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서 분류

배교의 시대의 참된 선지자 A.W. 토저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2월호>

기독교계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설교자들 중에는 루터, 칼빈, 쯔빙글리 등의 종교 개혁자들처럼 로마카톨릭의 비성경적인 전통들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나 비성경적인 후천년주의 누룩에 취해 있던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비록 그들이 주님을 위해 이루어 놓은 열매가 많이 있다 해도, 마귀 또한 그들의 명성을 이용하여 오류를 확산시켰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매우 실망스럽다. 왜냐하면 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는 열성은 반드시 비극을 낳기 때문이다! 일례로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는 다윗 왕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바른 지식에서 비롯되지 않은 행동 하나로 인해 한 사람의 목숨을 거둬 가신 적이 있다(삼하 6:6,7). 결국 그런 자들을 통해 퍼진 “교리적 혼란”은 오늘날 배교한 교회 시대의 교리적 기반이 되어 에큐메니칼과 기독교 문화 사역 등의 비성경적 실행들이 정당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배교의 물결 속에서 배교에 맞서 평생 동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신실한 설교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에이든 윌슨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이다. 토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설교자였다. 또한 <킹제임스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변개된 “새로운 번역본들”(<한글개역성경>도 같은 계열임)과 기독교 영화들 그리고 사람 수를 헤아리는 데만 관심이 있는 가짜 교회들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쏟아 낸 강력한 설교자요 저술가였다.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토저는 정규 교육을 6학년까지밖에 받지 못했고, 십 대 시절에는 타이어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어느 날, 토저는 한 거리설교자가 이렇게 외치는 설교를 듣게 되었다. “구원받는 방법을 잘 모르겠거든, 그저 주님을 부르면서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는 즉시 집으로 돌아와 다락방에 올라가서 그 설교자의 조언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받았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이후 그는 신학 교육을 정식으로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5년 만에 복음주의 목사가 되었는데, 그 원동력은 늘 공부할 시간을 투자해서 성경과 믿음의 선진들의 많은 글들을 깊이 있게 읽는 것에 있었다. 그는 초대 교부들부터 시작해서 중세 시대의 신학자들, 개혁주의자들, 청교도들 그리고 동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글들을 폭넓게 읽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사역으로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원동력은 그의 “기도 생활”에 있었다. 그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어떤 문서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는 아침 일찍 사무실에 도착해서 바지가 구겨지지 않도록 낡은 바지로 갈아입은 후 길면 세 시간까지 기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처음에는 소파에 앉아 기도를 시작했다가도 금방 바닥으로 내려와 양탄자에 얼굴을 묻고 기도했던 것이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던 날, 그 안수 예배가 끝났을 때, 곧바로 근처에 있는 숲속 조용한 장소로 가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제게 진리를 볼 수 있는 눈과 제가 본 것을 신실하게 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제 음성이 주님의 음성처럼 되게 하셔서 병든 양들도 알아듣고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앞선 기도의 내용대로 토저는 회중들의 평가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오직 주님께서 자신에게 “보여 주신 것들”만을 직설적으로 쏟아 내어 거침없이 설교했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현대의 선지자”로 여겼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교파에 속해 있었으면서도 극단적 칼빈주의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강단(剛斷) 있는 설교자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들(칼빈주의 교리들)을 연구하는 것이 ‘신학자’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성도’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그러면서 토저는 “우리는 신앙생활에 관한 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해 주실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칼빈주의의 “피동적 생각”이 믿음을 파괴하는 크나큰 누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그가 사역하던 시대를 다음과 같이 통찰력 있게 바라보기도 했다. “누름단추와 자동 기계들 사이에서 자라난 그리스도인들의 세대는 목표 달성에 있어서 다소 느리거나 좀 덜 직접적인 방법을 참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기계적인 방법을 적용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성경을 한 장 정도 대충 읽으면서 경건의 시간을 짧게 가진 다음, 곧바로 뛰쳐나가 다른 복음 집회에 참석하거나, 최근에 먼 곳에서 돌아온 어떤 종교 모험가의 ‘감격적인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자기들의 깊은 내적 파산이 채워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그의 책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 The Pursuit of God>에서 발췌).

놀라운 것은 이런 글을 유튜브나 인터넷은커녕 컴퓨터조차 제대로 보급되기도 전에 남겼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토저에게 “어제까지는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였고, 오늘부터는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라고 알려 주지 않았을 테지만, 필시 토저는 교회 시대가 이미 배교한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로 넘어왔음을 충분히 통찰했던 것이다. 그는 경건의 능력과 훈련을 내다 버린 교인들이 『나는 부자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라고 지껄이지만, 정작 예수 그리스도를 얻으려(빌 3:8,9)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평생에 걸쳐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가 심장 마비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고했던 글의 제목 역시 『교회들 안에서 약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권위, The Waning Authority of Christ in the Churches』였다.

토저는 당대 미국의 기독교계를 이렇게 평가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리의 원리들을 정확히 가르치는 사람들은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매년 계속해서 믿음의 근본 사항들을 가르치는 것에만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사역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어떤 특별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상하리만치 무감각해 있다... 요한 웨슬리가 했던 다음의 말이 우리의 목전에서 확증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나 올바른 감정 없이도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사탄이 바로 그 증거이다!’”

다시 말해 바른 성경 교사를 통해 교리적인 입장을 정립했다면 잘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혹시 독자들도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사탄처럼(고후 11:14),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행세하면서도 주님과 개인적으로 교제하는 시간과 그 질에 있어서는 간증할 것이 전혀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믿음의 근본 사항들”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처럼 성경을 머리로만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는 실로 비참하다! 토저는 또다시 이렇게 말했다. “힘써 주님을 알고자 한다면, 성경이 자신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할지를 기대하면서 즉시 펼쳐진 성경 앞으로 나아오라. 성경을 제멋대로 자신의 형편에 따라 일반 서적 대하듯이 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성경은 한 권의 책 그 이상으로서, 한 음성, 한 말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바로 그 말씀인 것이다.”

20세기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현 시대는 “라오디케아”라는 헬라어의 뜻 그대로 “시민들(사람들)의 권리”가 모든 것 위에 높아져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 밖으로 쫓아내 버린 시대로 특징지어진다(계 3:20). 항상 변치 않으시는 주님께서는 언제나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지만, 사람들은 너무나 배가 불러 있어서 더 이상 주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거역하였고 내가 손을 내밀었으나 아무도 개의치 아니하였으며』(잠 1:24).

이런 시기에 살아 계신 하나님과 살아 있는 교제를 향유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지(知), 정(情), 의(意)를 소유하고 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알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그분의 뜻을 실행할 수 있는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을 믿고 성령 하나님을 그 안에 소유해야 한다(고전 2:11). 그다음에는 하나님을 위해 “시간”을 드려야 하고 사랑하는 주님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이에 대해 토저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분께 시간을 드려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구원받은 혼은 이미 하나님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그분을 사랑하면서 추구해야 한다!” BB

전체 92 / 1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