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서 분류

공산주의가 성도의 믿음을 꺾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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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6월호>

내가(리차드 움브란트) 목사가 된 것은 나의 생애 계획과 거리가 먼 일이었다. 유대교에 속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종교에 관심은 있었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기도들을 외면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다. 자연스레 회의주의자가 된 나는 26세 때까지 쾌락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많은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은 27세 때 발병한 폐결핵 때문이었다. 시골에 내려가 요양을 하면서 처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했는데 철저한 무신론자의 기도였다. "하나님, 나는 당신이 안 계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만, 만약에 당신이 계신다면 제발 내게도 당신을 보여 주십시오!" 그런데 그 마을에는 죽기 전에 유대인을 주님께 인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그리스도인 목수가 살고 있었다. 마침 나는 루마니아의 12,000개의 마을 중 그 목수의 마을로 요양을 갔던 것이고, 그는 내게 성경을 주었다. 그 성경을 통해, 먼 신화 속 인물 같았던 예수님이 실제적인 분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비록 나는 "절대로 당신의 제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나는 돈과 여행과 쾌락을 원하지만 당신의 길은 진리라고 해도 십자가의 길이므로 싫습니다!" 하고 저항했지만, 그 순간 그분의 대답 같은 말씀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 길로 오라. 십자가를 두려워 말라. 너는 그 길이 가장 큰 기쁨인 것을 알게 되리라."

계속 성경을 읽으면서 그분의 순수하고 사랑이 가득한 인격을 보았을 때, 부패하고 이기적인 내 인생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결국 복음에 순종했고 이같이 헌신했다. "하나님, 저는 무신론자였습니다. 이제 저를 러시아에 보내시어 무신론자들을 구령하는 선교사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제가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더라도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이후 나의 삶은 급변했다. 그때까지 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아내는 나의 회심을 보고 예수님을 선택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에 없던 아들도 주셨다. 그 후 나는 여러 교회들을 살피면서 유독 마틴 루터에게 영적 친근감을 느꼈는데, 그는 화를 잘 내고 싸우기도 잘했지만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외칠 만큼 예수님을 사랑한 인물이었다. 나는 독학으로 설교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었는데, 목사들에 대해 지루하게만 생각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전 세계를 나의 교구"로 삼고 싶은 생각을 무엇으로도 누를 수 없었다.

그 시절 루마니아는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면서 파시스트 당원들이 득세하는가 싶더니, 곧이어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기 시작했고, 그런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러시아로 보내지 않으시고 러시아인들을 내게 보내 주셨다. 이로 인해 서방 유럽의 선교회 일을 하면서 3년 동안 10만 부 이상의 러시아어 복음서를 배포할 수 있었다. 종교를 파괴하려는 공산당의 움직임도 계속되었는데, 1945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종교 회의도 그 일환이었다. 그곳에서 그리스정교회 감독들, 로마카톨릭 신부들, 개신교 목사들, 칼빈주의자들, 유대인 랍비들, 이슬람교 지도자들 등 4천여 명이 한데 모여 "종교 회의를 주최한 스탈린"을 향해 박수갈채를 보냈다. 발언자들이 차례로 공산당과 기꺼이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며 축하 연설을 하자, 내 옆에 있던 아내 사비나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일어나서 저들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바른 수치를 씻어 주세요." 나는 "그러면 당신은 남편을 잃게 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주저함 없이 답했다. "그렇지만 겁쟁이 남편을 원하진 않아요." 나는 발언권을 요청하여 강단에 섰고, 사람들은 세계교회협의회 대표인 나의 축하 인사를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선포했다.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정부를 존중할 수 있습니까! 성경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금지하는 정부는 동정과 경멸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런 자들에 맞서지 않고 굴복하는 자들과 자리를 함께한다는 것이 수치스럽습니다. 교회는 정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이내 마이크가 꺼졌고, 박수와 야유 소리로 뒤섞인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 후 공산당은 더욱 강해졌다. 반대파 6만여 명이 처형당했지만 나는 살아 있었다. 다수의 성직자들은 공산당에 가담하여 자기 교인들의 죄를 밀고함으로써 이익과 안전을 보장받았다. 우리 가족은 여러 날 동안 "우리도 십자가를 지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곤 했다. 그리하여 1948년에 일제 검거되어 나는 강제 노동 20년 선고를 받고 투옥되었다.

