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서 분류

존 위클리프와 존 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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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7월호>

「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 」

존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새벽별”로 불린다. 빛은 작은 불빛이라도 어두움이 짙을수록 더 밝게 비출 수 있다. 배교의 시대에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믿음과 행보가 더욱 돋보인다. 위클리프는 영국의 색슨 족 출신으로 1366년 왕궁의 궁전 목사가 되었으며, 그 후에는 옥스퍼드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위클리프는 구라틴역본에서 영어로 성경을 번역한 최초의 사람이었다(위클리프성경, 1382). 이를 시초로 하여 틴데일(Tyndale)성경(1525)과 커버데일(Coverdale)성경(1535), 그레이트(Great)성경(1539), 제네바(Geneva)성경(1560)이 출간되었다. 그는 옥스퍼드 출신의 사람들로 “가난한 사제단”을 조직하여 영국 전역에서 성경을 설교하도록 했는데, 후에 이들은 “롤라드”(Lolards)로 알려졌다. 프랑스 리옹(Lyon)의 가난한 사람들은 롤라드처럼 자진해서 가난을 택했고 거리에서 설교하였다. 또한 리옹의 피터 왈도(Waldo)를 따랐던 이들을 왈덴시안(Waldensians)이라고 부른다.

위클리프는 라드베르투스(Paschacius Radbertus)가 지어낸 화체설(化體說)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불렀으며 세속 정치가들을 마귀의 종들이라고 불렀다. 유아세례, 연옥,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묵주, 유품 숭배, 외경을 거부했다. 다시 말해 로마카톨릭의 모든 것을 부인한 것이다. 그는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도(Bible Believing Baptist)였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믿었으며, 성경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진리라고 믿었다. 그는 “성경에 일치하는 것은 무엇이나 옳지만, 성경과 상치되는 것은 무엇이나 거짓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믿을 필요가 없다.”라고 가르쳤다.

위클리프는 런던의 성 바오로 성당의 주교 앞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영국의 귀족들에 의해 강력하게 보호를 받았다. 그의 설교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일반인들도 그를 지지했다. 교황은 위클리프의 모든 저작을 정죄했고 최초의 영어 성경 역시 읽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위클리프는 1384년 교회에서 예배 도중에 죽었다. 1415년에는 콘스탄스 공회가 그의 책들을 불태우도록 명령했고, 그 이후에는 그의 유골이 무덤에서 파헤쳐져 불태워졌다.

그가 조직한 순회전도단 롤라드는 그가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영국 전역과 유럽을 누비고 다녔다. 그들 중에는 화형당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윌리엄 소터(William Soter, 1401), 존 베틀리(John Betley), 리차드 터밍(Richard Turming), 존 클레이턴(John Clayton), 윌리엄 테일러(William Taylor, 사제), 윌리엄 화이트(William White), 리차드 홉턴(Richard Hobtan), 리차드 위치(Richard Witch), 토마스 벵리(Thomas Bengley, 사제), 존 올드캐슬 경(Sir John Oldcastle) 등이었다. 1407년에는 스코틀랜드 퍼스(Pers)에서 제임스 레스비(James Lesby)가 화형당했다. 여자로는 롤라드의 일원이었던 조앤 브루턴(Joan Broughton)이 1494년 스미스필드(Smithfield)에서 그녀의 딸과 함께 화형당했다. 이것은 영국에서 여자가 화형당한 최초의 사건이 되었다. 1511년에는 존 브로이스터(John Broister)와 윌리엄 스위팅(William Switing)이 스미스필드에서 산 채로 화형당했다.

「 보헤미아의 존 후스(John Huss, Jan Hus, 1369-1415) 」

존 후스는 1369년 보헤미아(지금의 체코공화국)의 후시넥(Husinec)에서 태어났다. 프라하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1398년에는 프라하대학에서 신학 강사가 되었고, 1401년에는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서품을 받은 후에는 프라하 시에 있는 베들레헴 교회에서 가르쳤다. 당시에는 세상 천지에 온통 카톨릭 교회뿐이었기에 신학을 공부하려면 카톨릭 대학에 가야 했고, 하나님을 섬기려면 사제가 되어야 했다. 마틴 루터와 존 칼빈도 사제 출신이었다.

