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이송오 목사 설교 분류

한 음성을 들었는데 (사도행전 26: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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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5월호>

사도 바울은 특이한 방법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의 완전한 방식에 따라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고, 율법을 준수하는 데 특출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열성이 대단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고 그들을 처벌하는 데 앞장섰던 열성분자였습니다. 심지어는 스테판을 돌로 쳐 죽일 때에도 그에 동조했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났던 것은 시리아 다마스커스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가는 길에 하늘로부터 나는 주의 음성을 들었을 때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걷어차는 것이 네게 고통이라.』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여러분은 주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었습니까? 주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들려 주십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가 하는 이 간증이 본문 말씀 외에 9장과 22장에도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가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간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끼리 만나면 서로 간에 구원의 간증을 나누게 되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사입니다. 구원 간증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교인에 불과합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양우리에 개나 돼지, 이리, 족제비, 여우나 박쥐가 들어오는 것과 같아서 양무리들이 편안하지 않아 불안해 하며 괴로워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동물들이 뒤섞인 모임은 양우리가 아니라 동물원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전에서 정결례를 마치고 나오는데 군중들이 바울과 그와 동행한 트로피모를 보고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왔다고 소리지르며 해치려고 했습니다. 그때 로마군 사령관의 보호를 받고서 군중을 향해 이 간증을 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산헤드린 앞에서 설교했던 것입니다. 본문은 카이사랴에서 2년 동안 감금되어 있었을 때 페스토와 아그립파왕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주님을 만나게 되었는가를 간증했던 사건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어디에서든, 누구 앞에서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구원 간증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떻게 태어났고,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인들, 감리교인들, 성결교인들, 순복음교인들에게 언제 거듭났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항상 “그 날짜와 시간을 꼭 말해야 되느냐?”고 반문합니다. 거듭났으면 언제, 어떻게 거듭났다고 말하면 그만인데, 많은 사람들이 교회만 다녔지 거듭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간증이 없습니다. 자기의 육신적 생일은 알면서도 영적 생일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만 열심히 다니면 봐 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은 종교인들이 갖는 자기 생각이요 바람일 뿐입니다. 구원 간증이 없는 사람들을 교회 회원으로 간주해 온 목사들은 대부분 구원받지 않은 목사들입니다. 그들을 데리고 교회놀이를 하다가 그 교인들이 죽으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지옥에 보내지 않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셔서 인간들에게 구원받으라고 복음을 남겨 주셨는데, 엉뚱한 짓을 하면서 교회놀이나 하고 있다면 그런 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모든 비성경적 교리와 실행은 이들 거듭나지 않은 자들에게서 나옵니다. 로마카톨릭,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들, 안식교인들, 통일교인들 중에는 구원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 구원받았다면 그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간증이 있는가?
Ⅰ.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시기 위해 부르셨다(13-18절).
부르심의 선명한 의의와 목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행 22:14,15). 요한복음 15:16은 이 점을 더욱 명쾌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선택하여 임명하신 대사입니다(고후 5:20). 하나님께서는 인간 스스로 임명한 대사는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일꾼이 없다 해도 세상에서 마귀의 일꾼들을 불러다 쓰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자녀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화해의 대사, 곧 복음 전파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들어쓰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의로우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이 목적을 위하여 너에게 나타났음이니 네가 본 것과 내가 너에게 나타나게 될 일에 대하여 너를 일꾼과 증인으로 삼고자 함이라』(행 26:16). 이런 말씀은 비단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됩니다. 구원받고 난 후 헌신하여 신실하게 주님을 섬겼던 사람들에 대하여 누군가가 글을 써서 다음 세대에 알려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이름을 잘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실하게 주님을 섬겼던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을 회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구원받지 않았거나, 구원받았다 해도 성경대로 주님을 섬기지 않았다면 그의 이름을 알리는 것은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 됩니다.
영국의 한 제화소에 갓 들어온 존 와르(John Warr)라는 견습사원이 있었는데, 그리스도인 청년이었습니다. 얼마 후 새로운 사원이 들어오자 존은 그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거부당했습니다. 존은 계속 그 신입사원에 대해 복음을 전해야 하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신입사원이 가짜 동전 한 개를 진짜 돈과 바꿔치기 하려다가 존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무안한 나머지 그는 자기를 도와 줄 수 없냐며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존은 그러겠다고 말하고 기회를 잡아 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날 도둑질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그 신입사원의 이름은 인도 선교사로 헌신했던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였습니다.
스코필드 주석성경을 만든 C.I. 스코필드는 주정뱅이 변호사였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성경을 명쾌히 해석한 세대적 진리의 주석서가 나왔겠으며 성경을 나누어 공부하는 방법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클라렌스 라킨은 평범한 제도사였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세대적 진리>를 써서 성경을 나누어서 공부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제시했겠습니까? 특히 그의 다니엘 주석서는 역사적으로 연대를 짚어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일일이 대조하여 성경의 예언이 빈틈없이 성취된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나이트클럽 드럼 연주자, 방송국 디스크 자키, 해수욕장 구조요원을 했던 피터 럭크만 목사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세계 전역에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겠습니까?
한 사람의 생애가 주님께 드려져서 쓰임받을 때까지는 엄청난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통해 자신의 사람을 빚으셔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를 위해 생을 보람있게 쓰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나서도 자기의 인생을 휴지처럼 만들어 버려서 상도, 면류관도, 유업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간증이 있는가?
