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이송오 목사 설교 분류

찬양의 의미 (골로새서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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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0년 04월호>

골로새서 3장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의 새로운 삶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10절에서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 안에서 새롭게 된 새 사람을 입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는 세상 사람들이 아닌 거듭난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십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린 사람의 생활에는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새 성도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시어 기록하게 하신 말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새 성도의 삶은 말씀과 시작하는 새로운 생활양상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을 주도하고 생명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변화입니다. 성경이 최종권위가 되었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 거듭나지 않고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찬송을 부릅니다. 이 찬송은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의 장르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역시 성령의 감동을 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종들을 시켜 작사, 작곡하게 하신 영적 간증들입니다. 가사의 내용이 진리이어야 성도들이 부를 때 감동을 자아내게 되고, 결심을 하고, 위로를 받으며, 눈물이 흘러나오게 만들어 더 좋은 헌신과 섬김으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게 합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주의 만찬을 합니까?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순교의 장소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지상 생명을 주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에게 보여 주신 참되고, 진실하며,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지난 6천 년의 세월 속에서 이 지구상 그 어디에서도 결코 실현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만 있었습니다. 그 사랑은 고뇌와 죄, 그리고 죽음과 연관이 있습니다(히 2:10-13). 죽음은 죄와 연관이 있고, 죄는 구세주와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자기 죄를 벗어 버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사랑은 음악과 연관이 있고, 음악은 노래와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이신데도 불의한 자들을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벧전 3:18). 세상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말씀을 증오했던 까닭에 주님도 미워했습니다(요 17:14). 죄인들의 죄를 제거시켜 지옥에 가지 않게 해주시려고, 자청하여 피흘려 죽으신 그분의 사랑을 뒤늦게 안 것인데, 그 수도 극히 일부인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그 의미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죄의 형벌과 지옥의 심판만을 면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주셨고, 이제 곧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 점을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잊을 수 없는 거듭난 성도들이 2천 년 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노래를 1천 곡 이상 만들었고, 그 사랑을 뒤늦게 깨달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이거나, 홀로 그분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것이 유일한 설명이요, 이유요, 근거입니다. 세계 인구 60억 명 중 50억 명 이상은 노래를 불러 찬양할 대상이 없습니다. 그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의 대상에 대한 노래가 없습니다. 나머지 10억 명 중에서도 그분의 사랑이나 약속의 실현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의미 없는 노래만 부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왜 찬송을 부르십니까? 사랑의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서도 왜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아는 성도들도 있습니다(골 3:16). 여러분은 찬송을 부를 때 단순한 예배 의식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그 노래를 작사, 작곡한 그들도 주님에 의하여 쓰임받은 종들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무자격자들이 부르는 찬송이나 의미를 모르면서 부르는 찬송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Ⅰ. 파니 크로스비(Fanny Crosby, 1820-1915)
파니 크로스비 자매가 작시한 찬송 중 우리 찬송가 <영광을 주께>에 수록된 찬송만 27곡입니다. 1820년 3월 24일 뉴욕 근교에서 태어났는데, 생후 6주 때 안과 의사의 실수로 실명했습니다. 9살 되던 어느 봄날 오후, 들녘에 나가 자신의 몸을 주님께 드리면서 "주님의 선하시고, 순수하고, 고결한 목적에 자신을 사용해 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처음으로 시를 썼다고 합니다.