당시에는 예배가 대부분 라틴어로 진행되었지만, 베들레헴 교회에서는 체코어로 진행되었다. 후스는 영국의 개혁자 존 위클리프의 글들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고, 위클리프의 저작들을 체코어로 번역하였다. 후스는 그 일로 로마카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분류되었고,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은 후스파(Hussites)로 불렸다. 한때 체코슬로바키아 전 민족이 그를 따르기도 했다. 후스는 교황에 의해 파문당했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변함없이 설교하고 책을 썼다. 후스는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진리의 지식을 배웠는가? 위클리프의 책에서도 배웠지만, 보헤미아에 있는 성경대로 믿는 “이단 그룹”에게서 성경적 진리를 배웠다. 보헤미아는 왈덴시안(Waldensians)의 핵심 본부 중 하나였던 것이다.

후스가 주장했던 일들은 무엇이었는가? 사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 죽임을 당할 일들을 한 적이 없었다.

① 후스는 사제들에게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했다. 당시 유럽의 사제들은 부정 축재, 성적 문란, 알코올 중독 등으로 그 퇴폐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듭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관장되지 못한 종교인은 오히려 불신자보다 더 사악하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속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② 설교와 성경 강의를 라틴어(알아들을 수도 없는 방언)로 하지 말고, 일반인들이 사용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행할 것을 주장했다. 로마카톨릭은 오늘날까지도 라틴어로 그들의 종교 의식을 행한다. 가정도 꾸려 본 적이 없으며, 아이를 낳지도, 길러 보지도 않은 교황에게 국가 경영을 묻는 역대 대통령들도 있었다. 표를 얻기 위해 그들은 교회, 성당, 절간을 마다 않고 찾아다녔다. 어디에든 표가 있다면 폐수 처리장 안이라도 뒤질 사람들이 바로 정치가들이다.

③ 온전한 주의 만찬을 행하라고 권면했다. 당시 사제들은 빵과 포도주를 받았지만 평신도들은 빵만 받고 포도주를 받지 못했다. 로마카톨릭에서는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어야 영생을 얻는다고 가르치는데, 사제들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④ 후스는 면죄부 판매를 반대했다. 인간은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고해성사는 로마카톨릭이 만들어 낸 터무니없는 허구다. 성경을 모르면 어리석게 되고 속임을 당하게 되어 있다. 당시 십자군 전쟁을 위한 자금 조성을 위해 면죄부 판매가 시작되었는데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교황이 만들어 낸 속임수였고 요즘의 스팸 메일만도 못했다. 죄의 용서는 교황의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해 놓으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리하여 그들을 데리고 나와서 말하기를 “선생님들이여,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이까?”라고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니라』(행 16:30,31).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메시지다.

⑤ 그는 교황의 무오설에 대해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교황의 권위에도 반대했다. 성경만이 교황과 공회의 권위를 능가한다고 주장했다. 교회는 베드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다고 주장했다(벧전 2:8, 신 32:4).

⑥ 교황은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으며, 교회에는 성직자 계급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유기체이다. 후스는 정확히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도였다. 그는 성경을 아는 사람이었다. 성령님께서 그의 안에서 역사하셨고 조명을 주셨다. 이 점을 모르는 자들이 이런 지식을 가진 성도들을 이단으로 매도하여 박해하고 죽였던 것이다.

