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이송오 목사 설교 분류

고난을 당하면 [베드로전서 4: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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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6월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믿는 사람들은 극소수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종교적인 사람들을 용납하고 그들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진리를 따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받는 박해를 싫어하기 때문에 ‘카멜레온처럼’ 행세합니다. 이들은 세상으로부터는 믿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지만, 정작 주님으로부터는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카멜레온 같은 교인들이 교회 안에 은신하고 있을 때, 교회는 힘을 잃게 되고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카인도 종교적인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예물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카인은 그의 아우 아벨을 죽였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지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또 초대 교회를 박해했었습니다. 로마카톨릭, 은사주의자들, 개신교회들, 심지어 여호와의 증인들, 몰몬교도들도 종교적이지만 성경적 진리로 그들을 잴 때, 그들이 주님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믿음에 위선과 가식이 섞여 있으면 그것은 이미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은 위선과 가식을 싫어하시고 용납하지 않으시기에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성별시키시고, 성도들 개개인을 교리의 오염으로부터 성별시키십니다. 그래도 믿음에 더러움이 남아 있어, 그 사람의 순수를 더럽힐 때 시련을 허락하시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생겨난 더러운 찌꺼기를 불태우시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제거시키시는 것입니다.
풀무와 용광로는 이들을 정화시키는 도구입니다.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고통이 있어야만 우리의 믿음이 깨끗이 정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도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같이 순수합니다(시 12:6,7). 그리스도인의 신앙, 즉 주님을 향한 믿음과 고백도 풀무에서 연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순수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 성막과 성전에서 제물을 태우던 불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예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종들에게만 박해를 허락하시어, 그 박해를 이기고 나올 때에 칭찬하시고 주님의 일들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아, 만일 내가 지금껏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박해를 받겠느냐? 그랬더라면 십자가의 거침이 그쳤으리라』(갈 5:11).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딤후 3:12). 이처럼 정상적으로 믿음의 생활을 하려고 하면 사탄의 박해와 진리를 대적하는 무리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를 가르치려 할 때 박해가 닥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탄의 박해가 없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진리로 주님을 섬기려면
I. 박해를 당하면 기뻐하라(12,13절).
러시아의 한 조그마한 시골 침례교회의 목사였던 게오르기 빈스(Georgi Vins)는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8년을 보냈습니다. 빈스(Vins) 목사는 야외 변소 옆 허술한 오두막 같은 곳에서 기거했는데 콘크리트 바닥에서 자며, 보리로 만든 차와 수프로 겨우 연명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이고 누구에게도 연락조차 할 수 없는 깊은 분지에 갖혀 있으면서 그는 그곳에서 자기가 겪은 일들을 일기로 썼습니다. 그 일기장의 제목은 <감옥으로부터의 약속, Testament from prison>이었습니다.
당시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죄수들이 쓴 일기들은 수용소 내의 비인간적인 학대와 잔인함, 극한 상황을 써서 외부로 내보내어 그곳의 상황들을 알리는 솔제니친의 자서전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빈스(Vins) 목사는 그곳의 실제 상황과는 반대로 적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 겨울의 아름다움, 아내로부터 받은 편지의 즐거움, 하나님과 더 가까운 교제 가운데서 나누는 대화 등을 기록했습니다. 그 책의 제목만 없었다면 독자들은 어떤 자유로운 사람이 화려한 집에서 살면서 흑해의 노을을 바라보고 쓴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생활을 8년 동안 하자, 그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미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의 죄명은 성경을 믿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죄가 되는 곳이 세상입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은 A.D. 155년 스머나에서 화형당했습니다. 스머나의 총독이 와서 믿음을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을 때, 그는 “86년간 내가 그분을 섬기는 동안 그분은 나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으셨는데, 어찌 내가 지금에 와서 그분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했습니다. 스머나 총독이 그를 맹수들에게 던져 먹히게 하겠다고 위협하자, 폴리캅은 맹수들을 어서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또 화형시키겠다고 위협하자, “당신이 나를 한순간 동안 불태우겠다고 위협하지만, 당신은 불경건한 자들을 위해 간수한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대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으려고 지상생명을 내놓은 수많은 순교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에게 진리로 주님을 섬기는 믿음이 없었고, 자기를 위해 살려는 욕망만 있었다면 누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렸겠습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시겠습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순교의 기회를 주셨겠습니까? 그 사람이 고난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종교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위해 당하는 시련을 왜 겪게 하시겠습니까? 만일 그랬더라면 그런 시련들이 극복되어 영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수치로 돌아올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일을 주님의 종이 아닌 사람들에게 위탁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승천하시자 사도들이 능력을 받아 거리에서 설교하며 때로는 기적들을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은사들을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 산헤드린 사람들이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명했지만,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도다.』(행 5:29)라고 말하면서, 『너희가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살리셨느니라. 이분을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높이셔서 통치자와 구주가 되게 하셨으니 이는 이스라엘에 회개와 죄사함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외쳤습니다(행 5:30,31).
오늘날 이 땅에도 이같이 외치는 성도들은 우리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일을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기에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는 박해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진리와 무관하게 살았다면 받을 이유가 없는 시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친 시련을 잘 견뎌내면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부인한 사람에게는 박해받을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로 주님을 섬기려면
Ⅱ. 너희의 편에서는 영광을 받으시느니라(14절).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시고, 무에서 유를 생성하신, 아쉬울 것이 없으신, 우주의 모든 보화를 가지신 분께서 영광을 받으시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은총으로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임이라. 내가 너를 강건하게 하리라. 정녕, 내가 너를 도우리라. 정녕, 내가 내 의의 오른손으로 너를 높이리라. 보라, 네게 노했던 모든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 그들은 하찮은 것같이 될 것이요, 너와 싸우는 자들은 망하리라. 네가 너와 싸우는 그들을 찾을 것이나 그들을 만나지 못하리라. 너를 대적하여 전쟁하는 그들은 하찮은 것같이 될 것이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리라. 이는 나 주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말하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라』(사 41:10-13; 43:1-7).
주님의 눈에는 자기 자녀가 보석이며, 그것도 진귀한 보석이기에 눈동자처럼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로서 유대인들과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너희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유대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거듭나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가 되는데 구약의 유대인 신분과는 다른 차원의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 천국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영적인 나라가 더 크고 더 넓고 더 깊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욕을 당하면 복이 있느니라』(벧전 4:14). 진리를 대적하고, 오염시키고, 변질시키는 자들이 널려 있는 상황에서, 주님께서 누구를 부르시어 내보내시며 말씀을 보존하게 하시고, 진리를 전파하게 하시겠습니까? 칼멜 산에서 엘리야 선지자를 대적했던 바알의 선지자들은 450명이었고, 아세라의 선지자들은 400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엘리야 선지자는 승리했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챔피언이었던 것입니다.
마귀가 그의 종들을 풀어서 갖가지 비성경적 교리들을 실행하며, 방언과 신유와 축사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누구를 보내어 이 상황을 저지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보내실 챔피언감이 없다면 누가 최후의 보루를 지켜낼 것입니까? 내보낼 챔피언이 소수일 때 전세가 불리한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싸움을 지켜보시는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욕을 당하면 복이 있느니라. 이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위에서 안식하고 계시기 때문이니라』(벧전 4:14).
우리가 진리를 대적하고, 변질시키는 자들을 대항하여 싸움을 펼치고 있는 동안,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신뢰하시기에 마음 편하게 안식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욕을 당하지 않고 있다면 성령님은 안식하고 계시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과 세상의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따라가고, 세상과 동조하는 자들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면서 교회라고 소개해도 그들의 교회는 성경적 신약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진리를 지켜낼 능력이 없는 자들이 나서서 비진리와 싸운다고 했을 때 성령님께서 과연 편히 쉬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진리 때문에 어떤 형태의 고난을 받을 때마다 주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에서 무조건 벗어나려고만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이겨내서 승리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왜 우주의 권세를 지니신 주님께서 독재자들, 무지한 교황과 카톨릭 세력들, 군국주의자들, 무신론자들, 공산주의자들, 이슬람에게 정복당하도록 허락하시고, 죽음에까지 이르도록 모르는 체하시는 것입니까? 다소 역설적일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성도들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주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이로다』(시 116:15).
로마 제국은 일 년에 한 번 황제의 동상 앞에 향을 피우면서 “시저는 나의 주님”이라고 말하게 했습니다. 그것을 거부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손가락으로 땅이나 벽에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쓰게 한 뒤에 침을 뱉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거부하면 투옥시키고, 고문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세상은 진리를 위해 고난받지 않는 것을 영광이라고 여기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믿음의 시련이 없다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영광의 보증이 되시겠습니까?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써 단련될지라도 없어져 버리는 금보다 훨씬 더 귀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그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며, 지금도 그를 보지 못하나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이 영광으로 가득 찬 기쁨으로 즐거워하나니 이는 너희 믿음의 결과, 곧 너희 혼들의 구원을 받음이니라』(벧전 1:7-9).

