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이송오 목사 설교 분류

사랑의 빚을 갚으라 (로마서 1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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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05월호>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제거하시기 위한 것이기에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빚쟁이입니다. 특히 십자가 이후로 태어난 사람들, 현재 이 지상에 살고 있는 약 60억의 사람들, 앞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태어날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부처나 힌두교나 마호메트, 그리고 교황들에게 빚진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진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교회에 다닙니다. 카톨릭에서는 사제들이 나무 십자가를 가지고 다니며 마귀를 쫓는 도구로 쓰고, 목에 걸고 다니기도 하고,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을 묻고 그 위에 십자가를 세우기도 합니다. 개신교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모형이나 그림을 걸어 놓고, 또 거기에 절하는 풍습으로 그 의미를 훼손시키자, 십자가에 대한 거부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 인식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교회에서 양육 받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8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에까지 순종하셨으니, 십자가의 죽음에까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로 인하여 세상이 나에게 십자가에 못박히고 나도 세상에게 그러하니라』(갈 6:14).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십자가에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의 만찬을 행함으로써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듯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인류의 죄를 위해 못박히신 십자가를 봄으로써 주님의 죽으심을 상기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자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인간이 손으로 쓴 법령을 지워 버리셨고, 십자가로 못박아 없애 버리셨으며, 십자가로 그것을 이기시고, 그 대신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주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막 12:30,31). 현대 교회들의 무지는 그 둘을 바꿔서 행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백해야 할 죄는 육신적인 죄들도 있겠지만, 주님을 첫째로 사랑하지 않은 죄, 온전히 순종하지 않은 죄일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주님께 사랑의 빚을 졌으므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그 빚을 갚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사랑을 실천하라
Ⅰ. 사랑은 자기 희생에서 시작됩니다(8절).
주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3).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고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이 왜 어려운 것입니까?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희생을 꺼리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부인하지도 않고 자기 십자가도 지지 않으면서 따르려는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거짓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제자라고 간주한 사람들은 도둑이고 강도들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도둑질을 하면서도 주님의 일을 한다고 거짓되이 행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시키셨지만, 그 대가로 우리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이렇게 했으니 너희도 이렇게 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나의 계명은 이것이니,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였습니다(요 15:12).
세상의 종교 제도는 사랑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한다 해도 사람의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없으며 결국 그들은 불못에 던져집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효용을 얻을 수 없습니다. 네 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교황들을 위해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지만, 막상 교황들은 손가락 하나에서도 피흘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설령 피흘려 죽었어도 죽은 개만큼 무가치했을 것입니다. 그 전쟁은 카톨릭과 모슬렘의 전쟁이었는데, 그들이 그리스도인들과 모슬렘의 전쟁으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암흑 시대에 로마카톨릭이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였기 때문에 자위적인 입장에서 방어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정당방위는 살인이 아닙니다. 전투에서 사람을 죽인 것은 살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지도 않고 모함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피를 흘리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의 괴수 레닌도 수많은 국민들의 피를 요구했지만, 그는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었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는 망한다고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잠 19:9). 강요에 의한 사랑은 굴종을 요구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굴종을 요구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피로 믿는 우리를 의롭게 해주시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는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으며 또 하나님을 아느니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에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지느니라(요일 4:7-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사랑의 계명을 먼저 주지 않으시고 십계명을 먼저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한 복음이 없었기에 거듭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이기적이고, 자기를 첫째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자동적으로 자기 희생적이 됩니까? 그리스도인들도 성경적 기준을 따르지 않으면 구원받았어도 여전히 이기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성경은 육신적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희생을 부인하고 여전히 이기적으로 살면서도 그리스도인인 체하는 사람은 자기가 주님께 빚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삽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주님께 최소한의 빚을 갚는 일입니다. 먼저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째 계명입니다. 사랑을 배우려면 주님께로 가야만 합니다. 죽어서 우상이 되어 버린 자들은 자비도 은혜도 사랑도 실행할 수 없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이 그것들을 거짓되이 덮어 씌워 줄 뿐입니다. 그들은 헛짓하고 살다가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사랑을 실천하라
Ⅱ.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9절).
이웃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성도들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나서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구세군 자선냄비를 운영하는 구세군 교인들은 자기 이웃 구세군들을 사랑하고 남아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까? 아이티, 인도네시아, 칠레에 성금을 낸 사람들은 자기 가족, 부모, 형제, 이 땅의 불쌍한 사람들에게 다 베풀고 남아서 줍니까?
우리 성경침례교회는 기도제목을 만들어 놓고 기도합니다. 다른 교회들은 모두 다 주보를 만들어서 돈낸 사람들 이름을 적어 놓고 안 낸 사람들에게 은연중에 돈을 내라고 강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성도들의 가정 안정, 질병 회복, 군대에 간 형제들, 선교사들, 지역 교회들, 거리 설교자들과 구령자들, 교회의 필요, 교회의 사역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 외에도 성도들끼리 모여 자기들의 기도 제목을 내놓고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수많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기도하는 일에 게으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수요기도회입니다.
