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서 분류

배교의 물결에 맞서 싸운 드위트 탈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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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11월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역사를 돌아보면,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만감이 교차한다. 왜냐하면 그 시대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복음 전도자들(D.L. 무디, 샘 존스, 빌리 선데이, 밥 존스 1세 등)의 시대이자, 세대적 진리에 입각한 건전한 교리를 가르쳤던 성경 교사들(C.I. 스코필드, 클라렌스 라킨, A.W. 토저, F.B. 마이어 등)의 시대였음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 변개자 웨스트코트와 홀트, 네슬 부자(父子),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망발한 프리드리히 니체, 공산주의를 창시한 칼 마르크스 등의 시대이며, 산업 혁명 이후 “도시”에서 살게 된 죄인들에 의해 온갖 죄악들이 범람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루터성경>(1534)과 <킹제임스성경>(1611) 등의 올바르게 보존된 성경과 더불어 시작된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는 RV(1884), ASV(1901) 등의 변개된 성서들의 출현과 함께 막을 내렸고, 시나브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는(호 8:12) 배교한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마스 드위트 탈마지(Thomas DeWitt Talmage, 1832-1902)와 같은 불굴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부패가 극심해질 때 그 속도를 늦추게 할 “소금”(마 5:13)을 이 땅에 허락하셔서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에서 건져내려 하시는 분(벧후 3:9)이기 때문이다.

드위트 탈마지는 1832년 1월 미국의 뉴저지 주에서 12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후일 그의 형들 또한 사역에 헌신했는데, 존 반 네스트 탈마지는 중국 선교사로, 다른 두 형은 설교자로 헌신했던 것이다. 탈마지의 부모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었는데, 특히 아버지 “데이비드 탈마지”가 구원받은 일화는 무척 흥미롭다. 데이비드 탈마지의 부모는 찰스 피니의 집회에 참석하고 나서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강한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날 밤 파티에 갈 계획이었던 자녀들을 방으로 부른 그의 모친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가서 좋은 시간을 보내렴. 그러나 너희들이 밖에 나가 있는 동안,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을 것이고, 너희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기도’ 이외에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예정대로 그들은 파티에 갔지만, 이튿날 딸 “피비”의 눈물의 회개를 시작으로 자녀들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다.


이렇게 구원받고 성장해서 후일 가정을 꾸리게 된 데이비드 탈마지는 어려운 일들이 닥칠 때마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법을 자녀들에게 가르쳤다. 그의 가정은 매일의 시작과 끝을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고 마감했으며, 또한 일종의 “가족 성경”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아들 존 반 네스트가 타국 땅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밤에도, 15년간이나 몸이 아팠던 그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터로 나가야 했을 때도, 그의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 곧 “그들 상황에 꼭 들어맞는 성경 구절들”을 성경에서 찾아 낭독했던 것이다.


그러나 탈마지는 이런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구원받지 못한 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을 방문한 “트루먼 오스본”(Truman Osborne)이라는 복음 전도자가 가족이 전부 모여 있는 자리에서 아버지 데이비드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전부 그리스도인인가요?” “드위트만 빼고 그렇습니다.” 그러자 그 복음 전도자는 다른 양들이 산골짜기에서 폭풍을 피하고 있을 때 바깥에 있다가 목숨을 잃은 양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고, 드위트는 그의 마음속에 “회개하라, 회개하라. 믿으라, 믿으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 따라 그 자비로운 초청을 받아들였다. 훌륭한 조부(아브라함)와 부친(이삭)을 두었던 야곱조차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기 전에는 주님을 『내 아버지의 하나님』(창 31:5)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그저 어릴 때부터 복음을 “듣기만” 했던 자녀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세주”이자 “부모님의 하나님”이실 뿐, “나의 구주” 또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지는 않는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반드시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개인적으로” 믿고 불러서 구원받도록 해야 한다(롬 10:13).

물론 드위트 탈마지가 어릴 때부터 받아 온 “성경적 가정 교육”이 전부 허사였다는 말은 아니다(딤후 1:5; 3:14-17). “새로운 생명을 얻기 전에 세상에 물들었던 기간”이 어느 정도였는가에 따라 그가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에 적응하는 양상은 확연히 다른 법인데, 이것은 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려 주신 “세 사람”이 부활한 이후에 취했던 행동을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세상의 때가 가장 많이 묻은” 나사로는 누군가가 옆에서 수발을 들어 주어야 움직일 수 있었고(요 11:44), 그보다는 덜했던 나인 성읍의 과부의 아들은 앉아서 말을 했으며(눅 7:15), 세상의 때가 거의 묻지 않았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살아난 즉시 일어나서 걸었다(막 5:42). 물론 더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눅 7:47), 그 사랑과 열정에서만큼은 세상에서 인생을 진탕 낭비했다가 구원받은 사람들이 더 나을 수 있겠으나, 단련된 감각으로 성령의 법을 따라 행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일은 구원받은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난 “2세, 3세”들이 훨씬 더 낫다.