36세에 뉴욕 맹아학교 음악교사인 맹인 알렉산더 판 알슈타인(Alexander Van Alstyne)과 혼인했습니다. 44세에 첫 찬송가 가사를 썼고, 그후 일주일에 3편씩 50년간 썼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은 것입니다. 주님께 서원한 대로 이루어 주셨던 것입니다. 95세에 주님 곁으로 갈 때까지 무려 5천 편이 넘는 찬송시를 남겼습니다. 세상 문학이 하나님의 지혜와 은사로 이룬 업적을 알아 줄 수 있겠습니까?(빌 4:13)
한 사람의 헌신된 성도의 기여로, 다른 성도들이 150년 이상 격조 높은 찬송을 불러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헌신은 결코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라, 고귀한 부르심에 응하는 일입니다(롬 12:1). 그녀가 받을 상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누가 헌신하는 것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헌신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해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고생하겠다는 자기 희생이 아닙니다. 주님께 자기 생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라는 찬송을 1868년에 썼는데, 그녀는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나는 이 시를 쓰면서 내 마음속 깊은 데서 나오는 참다운 기도를 느낄 때까지 열중했습니다. 첫 줄을 썼을 때 나는 내가 부르짖는 목소리를 내 구세주께서 들어 주시기를 혼을 다하여 간구했습니다. 나는 자비의 보좌와 내 모든 위로의 힘을 찾았지만 내 혼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나는 계속 부르짖었습니다. 구세주시여, 구세주시여, 내 겸손한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이 찬송과 "주 예수 넓은 품에 나 편히 안겨서"(1868)는 윌리암 돈(William Doane)이 작곡했습니다. "주님이 공중에 오시어 나를 부르시면 내가 눈을 떠서 올라갈 텐데, 셋째 하늘에 대한 첫 인상은 어떨 것인가! 나는 나의 구세주의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두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사람들도 헌신하지 않으면 쓸모 없게 생을 낭비하고 있는데,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주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이루어 주님을 영화롭게 해 드린 자매였습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결코 이런 감동이 솟아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첫째로 사랑했다는 간증이 있는 성도만이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Ⅱ.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 1546)
그는 로마카톨릭 사제로서 29세가 되던 1517년에 로마카톨릭의 비성경적 실행에 견딜 수 없어서, 95개 조항을 적은 반 카톨릭 선언을 독일 비텐베르크(Wittenberg)에 있는 성당 문짝에 못 박았던 종교개혁가였습니다. 그 일은 기독교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지만, 교계는 얼마 못가 다시 종교개혁 이전으로 회귀했습니다. 진리는 아무나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성경을 배격하고 복음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진리의 지식으로 양육되지 않으면 종교라는 잎만 무성하게 되고, 그러면 독보리만 무성하게 자라게 됩니다. 결국 폐허가 되는 것입니다(딤전 1:18,19).
마틴 루터는 헬라어 표준원문에서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여 배포했습니다(1517- 1536). 바른 성경의 중요성을 느낀 것입니다. 바른 성경이 없으면 종교개혁을 이룰 수 없습니다. 루터성경에서 스웨덴, 덴마크, 스위스, 노르웨이, 체코 등 유럽의 수많은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그의 상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마귀가 그를 얼마나 공격했겠습니까? 45세 되던 해에 코부르크(Coburg)에서 절망에서 헤어날 수 없을 만큼 위약해졌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생명을 잃음으로써 다시 얻는 원리를 생각해냈습니다(마 10:39). 또 그때 떠오른 말씀은 마태복음 27:46이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2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으면 마귀에게 진다고 말했습니다. 36세 되던 해 늦여름에 그는 시편 46편에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시며, 고난 중에 나타나시는 도움이시라.』이 구절을 계속 읊조렸더니 이 말씀이 가슴에서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이 찬송은 1853년 프레드릭 헤지(Frederick Hedge)가 번역하여 찬송가에 넣게 되었습니다(<영광을 주께> 63장).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Ⅲ. 로버트 로빈슨(Robert Robinson, 1735-1790)
주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십니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로빈슨은 불량 소년으로, 동네의 청소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남을 괴롭히고,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고 다녔습니다. 인도의 선다 싱(Sundar Singh)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서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우기도 하십니다. 로빈슨이 17세 때, 술취한 집시 여인을 놀려 줄 양으로 접근했는데, 그 여인이 흐린 눈과 떨리는 손가락으로 로빈슨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자네는 자네의 자녀들과 손자들을 보며 살 것이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녀가 했던 그 말이 그를 온종일 따라다녔습니다. 성령님께서 쓰시는 강박관념인 것입니다.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생깁니다. 어두움과 빛은 상관관계입니다. 어떤 장애물만 제거되면 어두움도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로빈슨은 "만일 내가 자녀들과 손자들을 보며 살려면 나는 내 생활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속으로 되뇌었던 것입니다.
