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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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른후트의 무명용사 모라비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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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05월호>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국가교회로 전락한 루터교회는 형식주의의 차디찬 냉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이에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복음의 불길을 서쪽으로 옮기시기 위해 기름을 흠뻑 먹은 "장작들"을 독일 내에 마련해 두셨으니,바로 모라비안들(Moravians)이었다. 이들은 18세기에 유럽 전역은 물론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로 복음을 들고갔으며, 영미 "대부흥"의 시대를 가져온 숨은 주역이기도 했다. 모라비안은 보헤미아의 영적 지도자, 존 후스의 후예라 할수 있다. 교황의 권위에 반대했고 성경의 권위와 믿음으로 인한 중생을 외쳤던 존 후스가 1415년에 화형당하자 끝까지성경적 믿음을 지킨 무리들이 숲속이나 동굴을 전전하며 떠돌아 다녔는데, 주께서는 목자 없는 양 같은 그들을진젠도르프(Zinzendorf, 1700-1760) 백작에게로 인도하셨다. 이들의 만남은 "위대한 세기"라 불리는 선교부흥의 시대의 여명을 밝혔다.
진젠도르프는 1700년에 독일 작센의 선제후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태어난 지 6주 만에 아버지를 여의어 외할머니의 품에서자랐다. 외할머니 헨리테는 죽은 정통주의에 반대하는 경건주의자들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따라서 어린 시절 진젠도르프의집에는 신실한 성도들과 선교사들이 많이 왕래했다. 이런 성장 배경으로 인해 그는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을위해 살고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겠다."는 결심을 했고, 또한 세계 선교 보고를 듣고는 선교의 꿈을 품기도했다. 오늘날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는 "페다고기움" 시절에는 친구들과 기도 모임을 만들어 신앙 문제를 겪는 친구들을도왔으며 해외선교를 위해 중보하기도 했는데, 그가 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이런 모임이 일곱 개나 되었다. 그는 신학교로진학하려 했으나 당시 귀족의 자녀가 목회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고, 더욱이 자신의 은인인 외할머니의 반대로법학대학에 다녀야 했다.
공부를 마친 후 1년 정도는 서유럽을 둘러보았는데 이 여행 중에 그의 인생행로를 바꿔 놓은 사건이 일어났다. 한번은뒤셀도르프에서 미술 전시품을 보고 있을 때였는데, 그는 『이 사람을 보라』라는 제목의 그림 앞에 멈춰 섰다. 그것은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시는 모습이었고, 그 하단에는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하느냐?"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마치 예수님의 책망을 직접 듣고 있는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던 진젠도르프는 예수님을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결심을 했고, 고국에 돌아와서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여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있는 아내를 찾다가 결국 자신보다 일곱 살 많은 귀족 여성, 도로시 로이스와 22살의 나이에 혼인했다. 그리고는 곧바로드레스덴 왕궁에서 왕실법률고문으로 일하며 동시에 주님을 위한 실제적인 행동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먼저 자신이 진학하려했던 "할레 대학"과 같은 선교 본부를 세울 요량으로, 많은 재산을 들여 베르셀스도르프의 영지를 구입했다. 때마침모라비안들이 근처에 피신해 있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자신의 영지를 그들에게 내어 주고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이에 모라비안들은 유럽 전역에서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첫해에는 90명이었던 정착민들이 4년 후에는 300명으로 늘어났다.그들은 이곳을 "하나님의 피난처"라는 뜻의 "헤른후트"(Herrnhut)라 불렀다. 이렇게 해서 200년 가까이 세계선교 본부 역할을 해 온 "헤른후트 형제단"이 탄생한 것이다. 어떤 기반도 없이 주님을 위한 열정만으로 모인모라비안들에게는 진젠도르프와 같은 훈련된 지도자가 필요했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사역지를 찾고 있던 진젠도르프에게는그들이 주님께서 보내 주신 양들과 다름없었다.
1727년에는 진젠도르프가 헤른후트로 거처를 옮겼고, 이 마을에서 지켜야 할 42개의 협약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 협약은국가교회를 세우려고 마련된 강제성을 지닌 법이라기보다, 출신이나 교육 수준, 문화적 배경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참된 믿음안에서 함께 거하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이자 울타리였다. 이 시기에 헤른후트에는 여러모로 하나님의 복이 넘쳤는데, 많은성도들이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기로 헌신하는 큰 부흥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듬해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진젠도르프는 더이상 공직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고, 이제는 헤른후트 공동체를 선교 본부로 세워 나가는 일에만 전념할 수있었다.