공산주의 지하 감옥에 대한 "악명"은 둘게루 대령이 했던 다음의 말로 대변될 수 있다. "우리는 나치당원들처럼 살인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네가 살아서 고통받기를 원한다." 그들의 목적은 우리의 죽음이 아니라 배교였다. 공식적으로는 나의 실종 소식이 발표되었지만 나는 고문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죽기 직전까지 때리고 고문했다가 약을 주사한 후 다시 고문했다. 3년간 지하 9m에 있는 독방에서 해, 달, 별들, 꽃들을 잊고 살았던 때도 있었다. 하루는 적막한 독방에서 마태복음 5:12의 말씀을 기억하며 기뻐서 뛰기도 했다.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꾸며 갖은 악한 말로 너희를 거슬러 말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이는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1,12). 내가 뛰어다니는 것을 본 간수 하나는 내가 정신 착란을 일으킨 것으로 알고 직원들의 빵을 가져다줬다. 정말로 일주일 분량도 더 되는 큰 빵이었다. "너희의 상이 큼이라!" 어떤 날은 썩은 양배추 조각과 씻지도 않은 생선 내장 국이 나왔지만 나는 국그릇을 모두 비웠다. 어떻게 먹었느냐고 묻는 동료 죄수에게 난 이렇게 말했다.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지금쯤 석쇠에 구운 닭고기를 먹고 있을 미국의 형제들을 기억하고 그들과 함께 감사하며 국을 한 숟갈 넘깁니다. 또한 구운 쇠고기를 먹고 있을 영국 친구들과 함께 즐거워하면서 한 숟갈 넘깁니다.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한 덕분으로 나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나는 서방에 있는 친구들의 안락한 집과 그들의 서적들과 그들이 누리는 여유로운 휴가와 그들이 듣는 음악과 그들이 가족들과 나눌 사랑을 생각하며 함께 즐거워합니다. 그런 후 그 구절의 후반부도 기억합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 나는 서방 세계에 있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우리를 생각하고 기도로 돕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행복이 물질에서 나온다고 믿었지만, 나는 춥고 배고프고 누더기를 걸쳤어도 말씀으로 인해 행복에 겨울 수 있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고문은 날로 잔학해졌는데 특히 "재교육"이 그러했다. 공산주의 사상으로 똘똘 뭉친 죄수들을 감방 안에 함께 넣어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개조시키게 만드는 것인데, 이 죄수 출신의 재교육 요원들은 곤봉을 휘두르고 죄수들끼리 서로의 대변을 먹게 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기도 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자살을 감행하는 죄수들도 있었다. 나는 건강이 악화된 사람들만 모아 두는 제4호실로 옮겨졌는데, 오히려 그곳에서 가슴에만 간직해 왔던 "감옥 목사"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상처를 입고 고통당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가졌을 때보다 설득하기 수월했고, 그들에게 마음을 연 대화를 청했을 때 무신론의 허물은 죽음 앞에서 벗겨진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감옥에서 8년을 보낸 어느 날, 당국은 나를 석방시켰다. 나는 이 자유의 기회를 어떻게 사용할까 생각하던 중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강도를 더 높였다. 성도들에게 다가올 고난을 준비하게 했고, 특히 청년들에게는 희생과 순교를 대비하라고 가르쳤다. 공산주의자들의 집권이 끝나지 않은 한 다시 잡힐 것을 확신하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또다시 감옥에서 6년을 보냈다. 장장 14년의 투옥기간 동안 성경을 다 잊어버렸어도 네 가지 사실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곧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신 것,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랑이 최상의 길이라는 점이다. 출옥 후에 해야 할 일은 자명했다. 자유세계로 가서 내 몸에 난 "주 예수의 표"를 공개하며 공산주의의 실상을 외치는 일이었다. 그 흉터들은 공산 치하에서 박해받는 성도들의 상처였기 때문이다. 『옥에 갇힌 자들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하고 너희 자신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들을 기억하라』(히 13:3). 어떤 이들은 내게 복음만 전하고 공산주의를 공격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공산주의자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더욱 공산주의가 나쁘다고 외친다. 그들은 내 믿음을 조금도 꺾어 놓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박해는 선을 행하고 금식하며 자신의 빵을 나누는 성도들을 더욱 돋보이게 할 뿐이었다. 그런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들끼리도 죽이며 서로를 희생시킨다. 더욱이 절망과 죽음 앞에서 그들의 무신론은 그들을 지켜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공산주의자들을 구원할 의무가 있다. 핵폭탄보다 무서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꺼이 사용해서 처참한 무신론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야 하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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