그날 밤 부흥회에서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가 설교하고 있었는데, 로빈슨은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 감리교 설교자를 놀려 주려고 패거리들을 데리고 그곳에 갔었습니다. 휫필드는 마태복음 3:7로 설교했습니다. 침례인 요한이 요단 강에서 침례를 주고 있을 때 그곳을 기웃거렸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오 독사의 세대야, 누가 너희에게 다가오는 진노에서 피하라고 하더냐..." 라고 한 말을 그는 목사가 자기에게 말하는 줄로 들었습니다. 그 설교를 들은 지 2년 7개월 후, 1755년 12월 10일 22세 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리교회로 출석했고, 성경을 혼자 공부했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그를 3년 후에 칼빈주의 감리교회(Calvinist Methodist Church)에 설교자로 임명했습니다. (교회 이름이 어이가 없습니다.) 3년 후 찬송가 가사를 지었습니다("복의 근원 내게 오사" <영광을 주께> 288장). 그러나 이 사람은 독립침례교회처럼 모든 규례를 행했습니다. 55세의 나이로 1790년 6월 9일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IV. 존 뉴턴(John Newton, 1725- 1807)
선장 집안의 독자로 태어나 신실한 어머니의 권면으로 어린 나이에 헌신했으나, 11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지중해를 항해하기 시작했고, 17세 때에 이미 믿음을 완전히 잃은 마귀의 자식이었습니다. 그후 그의 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시에라리온에서는 잔인한 노예들 가운데서 살기도 했습니다. 셔츠가 하나뿐이라 저녁에 빨아 입고 자면서 말리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자살도 여러 번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을 쓰시려고 할 때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보시고, 부르시고, 역경을 주시고, 시련을 통해서 승리하게 하시고, 실패하면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 그 자비를 맛본 사람은 주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헛짓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타고 오면서, "그리스도를 닮아"라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날 대단한 폭풍을 만났는데, 그 폭풍이 그의 양심을 깨워 주었습니다(1748년 3월 10일). 그는 "내가 가끔 조롱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날이었다."라고 그 날의 일기에 적었습니다. 그로부터 6년 뒤 1754년 8월에 그가 선장으로 일하던 배에 노예들을 실어 가고 있었는데, 주님의 부르심과 헌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고, 어머니의 기도가 생각나서 모든 것을 주님께 집약시켰습니다. 그는 죽을 경우에서 두 번 살아났습니다. 그후 몇 년간 열심히 공부하여 4년 뒤 1758년 12월 16일 영국 교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6년 뒤에 찬송가를 출판했는데,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이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두 교회를 맡아 죽을 때까지 신실하게 섬겼습니다. 1807년 12월 21일 82세의 나이로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그의 비명에는 "존 뉴턴 목사, 한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방탕자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자비로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설교하도록 임명해 주셨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시키려고 오랫동안 수고하였다. 올니(Olney)에서 16년, 이 교회에서 28년 섬겼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으면 이처럼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지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는데 성경기록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이 나오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로마제국이 헬레네 문화의 언어 정책을 통하여 신약성경이 쓰인 코이네 헬라어가 정착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시켜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를 만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돈을 벌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딤전 6:8-10). 그 말씀을 자국어로 번역하도록 그분의 사람들을 들어 쓰셨습니다. 말씀을 믿고 거듭난 성도들을 모아 경배하며 찬송을 부를 수 있도록 또 다른 신실한 종들을 들어 쓰시어 주님 오실 때까지 그 찬송을 부르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들에는 찬송할 거리가 없습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자들은 찬송을 의미도 모른 채 건성으로 부릅니다. 심지어는 CCM으로 바꿔 부르는 것입니다. 그분의 자녀들만이 마음속 깊은 데서 우러나온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히 13:15).
앞으로 여러분이 찬송을 부를 때 오늘 설교한 이 의미를 마음속에 잘 되새기시기를 바랍니다. BB



여기에 실린 "이 달의 설교"는 요약된 것입니다. 이 설교의 전문을 포함해서 이송오 목사님의 매주일 설교를 성경침례교회 홈페이지(www.kjv1611.or.kr)에서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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