언제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언제까지 내가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그를 여기 내게로 데려오라."고 하시니라』(마 17:17). 본문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부활의 능력을 갖게 된다는데, 믿음도 없고 비뚤어진 세대가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은 채 계속해서 병든 자와 마귀들린 사람만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실행하시고 올라가셔야 하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고통을 언제까지 참아야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3:1은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에 두어야 합니다. 주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멜키세덱의 계열에 따른 것으로 레위 지파의 대제사장 직분보다 훨씬 우월하신 것입니다(히 7:11). 그분이 하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대제사장, 곧 하늘들로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계시므로, 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라』(히 4:14). "하나님의 아들 예수,"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의미합니다(요 1:1, 요일 1:1, 계 19:13). <킹제임스성경>이 우수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Word of God"(첫자 대문자, 한글킹제임스성경으로는 고딕체)으로 되어 있는 "말씀"이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말씀, 말씀들(히 4:12)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킹제임스성경>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시편 138:2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주님의 모든 이름 위에 높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괜히 <킹제임스성경>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 신학자들 중에서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사야 53:3에서 그는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종교적인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우리가 이 지상에서 겪고 아파하는 모든 슬픔과 고통과 아픔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그 심경을 우리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사 53:4-7)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믿음과 지식이 부족하여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왜 당장 해결해 주시지 않냐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가리키며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들은 진리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했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다른 삶을 예비해 놓으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예비하신 처소에 비하면 이 세상은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몸에서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원했던 것입니다(고후 5:8).

예수님은 왜 우셨는가?
II. 사람들이 예수님 자신을 부활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의 동네에 오셨을 때, 나사로의 장례는 이미 끝났고, 시체는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지나 악취까지 풍겼습니다. 나사로의 인생은 끝났고 그는 병으로 죽었습니다. 사람은 병으로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늙어서 죽고 사고와 재앙, 전쟁 등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죽습니다. 불확실한 인생에서 확실한 것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좀더 일찍, 좀더 늦게 죽는 것뿐입니다. 죽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것은 정통 유대교의 기본 교리입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부활의 교리는 명확하지도 않고 온전하지도 않아 마치 그림자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책에 기록된 교리를 실제로 자신에게 적용시키신 것이 본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이제 그 그림자가 걷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옛날 유대인들의 신앙 속에서 부활을 믿지 않고 입으로만 되뇌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두 여동생도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마리아는 "만일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믿음이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셨던 것입니다. 그 두 자매는 예수님이 부활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제한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확인하셨습니다.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 11:25,26)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부활에 대한 개념이 유대인들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면 주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주님을 소유했다는 말은 부활을 소유했다는 말이고 영생을 소유했다는 말입니다(요일 5:1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했다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구약에서조차 일어나지 않았던 어떤 일들이 그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데 곧 죄인의 죽었던 영이 살아남으로써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고,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게 되며, 부활의 소망을 지니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새벽부터 교회만 다니려 하지 말고, 또 돈만 갖다 내려고 하지 말고, 성경을 믿는다고 거짓말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그분을 소유하고 그분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 안으로 침례받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3,4). 주님의 현재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계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왜 우셨는가?
III. 예수님을 앞에 모시고서도 그들은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돌을 치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작 한다는 말이 『주여,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기에 지금은 악취가 나나이다.』였습니다(39절). 그녀는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시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아버지께서 항상 내게 들으시는 줄 내가 알았나이다. 이제 내가 말한 것은 여기 둘러서 있는 무리 때문이니, 그들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시더라.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음성으로 외치시기를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시니』(41-43절). 그랬더니 죽었던 자가 손발이 수의로 동여지고 얼굴이 수건으로 가려진 채 나왔습니다. 인류 역사 6천 년 동안 이런 기적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창조주가 부르면 송장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흙으로 지어진 우리의 몸은 96개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져서 살아 있는 동안에 흙을 갈아먹으며 살다가 죽은 후에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나사로는 흙으로 돌아가는 한 과정에 있었을 뿐입니다.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어떤 권세도 행하실 수 있습니다. 단 한 가지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산 혼이 되었습니다. 산 혼이 되었기에 그 혼에는 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혼이 되어 버린 인간의 의지를 마음대로 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기에 당연히 하나님께 순종할 줄 아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창 6:7).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마귀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마귀의 뜻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인간이 자기 의지로 주님을 찾고, 또 믿고 영접해야 만나 주시고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사람이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자기 의지의 표명입니다. 하나님께 결심을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아 주셨기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행위로는 이 믿음을 대체시킬 수 없습니다. 율법 시대에는 가능했지만 은혜 시대에는 불가능합니다(엡 2:8,9).
그때 예수님을 안다고 했던 사람들과 믿는다고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말했습니다(36절). 지금도 마찬가지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설교자들도 그들이 아는 것이라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모든 것을 다 감싸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이해해 주시고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땅에서 병 낫고 생명을 연장하는 일을 하나님의 일로 아는 자들도 있습니다(37절).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이 부활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이 믿지 않고 엉뚱한 것만을 가지고 아는 체했을 때, 예수님은 다시 속으로 신음하셨던 것입니다(33절).
만일 오늘날도 오순절 때처럼 다른 나라의 말로, 실제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표적들과 이적들이 일어났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은 믿음이 필요없게 되고, 성경을 치워 버리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내는 생활도 불필요하게 되어 그리스도인의 기준과 품격 전체가 변질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실제로 은사주의자들은 그렇게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기독교는 복음이 없는 종교로 전락하여 사람들은 타락한 이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판 기독교요, 한국식 기독교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조용한 조언을 하셨습니다(요 20:27,29). 진리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지금 당장 하나님의 통치 목적이 실현되고 있음을 보는 것과 같으며 또 영원한 구원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그렇게 알았다면 좋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다 믿음을 정립시켰을 때 성경의 모든 예언들이 곧 성취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그렇게 믿고 살아야 주님을 슬프시게 하지 않고 아프시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주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고 교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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