진젠도르프의 확고한 신념은 성도들이 사랑의 띠 안에서 하나로 묶일 때 "전투적인 교회"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복음을 위해 살기를 바랐고, 그 능력은 "경건"에 있다고 믿었다. 단순한 믿음과, 실행이동반된 경건을 추구한 그의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사시도록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는 것이었다. 그의성도들은 기도로 일하는 법을 배웠고, 배우지 못한 천민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렇게 구령한자들을 "형제단"으로 만들려 하기보다는 순수하게 복음만을 증거했다.
국내에서 왕성하게 복음을 전하던 헤른후트의 용사들이 본격적으로 해외 선교에 나선 것은 1732년이었다. 덴마크 왕의대관식에 참석했던 진젠도르프가 서인도에서 온 흑인 노예와 그린란드의 에스키모인 두 명을 만나 노예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듣고는 자신의 성도들에게 돌아와 강한 도전을 주었던 것이다. 이때 토기장이 레온하르트 도버와 목수인 다피트 니치만이헌신하여 서인도 제도로 파송됐다. 노예주들은 손해가 생길까봐 이들을 감옥에 가두기도 했지만, 무역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면서헌신적으로 사역했던 이들은 1879년까지 36,698명을 구령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735년에는 일찍이 순회설교자로 활약했던 묘지관리자 크리스티안 다피트와 두 명의 개척자가 그린란드로 떠났다.모라비안들은 얼음으로 뒤덮인 척박한 땅에서 1881년까지 열아홉 명이 살해당하거나 질병으로 죽어갔지만 그 가운데서도그들은 이렇게 찬송했다. "보라, 얼음과 눈 속에서도 잃어버린 바 된 가련한 혼들이 구원을 받는구나. 기쁘다! 우리는죽임당하신 어린양을 밝히 보여 주기 위해 곤궁함과 고난을 견뎌내고 있도다." 결국 이들의 신실한 사역을 통해1,545명의 에스키모인들이 영생을 얻었다. 이외에도 모라비안들은 버진아일랜드, 북미, 남아프리카로 뻗어 나갔는데, 이를증오한 사탄은 1736년 자신의 종들을 통해 진젠도르프를 작센에서 추방시켰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삼아영국과 미국으로 건너가 선교 사역을 추진했고 전 세계를 순회하며 선교 사역을 굳건히 했다.
1737년에는 게오르크 슈미트가 아프리카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선교사로 보내셨으므로 어떤 악조건 가운데서도 복음이 전파될것이다."라는 확신 속에 사역했다. 이후 1882년까지 아프리카에서는 11,704명이 침례를 받았다. 계속해서1740년에는 북미 인디언들에게로, 1742년에는 중국으로, 1747년에는 페르시아로, 1754년에는 자메이카로,1756년에는 안티구아로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1760년에 진젠도르프가 죽기까지 226명의 선교사가 배출되었다. 이로써600명도 안 되는 헤른후트 성도들은 10년 만에 호주를 제외한 전 대륙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1805년에는 호주에도복음을 심었다. 그 뒤로도 1930년까지 200년간 세계 14개국에 3천 명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그들은 60명의성도 중 한 명꼴로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전해진다.
이 선교사들은 소위 "명문 신학교 출신"이 아니라, 성경을 사랑하고 복음의 순수한 열정을 지닌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그들은 손수 일하면서도 낯선 환경에 적응했고, 복음 전파는 그들이 살아 있는 이유였다. 한번은 무신론자인 농장주가아프리카에서 3천 명의 노예들을 아틀란타 섬으로 데려가면서 "만약 어떤 설교자가 파선을 당하여 이 섬으로 온다 해도 떠날때까지 그를 집에 가두고 하나님에 관해선 입 다물도록 만들겠다!"라고 큰소리쳤다. 이 말을 들은 두 명의 모라비안 청년이3천 명의 혼들을 주님께로 이겨오기 위해 스스로 종신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할 배에 올라타면서 가족들에게이렇게 외쳤다. "죽임당하신 어린양께서 그분의 고난에 대해 보상받으시기를!"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혀 산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느니라. 이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면 모든 사람이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판단하기 때문이라』(고후 5:14).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