진리로 주님을 섬기려면
Ⅲ.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라(15,16절).
많은 세상 사람들, 특히 이름을 낸 사람들이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본문 15절에서도 살인자, 도둑, 행악자,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는 자(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업무를 방해했거나, 위증한 사람들) 등 그런 일들을 하다가 고난을 당하게 되면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실족시키게 됩니다. 세상일과 연계해서 죄짓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수치입니다. 간증을 잃어버리고, 그의 말을 신뢰할 사람이 없으며, 성도들 간에 교제가 단절되고, 교회를 욕되게 하며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진리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게 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십니다. 한 성도의 삶을 통해서 진리의 빛이 발산되지 못한 원인은, 그가 주님을 위해서 당할지도 모르는 고난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위주로 생활했던 사람은 주님에 관해서 할 말이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해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인이라고 자랑하며 뽐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믿는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구령 간증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기 상사나 거친 사람을 구령한 경우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으려는 것을 의중에 둔 사람에게, 예수님은 늘 제2선으로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9:23).

결론적으로
페르시아의 코레스왕이 한 전투에서 어느 한 나라의 치리자와 그의 가족을 사로잡았습니다. 코레스왕은 왕 자신이 치리자를 풀어 줄 때에 무엇을 줄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로잡힌 치리자는 자신을 풀어 주면 자신이 소유한 왕국의 절반을, 자녀들을 풀어 주면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아내를 풀어 주면 자기 자신을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감동한 코레스왕은 그들 모두를 풀어 줬습니다. 그 치리자의 가족이 집으로 돌아온 후에 그 치리자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코레스왕은 멋진 사람이지 않습니까?” 사랑의 눈으로 남편을 쳐다본 아내는, “난 당신을 몰랐드랬어요. 나는 나를 위해 자신을 주겠다고 말한 당신에게만 내 눈을 집중하며 살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그러한 성도들을 찾고 싶어하시고, 만나고 싶어하시고, 교제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피하지 않고 이겨낸 성도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BB

여기에 실린 “이 달의 설교”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www.kjv1611.or.kr)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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