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이송오 목사 설교 분류

주의 만찬 [고린도전서 11: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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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12월호>

오늘 아침 우리는 주의 만찬식을 거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약 교회에 허락하신 의식은 침례식과 주의 만찬식 두 가지뿐입니다. 오늘날 제도화된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등 잡다한 의식들을 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로 사신 교회에 주신 의식은 침례식과 주의 만찬식뿐입니다. 침례는 죄를 씻는 의식이 아니라, 물은 다만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벧전 3:21).
주의 만찬 역시 주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또 빵을 가지고 감사를 드린 후, 떼어 그들에게 주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하시고 저녁 식사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나의 피로 된 새 언약이니,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것이라』(눅 22:19,20).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정확하기 때문에 인간이 첨가하고 삭제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또 내가 줄 이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줄 나의 살이라.”고 하시니라. 그때 유대인들이 자기들끼리 다투어 말하기를 “어떻게 이 사람이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가 있겠느냐?”고 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 이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임이라』(요 6: 51-55).
예수님의 살이 참된 양식이고 그 흘리신 피가 참된 음료라고 하셨으면 가짜가 있을 것인데, 어떤 것이 가짜 양식이고 가짜 음료입니까? 육신을 살리는 양식인 만나, 광야에서 마셨던 물입니다. 만나를 먹고, 그 물을 마셨던 사람들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에 비교했을 때 그 만나와 물은 영생을 얻게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못된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그 만나와 반석에서 나온 그 물이 영생을 얻게 해줄 수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 역시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 너희 조상이 만나를 먹고 죽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이 빵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7, 58).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만났던 여인도 물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이 성경 구절을 해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로마카톨릭은 엉뚱하게 과자 부스러기를 예수님의 살로 여기고, 발효된 포도주를 피로 여겨서 매주 마다 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대는 서커스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사제들의 이름으로 별 희한한 짓을 하는 자들도 있고, 목사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 역시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카톨릭처럼 해석한다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씹어먹었다는 것인데 말이 됩니까? 여기서 “먹다”라는 말은 참예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주의 만찬에 참예하신 것입니다. 구원받고 영생을 소유한 여러분은 주의 만찬에 참예하는 특권을 가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영생을 얻는 방법은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서가 아니라 그분을 믿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이 의식에서 영적 몸인 빵을 먹고, 영적 음료인 포도주를 마셔서 구원받고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려 해도 불가능합니다. 그분은 지금 셋째 하늘에 계시고, 그분의 피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갈보리 십자가에서 다 쏟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나 교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 되는데 마귀짓을 하면서 종교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로마가톨릭이고 그와 유사한 교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면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너희가 본다면 어찌하려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2,63)고 해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떤 피도 마시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율법 이전에도(창 9:4), 율법 시대에도(레 3:17, 신 12:23), 그리고 율법 이후에도(행 15:29) 그랬습니다. 로마카톨릭은 예수님의 피라고 하면서 발효된 술을 마시고 흔들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성도가 주의 만찬식을 성경대로 잘 기념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주의 만찬의 참뜻은
I.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쪼개진 나의 몸이니 받아먹으라고 했습니다(23,24절).
<킹제임스성경>을 제외한 모든 변개된 성서들은 “쪼개진”이란 말과 “받아먹으라”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 쪼개진 몸이기 때문에 나누어 주실 수가 있습니다. 쪼개지지 않은 몸을 주시면서 받아먹으라고 하셨다면 누군가 한 사람이 차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쪼개진 몸과 살을 통하여 혼을 나누어 주신 것인데 쪼개지지 않은 살은 신학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합니다.『우리가 축복하는 이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의 교제가 아니며 우리가 떼는 이 빵은 그리스도의 몸의 교제가 아니냐? 이는 우리 많은 사람이 한 빵이요, 한 몸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모두 그 한 빵에 참여하기 때문이라』(고전 10:16,17).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하시는 것은 참된 양식을 먹고 영생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생을 얻으려면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죽으신 것을 알고 그분을 믿고 내 안으로 영접해 드려야 합니다.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죄인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겠다고 고백하는 그 순간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들어가서 거처를 정하시는데, 그 짧은 순간에 죽어 있던 그 사람의 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영이 살아났기 때문에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들어가서 거처를 정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기분으로나 머리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겠다고 했다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은 채 구원받은 것처럼 기분으로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아무 열매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온 인류를 죄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내어주셨는데, 만일 인류가 다른 방법으로 죄의 저주에서 피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인류의 구세주가 못되고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기독교 역시 종교들 중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행 4:1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기 싫어하는 마귀의 자손들은 계속해서 성경을 믿지 않고, 아무 종교나 하나 붙들고 살려고 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사후의 생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전혀 모르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길이 있어도 그 끝은 죽음의 길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지 않는 길을 따르게 되면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말씀하실 때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 너희 조상이 만나를 먹고 죽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이 빵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 6:5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언제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는가 여러분의 생애를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아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았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 되는 영을 받았으므로 그에 따라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너희가 아들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시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니라』(갈 4:6,7). 이 호칭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결행하시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 호칭입니다(막 14:36). 마귀의 자녀인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죄인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살을 뜯어먹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새벽기도회에 다녔다고 해서, 재직을 맡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빵조각을 먹어서는 더더욱 안 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의 참뜻은
