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서 분류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진 목자 앤드류 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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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7월호>

“하나님, 저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 16세기 로마카톨릭의 마수 아래에서 성경을 읽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시절, 스코틀랜드를 복음화한 장로교 출신의 복음전도자 존 낙스(John Knox)는 하나님께 위와 같이 기도를 드렸다. 물론 낙스의 의도와는 별개로 후일 그가 세운 장로교회를 통해 퍼진 칼빈주의의 누룩은 무시할 수 없는 “믿음의 장애물”이 되었지만, 과연 존 낙스의 기도대로 스코틀랜드는 복음화되어 “하나님의 유능한 일꾼들”을 배출하는 국가가 되었다. 예를 들어 30세의 짧은 일기로 일찍 하나님 곁으로 갔지만 경건함과 열정에 관해서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과, 찬송 작사자로서 <영광을 주께>에도 다섯 편의 찬송이 실린 “호레이셔스 보나르”(Horatius Bonar) 등은 모두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스코틀랜드 출신의 “하나님의 일꾼”이 있었으니, 그는 이 두 사람과 아주 각별한 사이로서 호레이셔스 보나르의 동생이자 로버트 맥체인의 친구였던 “앤드류 알렉산더 보나르”(Andrew Alexander Bonar)이다.


앤드류 보나르는 1810년 5월 29일,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그는 20세가 될 때까지 구원받지 못했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는데, 20세가 되던 해인 1830년 10월 17일 “윌리엄 거스리”(William Guthrie)의 책을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고, 그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했을 뿐이다.” 구원받는 방법에 관하여 이보다 더 간단명료한 설명도 없을 것이다(엡 2:8,9).


그렇다면 보나르가 그렇게 오랜 시간 구원받지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분명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에 관하여 어린 시절부터 자주 들으면서 성장했다. 그의 부모 역시 “경건한” 사람들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나르는 20년간이나 “지옥행 대기자”로 살아 왔던 것인데, 이는 당시 스코틀랜드를 휘어잡고 있던 “칼빈주의자들의 책임”이 컸다. 그들이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당대의 사람들은 자신이 예정된 사람인지 아닌지를 놓고 고민하느라 몹시 괴로워했고, 이를 위한 돌파구로 어떤 행위의 “증거”가 나타나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결국 이런 잘못된 생각을 붙든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했거니와, 설령 받았다 할지라도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이라도 신앙생활에 소홀하게 되면 ‘혹시 내가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부터 엄습했던 것이다. 미국 출신의 인디언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역시 한때 그와 동일한 문제로 씨름했었다.


“누구든지”(롬 10:13)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겠다고 “선택하는”(살전 1:4) 순간 자기 자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구원”을 받게 된다(롬 3:21-24). 따라서 어떤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해 낼 수 있어야 구원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오산이다(갈 3:1-5). 다행스럽게도 보나르와 브레이너드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구원받을 수 있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거짓 교리 때문에 지옥불로 떨어졌고, 지금도 떨어지고 있다. “다른 복음”(갈 1:7)을 전하는 칼빈주의자들은 “구원의 지식의 열쇠”를 한쪽으로 치워 버린 “지옥행 영순위 대기자들”이다(눅 11:52).

보나르는 구원받은 지 1년이 지났을 무렵 에든버러 대학교에 신학생으로 입학했고 동문수학한 맥체인과 친분과 우정을 쌓아 나갔다. 1835년에 신학교 과정을 모두 마친 보나르는 “에든버러” 성조지교회의 부목사와, 에든버러 남쪽으로 약 75km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 “제드버러”의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제드버러는 보나르가 생애 처음으로 설교했던 장소였기에, 그 지역의 혼들을 향한 그의 사랑은 그만큼 남달랐다. 보나르는 1년 뒤인 1836년 말경에 제드버러의 성도들과 이별해야 했는데,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들을 향한 그의 그리움과 연민의 정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헤어진 지 42년만인 1878년에 보나르가 제드버러에 다시 들렀을 때, 여전히 그는 그곳 사람들의 이름과 주님 안에서 보였던 그들의 행적 등을 모두 기억해 냈다고 한다.


보나르는 더 이상 원기 왕성한 젊은 사역자가 아니었지만, 그 노구의 몸을 이끌고 오랜 시간 계단을 오르면서 옛날의 양무리들, 곧 그가 구령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러고는 만난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좋든지 나쁘든지 그들 각 사람에게 필요하겠다 싶은 조언들을 해 주었다. 1838년에 옮겨 간 퍼스샤이어 주 콜레이스라는 지역에서 목회했을 때도 그의 이러한 태도는 한결같았는데, 그의 한 늙은 하인은 이렇게 증언했다. “제가 늘 신경이 쓰이던 시간은, 보나르 목사님께서 그분을 찾아온 마을 사람들과 구원에 관해 상담하시느라 제가 타 드린 차를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시는 때였죠.”