드위트 탈마지는 바로 이런 점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냈고, 당대의 “사회적인 이슈들”에 관하여 단련된 감각으로 선악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하는(히 5:14) 사역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당시에 거대한 물결처럼 밀려왔던 “진화론”이나 “고등 비평”에 대해 거침없이 소금을 뿌렸고, 도시화에 따른 부도덕과 사회 문제, 부의 증대로 인한 귀족주의, 로맨스 소설, 영화, 도박 등과도 싸웠던 “진짜배기 설교자”였다. “정치적인 문제”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침묵하며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설교만 늘어놓는 위선자들에게는 그들을 반대하는 적들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현실 생활에서 일어나는 “진짜 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하는 순간,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런 것들을 전파하는 설교자들을 박해하려 하고, 심지어 여론을 조장하여 죽이려고 한다(왕상 21:20; 22:5-28, 렘 26:8-11, 마 14:4-11, 행 19:23-29).
탈마지가 대중들의 언어로 대중적인 주제에 대해 설교하자, 그를 시기한 대적들은 탈마지가 인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비방했다. 하지만 그는 주로 “관리직”에 종사했던 청중들을 향해서는 “여러분은 노동자들의 도덕적 복지와 영적 복지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라고 설교하면서 가난으로 인해 죄를 짓기 쉬운 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도서관, 체육관 등을 지어 주라고 권면했고, 당대 부유층 여자들에 대해서는 “패션 디자이너들의 노예들”이라고 평했으며, 상류층만의 무도회와 같은 특권층의 호화 문화에 대해서도 힐난했다. 그는 어떻게 행하는 것이 자신이 배웠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가치관,” 곧 『옛 길』(렘 6:16)에 부응하여 따르는 일인지 올바로 알았던 것이다.


또한 탈마지는 “그라프”나 “벨하우젠” 같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고등 비평, 즉 “성경은 모세나 여호수아, 다윗, 솔로몬 등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훨씬 후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이 구전되어 오던 것들을 짜깁기해서 만든 것이다.”라는 싸구려 이론을 불신자들의 말보다 더 가치 없게 여겼다. 탈마지는 고등 비평가들을 당대의 유명했던 불가지론자 로버트 잉거솔(Robert G. Ingersoll)과 비교하면서 “그들은 잉거솔 500명을 모아 놓은 것보다 더 위험한 자들이다.”라고 혹평했다. 그는 한 번도 원어나 원본 타령을 하지 않았고,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킹제임스성경>만을 믿었다.


그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의 성경을 굳게 붙잡으시오. 성경은 그대들이 소유했던 책 중에서 으뜸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하고 어떻게 거래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하고 대처해야 하는지, 또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그대들에게 말해 줄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성경, 곧 그것이 양피지에 기록되었든지 종이에 기록되었든지, 그것이 기록된 종이의 크기가 어떻든지 간에, 또한 그것이 응접실 탁자 위에 있든지 은행에 놓여 있든지 간에, 바로 그 성경이 그대들에게 말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탈마지를 당대에 가장 효과적으로 진리를 전파하는 유명한 설교자가 되게 해 주셨다. 탈마지는 두 시간을 설교해도 회중의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1869년 브루클린에 있는 센트럴장로교회에서 목회했을 때는 몰려드는 회중이 너무 많아서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새 건물을 지어야 할 정도였다. 사역하던 중에 교회 건물이 세 번이나 불타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규모가 점점 늘어나서 1874년에는 5천 명이 앉을 수 있는 교회 건물이 지어졌으니, 이것은 당대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중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


또한 탈마지는 “지금 미국에 필요한 것은 다윈으로부터 나온 진화론을 축소하고, 바울에게서 나온 복음을 늘리는 일이다.”라는 자신의 말처럼, 복음 전파 사역에 힘썼다. 그는 수많은 출판물의 편집을 맡았고, 특히 말년에는 출판 사역에 전념했다. 그가 편집한 <크리스천 헤럴드>는 당대 미국에서 가장 많이 보급된 기독교 주간지였다. 다른 여러 신문에도 그의 기사가 실렸기에, 매주 5천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기사를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줄 선생들을 많이 찾는 이 시대에는(딤후 4:3), 탈마지처럼 현실적인 문제에 관하여 올바른 분별력을 갖고 성경적으로 비평하는 설교자들이 인기는커녕 벌 떼처럼 달려드는 많은 적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탈마지가 그러했듯이, 믿음의 발자취를 통해 전수된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들고 있는 우리는, 아무리 많은 적들이 우리를 대적한다 해도 진리를 믿는 우리 소수가 “진정한 다수”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담대히 싸워야 할 것이다. 『두려워 말라. 이는 우리와 함께하는 자들이 그들과 함께하는 자들보다 많기 때문이라』(왕하 6:16).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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