⑦ 그리스도인들은 성당과 예배당이 아닌 곳에서도 설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것들까지도 마귀의 교회와 마귀의 종들에게는 죄목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곧 그가 나타나실 때와 그의 왕국에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대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견책하고 책망하며 권고하라』(딤후 4:1,2). 여러분은 카톨릭 사제들이 거리에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후스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에게서 안전을 보장받고 자기의 신념을 변호하기 위해 콘스탄스 공회(Council of Constance, 1414-1418)에 참석하였으나, 교황이 후스에게 보장하겠다던 자유로운 행동과 안전 귀가의 약속은 거짓말이었다. 후스는 곧바로 투옥되었고 위클리프의 일파로 정죄받고 기소되었는데, 정작 그에게는 자신의 신앙이나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1415년 7월 6일, 후스는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그의 저서에서 신조화했고, 옹호하고 설교했다는 이유로 공회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공회는 화형대의 기둥에 묶여 있는 후스에게 그의 신념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나에게 맷돌을 매어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나에게는 순간의 형벌을 피하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다. 영원한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 이 몸이 불 속에 던져지는 것이 더 유익하다. 그런 일들은 나를 주님의 팔에 곧바로 던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후스는 기도했다. “주 예수여, 나의 대적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주님은 저들이 나를 대적하여 행하는 잘못된 증언과 그릇된 기소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무한하신 자비로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의 모습과, 스테판이 돌에 맞아 죽기 직전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후스는 자신의 기도를 조소하는 군중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대성당의 중앙에 나무로 설치된 단 위로 이끌려 갔고, 거기서 일곱 명의 감독들에 의해 정죄 의식이 진행되었다. 관례대로 그가 입은 사제복이 벗겨지고, 그의 머리에는 “이단의 괴수”(heresiarch)라고 쓰인 글귀와 날뛰는 악마의 그림이 그려진 종이 모자가 씌워졌다. 그가 형장, 즉 악마의 자리(Devil’s place)라고 명명된 곳으로 끌려갔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 대열에 참여했고 그의 책들은 불살라지고 있었다. 후스는 말했다. “나의 증인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이곳에 왔을 때, 나는 누구든지 나의 사상보다 더 나은 것을 일러 주면 나의 생각을 고치려 했다. 그러나 당신들은 나의 책이 이단적인 내용을 싣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당신들은 보헤미아어로 된 나의 문서들을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나를 정죄할 수 있단 말인가?”

오전 10시경, 나무에 묶인 후스에게 집행관들은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고 거듭 요청했지만, 후스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 “나는 내가 설교했던 복음의 신앙 안에서 기쁨으로 죽음을 맞을 것이다.” 또 주위에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고해성사를 할 것을 요청했지만 “나는 고해할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단호히 거절했다. 마침내 쌓아 놓은 장작더미에 불이 붙여지자 후스는 찬송을 부르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친구인 프라하의 제롬도 1416년 5월 30일 후스가 처형된 그곳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공회와 황제는 후스를 향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의 지지를 과소평가했지만, 후스의 추종자들은 자주 폭동을 일으켰다. 이런 저항은 “후스 전쟁”(Hussite Wars)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 동안 후스의 추종자들은 여러 개의 그룹을 형성했다. 그중에서도 1457년에 형성된 모라비아 형제단(Unity of Brethren, Moravian)이 대표적인데, 로마카톨릭은 이들을 그들에게 복종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당시 형제단은 25만 명으로 추산되는 대그룹이 되었다. 마틴 루터가 태어나기 26년 전에 형성된 조직적 모임이었다. 이는 루터 교회보다 6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들은 자국어로 된 성경과 찬송가를 출판했다.

모라비아 형제단은 남쪽의 로마카톨릭과 북유럽의 개신교 군대들 간에 벌어진 30년 전쟁(1618-1648)에서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중부 유럽에서 융성하였다. 이 전쟁 기간에 많은 형제단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1648년 이 전쟁이 끝났을 때, 각 나라는 그들 군주의 종교를 따른다는 베스트팔렌(Westphalian) 평화 선언이 선포되었다(베스트팔렌 조약). 모라비아와 보헤미아의 사람들은 로마카톨릭으로 개종하거나 조국을 떠나야만 했다. 소수의 사람들이 코메니우스(John Amos Comenius) 감독의 지도하에 폴란드로 망명하였고, 다른 소수는 지하로 잠입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로마카톨릭에 복종하는 체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진젠도르프(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 백작의 영지에 있는 색스니(Saxony, 작센)에 작은 그룹(“숨겨진 씨앗”으로 알려진)이 정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에서 모임이 재조직되어 선교사들의 위대한 헌신이 시작되었다. 생명의 씨앗만이 생명을 낳는다. 아무나 순교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순교자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씨앗이며, 더 많은 열매를 내기 위해 심겨진 씨앗이다(요 12:24).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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