Ⅱ.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했다(19-21절).
주님은 성도 개개인에게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도는 주님의 부르심과 연관되어 자기에게 조성된 환경을 예리하게 주시해야 합니다. 무엇에 쓰실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들이 결정할 일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중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나 연극을 만드는 감독들이 배우를 선정하여 배역을 맡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헌신입니다(롬 12:1,2, 고전 6:19,20; 7:23). 헌신을 하면 그 때부터 하나님께서 뜻을 보여 주십니다.
바울은 하늘에서 비치는 빛을 보고 눈이 멀어 삼 일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였습니다(행 9:9). 한 사람의 생애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이처럼 굉장한 사건입니다. 구원받고 나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에게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 일보다 더 흥분되고 격정적인 일이 있겠습니까? 그 사람의 생애는 이제 주님에 의하여 주관되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그분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일이 두려운 것입니까? 주님은 그때 사랑하는 다른 종 아나니아를 시켜 바울을 찾아가 보라고 하십니다. 바울이 환상 속에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는 그럴 수 없다고 이의를 달았지만 『그러나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길을 가라, 이는 그가 이방인들과 왕들과 또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내가 선택한 그릇임이라. 그가 나의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큰 일들로 고통을 받을 것인가를 내가 그에게 보여 주겠노라.”』고 하셨습니다(행 9:15,16). 자기의 안녕을 위해서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만사형통, 만병통치한다고 떠들어대는 사기꾼들은 성경을 전혀 모르는 자들입니다(행 20:24).
사도 바울은 회심한 후에 먼저 열두 제자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시내 산)로 가서 3년간 공부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습니다(갈 1:16-19).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이 걷는 바른 행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게 됩니다. 공부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생애는 이처럼 정상적인 과정과 순서를 밟는 것입니다. 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 혼, 영을 다루겠다고 나서는 것은, 마치 수술할 줄 모르는 의사가 메스를 들고서 배를 가르려고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런 무서운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의사는 몸을 다루고, 사역자는 몸, 혼, 영을 다룹니다. 사역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영력을 받지 않으면 사역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것처럼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섬김과 순종의 본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면서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가 진리를 따라 실행하려고 했을 때, 유대교에 있는 자들, 우상 숭배자들이 그에게 끼친 박해와 해악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당함에 있어서 사도 바울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고후 11:22-30).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딤후 3:12).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시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요 8:45). 그 대신 거짓말을 믿고, 거짓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거듭나기 전에는 진리를 대적하는 마귀의 편에 섰었지만, 이제는 진리를 증거하는 주님의 편에 서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알고 믿으면 받을 수 있는 복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①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흑암에서 광명으로 옮겨오는 것입니다. 즉 진리에 눈뜨게 하고 ②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고 ③ 그들로 죄사함을 받게 하며 ④ 구원받은 사람들로 바른 섬김을 통해 유업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목적 없는 부르심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실 때에, 그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간증이 있는가?
Ⅲ.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줍니다(22,23절).
종교적인 열성은 진리를 따라 주님을 섬기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하지만 바울이 종교행위에 열심을 내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깨달았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둘째, 주님은 자기 백성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고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만일 이 두 가지를 깨닫지 못했더라면 사도 바울의 행위는 또 다른 종교행위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이 두 가지를 무시하고 교회를 세우고, 섬김을 요구하는 것은 모두 실격이요, 하나님과 무관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가 죽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알고 믿기에 전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우리의 믿음 또한 헛것이라고 외쳤습니다(고전 15:12-19).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영이 살아나게 되고, 혼이 거듭나서, 지금까지 그 사람의 생애에서 잘못 박혔던 종교심이 사라지고 진리가 그 자리를 메우게 됩니다. 이 일은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고, 듣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부활의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요일 5:12, 요 3:16,36).
이 세상을 잘 살고, 잘못 살고의 차이는 돈을 얼마나 많이 모았느냐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의 일을 얼마나 잘 했는가도 아니며, 오직 진리를 따라 살았는가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을 14권이나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셔서 그의 생을 값지게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지중해 연안 국가들, 소아시아, 유럽, 스페인까지 다니며 부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알고 난 후 성경대로 가장 값진 인생을 살다가, 부활의 소망을 지니고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이름을 매일같이 회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왜 위대합니까? 그도 열성을 가지고 유대교를 섬겼던 종교인이었습니다. 공부도 많이 했고, 지식에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을 역설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진리에 눈뜨자 율법으로 터득한 모든 지식을 배설물같이 여겼습니다(빌 3:8). 진리의 지식을 붙들자 주님은 그에게 큰 조명을 주시어,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교회 시대 2천 년 동안 가장 훌륭한 성도의 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는 서슴지 않고 자기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자기를 따르라고 했습니다(고전 11:1).
죄인이 주님의 음성을 듣기까지는 자신이 인생을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르며 삽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그분의 종들을 통해 주님을 증거하여 말씀으로 그분의 음성을 듣게 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주님께 쓰임받는 증인이 되며 사역의 일꾼이 됩니다. 자기의 생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BB

여기에 실린 “이 달의 설교”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www.kjv1611.or.kr)와 인터넷 뉴스 바이블파워(www.biblepower.co.kr)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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