II. 이 잔은 나의 피로 된 새 언약이라(25절).
이 새 언약이 있기 전에 첫 언약이 있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죄한 것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그 영원한 유업의 약속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 유언이 있는 곳에는 유언한 자의 죽음도 필연코 따라와야 하리니 유언은 사람이 죽은 후에야 효력이 있으며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전혀 효력이 없느니라』(히 9:15-17). 예수님의 피로 맺은 언약이 새 언약이라면 첫 언약 때 흘려진 피는 누구의 피였습니까? 첫 언약 때 흘려진 피는 동물의 피였습니다. 『그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드려진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물과 주홍색 양털과 우슬초를 가져다가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였느니라』(히 9:18-20).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언약으로,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을 때 송아지와 염소의 피로 죄사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구약(Old Testament)이라고 하는데, 율법 시대에 속한 사람들은 이 첫 언약에 근거하여 동물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짐승의 피로 맺은 첫 언약은 완전하지도, 영원하지도 못해서 죄가 깨끗게 되지도 못하고 죄를 덮어두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대제사장은 매년 속죄일에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속해야 했습니다. 『이제 이런 것들이 그렇게 마련되어 있어서 제사장들이 언제나 첫째 성막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수행하나 둘째 성막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혼자 들어가되 피 없이는 들어가지 아니했으니, 이 피는 자기 자신과 백성들의 잘못들을 위해서 드렸던 것이라. 성령께서 이것을 통해 보여 주시는 것은 첫째 성막이 서 있는 동안에도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라. 그것은 현재를 위한 모형이었으니, 그에 따라 예물들과 희생제물들을 드려도 양심에 관해서는 섬긴 자를 온전케 할 수 없었도다. 이 예배는 오직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여러 가지 씻는 것과 육신의 율례들에 근거한 것으로 이것들은 개혁의 때까지만 부과된 것이로다』(히 9:6-10). 그래서 새 언약이 필요했습니다. 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언약이기에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를 가져온 것입니다. 미국 근본주의 침례교회 목사들은, 구약성도들은 십자가를 앞으로 바라보고 믿었고, 신약성도들은 십자가를 뒤로 보고 믿어 구원을 받는다고 헛소리를 하는데, 그들은 새 언약과 첫 언약을 구별할 줄 모릅니다.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복이 있는 성도들입니다. 나는 성경침례교회 담임목사가 된 것을 영예로, 또 복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 가짜 목사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모조품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아무것도 가르쳐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인한 새 언약 시대, 즉 신약 시대가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복음을 믿으면 거듭나서 영원히 보장받는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 잔은 나의 피로 된 새 언약이라』(25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믿는 모든 자들이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새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만찬을 통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지만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인류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 그분은 먼저 인자가 되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 되셔야만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을 수 있고, 또 죄인인 인간의 손을 잡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주의 만찬의 참뜻은
III.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라(26절).
만일 어떤 성도라는 사람이 주님이 다시 오심을 믿지 않은 채 그분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있다면 그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독하는 일들이란 주님의 다시 오심을 믿지 않으면서 교회를 세우고, 설교하고,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으면서 교회에 다니거나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의 위선적인 행위들입니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믿음을 점검하려면 첫째, 주님이 오실 때 우리가 휴거된다고 했는데 내가 그것을 믿는가(살전 4:16,17), 둘째, 지금 죽으면 천사들의 인도함을 받아 셋째 하늘 낙원에 가서 주님을 만난다는 것을 믿는가, 셋째, 자신이 죽은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재림할 때 새 몸을 입는다는 것을 확신하며 사는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슬렘이나 불교, 힌두교, 유교를 믿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을 믿지 못한다면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주의 만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시기까지 선포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성도는 주의 만찬식을 성경적으로 거행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의미 없는 만찬식을 행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몸의 훈련은 유익이 적지만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하여 현재와 미래에 생명의 약속을 소유하게 하느니라』(딤전 4:8). 경건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말합니다. 경건은 현재와 미래의 생명의 약속을 소유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마귀가 있다는 것을 알며, 선과 악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현재의 생과 다음의 생이 있는 것도 믿을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생각해서 믿고 누가 말해 주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죽어가는 사람이 자기 교회 목사를 불렀습니다. 그 목사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제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도성을 향해 가고 있는데 큰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고, 높고 험해서 돌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 산을 힘겹게 오르다가 미끄러져 굴러 떨어졌습니다. 다시 올라갈 기력도 없어 난감했고 절망했지만 어떤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피가 한 방울 떨어지더니 큰 산이 햇볕에 이슬이 녹듯 사라지니 저편에 찬란한 도성이 보였습니다.” 거기까지 얘기를 하자 그 목사가 말했습니다. “그 꿈이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그 꿈을 꾼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 산은 나의 죄를 드러냈고, 산을 녹였던 그 핏방울은 예수님의 고귀한 피였습니다. 이제 나와 그 도성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늘의 도성이 저기 보입니다. 이제 나는 그 도성으로 들어가는 진주문을 막 통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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