한편 앤드류 보나르는 “전천년주의자”로서 그의 회중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가르치는 설교자였고, 주님의 재림이야말로 인생과 사역에 있어서 가장 실질적인 동기라고 믿었다. 그가 이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회중에게 전달했는가를 잘 보여 주는 일화 하나가 있다. 정신이 약간 온전하지 못한 한 형제가 있었는데, 보나르는 그의 집에 자주 방문했고 그 형제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후 그분의 재림에 대해 배우면서 매우 기뻐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형제가 에든버러에 다녀와서는 그곳의 사역자들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보나르가 왜 그러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쪽 날개만 가지고 달아나 버리더군요!” 초림만 설교하고 재림은 설교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처럼 보나르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형제 하나를 소위 “사역자”라고 하는 자들보다 훨씬 더 “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신 나간 설교자들은 후천년주의나 무천년주의를 가르치고, “공중 재림”(고전 15:51-54, 살전 4:13-18)뿐만 아니라 “지상 재림”에 대해서도(살후 1:7-10, 계 19:11-16) 설교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 이후로 유대인들을 버리셨고,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왕국은 모두 그들에게로 넘어왔다고 거짓말한다. 이것은 로마서 11장의 진리에 정확히 배치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전천년 재림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았던 보나르는 당연히 이들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던 사람으로서(창 12:3) 유대인들을 사랑했고, 그들에 대해 특별한 마음의 부담을 갖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런 보나르에게 길을 열어 주셨고, 그는 1839년에 맥체인을 포함한 세 명의 동역자들과 함께 선교하러 이스라엘에 갔다 올 수 있었다. 보나르는 유대인에 관한 소책자를 썼으며, 맥체인은 그 소책자를 “아주 잘 활용했다”고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유대인이 구원받게 되면 어떤 일보다도 기뻐했다고 하는데, 얼마나 기뻐했는지 새로 지은 교회 건물에 『혼들을 이겨오는 자는 현명하니라.』(잠 11:30)라는 구절을 히브리어로 새겨 놓았을 정도이다. 그곳을 지나는 유대인들이 보고 들어와서 구원받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보나르는 이처럼 따뜻한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교리적인 지식 또한 풍부했고, 또한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존재 자체로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힘이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는 매우 엄격했으며 늘 자신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드러나는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스스로를 돌아보았는데, 한번은 형 호레이셔스에게 이렇게 편지하기도 했다. “나는 책망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야. 기도보다 다른 일을 더 많이 하고 있으니 말이야.” 모든 일, 심지어 주님의 일을 할 때도 그가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붙잡으려 했던 태도는(살전 5:21) 실로 본받을 만하다. “오늘 아침 시간은 특히 내 연구와 책들과 같은 우상들에 대항해서 기도하는 데 사용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 시간을 방해하고 침범할 수 있으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보나르는 형제들의 권면을 겸손하게 수용할 줄 알았다. 그의 친구 맥체인은 하나님의 사람답게 진리를 위해서라면 전혀 거침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사역 초기 보나르에게 이렇게 충고한 적이 있었다. “앤드류, 전달하려는 내용을 명료하게 하게. 때때로 자네는 어디서 끝맺어야 할지 혹은 결론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말을 시작하는 경우가 있어. 그러면 나는 깜짝 놀라곤 하지.” 또래의 설교자로부터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말하는 태도를 고치라.”라는 식의 충고를 듣고 겸허하게 수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보나르는 결코 자존심을 내세워 그와 대립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 『현명한 자를 꾸짖으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9:8)라는 진리를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실로 주변에 칭찬하고 아첨하는 사람밖에 없는 인간관계만큼 그리스도인에게 해로운 것은 없다. 『친구가 주는 상처는 신실한 것이나, 원수의 입맞춤은 속이는 것이니라』(잠 27:6).

보나르는 다른 사람의 성공을 시기하는 법이 없었고, 오히려 주님 안에서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했다. 에든버러대학교를 졸업했을 무렵인 1836년에 맥체인이 던디의 성베드로교회의 목사로 뽑혀 자기 대신 그 역할을 맡게 되었을 때도 그러했고, 대서양을 건너온 D.L. 무디가 많은 무리를 모았을 때도 그러했다. 당대의 칼빈주의자들은 무디를 무척 시기했지만, 보나르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 도와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보나르에게 주의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셔서 예언을 연구하고 글을 쓰며 천 명이 넘는 회중을 상대로 설교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서 80세가 넘어서까지 사역하게 해 주셨다. 앤드류 보나르는 체력이 약해지는 것을 체감하면서도 죽기 직전까지 가능한 한 많은 사역들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상에 누운 지 이틀 만인 1892년 12월 30일에 주님 곁으로 갔다.
혹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크게 쓰임받는 일이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보나르는 큰 오산이라고 말할 것이다. 언젠가 주님께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있던 보나르에게, 한 친구가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라면서 핀잔을 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보나르는 이렇게 응수했다.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든지 결코 ‘너무 클’ 수는 없다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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