자기 이웃을 속이고 이득을 취하는 사람은 사랑을 못 배운 사람이기에 교제권에서 배제됩니다. 그런 행위는 사랑을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능한 한 빚을 져서는 안 됩니다. 허드슨 테일러나 찰스 스펄전은 빚을 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럭크만 목사님도 빚을 지지 않았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빚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능하면 자기 이웃에게 빚을 지지 않도록 생활 규범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지체들을, 자기 자녀들을 홀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기도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셨고,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십계명에서는 안식일이 없습니다. 본문에도 없고 마태복음 19:18, 마가복음 10:19, 누가복음 18:20에도 없습니다. 마가복음 10:19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대인 관원에게 사랑이 십계명보다 더 우위임을 말씀하시기 위해 인용하신 것이고, 본문에서는 십계명과 사랑을 비교하여 사랑이 더 우위임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실수로 안식일을 빠뜨리셨습니까?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은 표적입니다(출 31:13, 겔 20:12,22, 골 2:14-19).
십계명을 지키는 데는 자기 희생보다는 규례 준수가 먼저입니다. 십계명을 준수하려면 내적 요소가 아니더라도 외적 격식만 잘 지키면 가능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사람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했으면 뭔가 마음에 남게 되지만, 사랑하지 않은 채 주고 받았으면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인 줄 알고 살았던 사람들은 결국 실망하게 되고, 사랑했던 쪽만 손해를 본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보고 사랑하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의 피값으로 사 주신 거듭난 성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아들이지도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피로 사신 성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사랑을 받으십니다. 자기 가족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이웃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해외 선교사로 나갈 수 있으며, 그런 자가 선교사라며 세계를 주름잡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모두 위선자들입니다. 자기 희생을 거부하고 여전히 이기적인 삶을 살면서도 그리스도인인 체하는 사람은 자기가 주님께 빚진 사람인 것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사랑을 실천하라
Ⅲ.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0절)
생명의 지침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죄인들은 그분의 원수였던 것입니다(롬 5:8-10). 그분이 하나님이셨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하나님께서 선정하신 제물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실천하셨던 그 일을 재현해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주님의 이런 요구는 당연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 아님에도 우리에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요구하셨다면 그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외에 우리들에게 사랑을 강요할 수 있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만이 자격 있으신 것입니다. 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고, 인간적인 성향으로는 할 수도 없으며, 육신적으로 하는 것은 사랑도 아니기에 성경은 우리들에게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갈 2:20).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감지케 하시려고 인간에게 두 가지 마음(mind와 heart)을 주셨습니다. "mind"는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말하고, "heart"는 심장이라 부르는 속 마음을 말합니다. 깊이 숙고하지 않고, 아프지도 않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이란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로 세상에서 유행처럼 떠돌아다니는 사랑이 그런 것입니다.
또 "heart"로 사랑하는 진짜 사랑이 있는데, 성경은 이 "heart"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악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누가 알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렘 17:9).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 주는 마음을 살피고 나는 속을 시험하며 그 사람의 행위와 행실의 결과대로 각 사람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렘 17:10). 사랑은 강요나 연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마음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희생이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랑에 거짓이 없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뎌내는 것이라 하셨습니다(고전 13:6,7).
모든 사랑에는 선한 메아리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 시인이 될 수 있는데 메아리가 없으면 상대도 체념해 버리고, 긴 침묵만 흐르게 됩니다. 상대의 인격에 상처를 줬으면 그 사랑은 복원시키기 어렵습니다. 배우자의 비밀을 자기 가족이나 자식들에게 알렸다는 것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냥 입으로만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합니다.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춰야 합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아직껏 실천하지 못한 채 살았다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분의 은혜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한 여인이 결혼했는데 남편이 폭군 같고, 요구사항이 너무 많았습니다. 집안 청소, 시장 보기, 가계부 기록, 아이들 옷, 생필품까지 일일이 간섭하며 너무 이기적이고 독선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재혼했는데 새 남편은 전 남편과 정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과 이해심이 많고, 온유하고 다정다감하고, 전혀 이기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을 정리하다가 옛날 가계부를 보게 되었는데, 그때 전 남편이 요구했던 것들을 보고 놀랐습니다. 지금 그녀는 전 남편이 요구했던 일들을 자원하여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에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기에 시키는 대로 했고, 지금은 사랑하기에 자원해서 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강요가 아닌 자원함에서 솟아나야 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 섬기는 일, 바치는 일,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들도 주님을 사랑하기에 자원함에서 나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실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빚을 갚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실 것입니다. BB




여기에 실린 "이 달의 설교"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www.kjv1611.or.kr)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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