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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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신뢰한 허드슨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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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6년 12월호>

흔히 "선교사"라는 말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이름이 있으니, 중국 선교의 아 버지 허드슨 테일러다(1832-1905). 그는 배타적인 중국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변발까지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고전 9:16-22). 그의 사역은 유난히 많은 고난이 뒤따랐는데, 고된 일정, 가족과 허다한 동료들의 죽음, 변발로 인한 다른 선교사들의 천시, 중국인들의 박해, 한 사람이 수십 명의 선교사를 움직이면서 감당하기에는 벅찼던 염려가 (고후 11:28) 안팎으로 밀려드는 삶이었다. 심지어 영국과 중국 간에 외교가 악화되어 수십 명의 선교사들이 학살당한 "의화단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당시 그는 "기도도, 생각도 할 수조차 없는 극심한 지경이지만 (고후 1:8)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고백하며 사역을 보다 더 진전시켜 나갔다. "하나님을 너무 적게 신뢰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지나치게 신뢰하는 것에는 결코 문제 될 게 없다!"라고 당당하게 외친 허드슨 테일러, 사실 그의 그런 믿음이 오랜 시간 연단을 통해 하나님에 의해서 다져진 훈련의 결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테일러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선교의 열정을 심어 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 때문에 테일러는 일찍부터 중국 선교의 필요성을 알았지만, 17세까지는 선교는커녕 신앙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그런 그를 복음으로 인도한 것은 당시 약국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손님들에게 주려고 모아 둔 "복음 책자"였다.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무료함을 달래려고 창고에서 꺼내든 책자에서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사역"이라는 문구를 읽었는데, 그는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 그의 어머니는 70km 정도나 떨어진 곳에서 테일러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고, 여동생은 한 달 전부터 그의 구원을 위해 하루 세 번씩 기도해 왔었다. 테일러는 자신이 구주를 영접하기까지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인도하셨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회심한 뒤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합당하게 살고자 결심했는데, 그러던 중 자신의 연약함과 목표가 없는 삶에 크게 상심하기도 했다. 몇 달 후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갈구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의 삶을 옭아매는 죄의 권세를 해결해 주신다면, 저는 세상적인 야망을 버리고 주님께서 지시하시는 땅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그날의 기도는 아버지가 늘 기도했던바 중국에 가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심어 주었고, 이후로도 그 확신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중국 선교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했고 중국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했다. 본래 허약했던 체질을 극복하고자 엄동설한의 날씨에도 체력 훈련을 강행했다. 또한 선교지에서의 불편한 생활에 익숙해지려고 딱딱한 바닥에서 자는 습관을 들였고, 최소한의 필요한 짐을 제외한 모든 물품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중국어로 된 <누가복음>을 구해 영어 성경과 일일이 대조하면서 중국어 단어들을 익히기도 했다. 그리고 의학 공부를 하라는 어느 선교사의 조언에 따라 한 의사의 조수로 들어가 일하며 배웠는데, 이로써 18세의 나이에 타지 생활을 시작하게 된 테일러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사람들을 움직이겠다는 결심을 했다. 실제로 4개월마다 지급되는 월급이 밀렸을 때도 인간적인 방법이 없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손길을 경험했다. 1년이 지났을 무렵,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의사가 그에게 견습의사가 되는 것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별다른 비용 없이 5년만 지나면 의사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테일러는 기도하던 중에 하루속히 중국에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느껴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는 좀 더 단기간에 의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위해 런던으로 향했다. 이때 중국선교회와 아버지로부터 동시에 "학비 전액을 지원하겠다"는 연락을 받은 그는 "누구의 지원"을 수용할지 기도하던 중 결국 두 제안 모두 거절했다. 이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공급받겠다는 의도였다. 이처럼 보이는 것을 신뢰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훈련을 통해, 그는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담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야말로 중국 선교에 있어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마침내 21세가 되던 해, 허드슨 테일러는 상해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그렇게 도착한 중국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정세가 심상치 않아 외국인들은 지정된 구역에만 거주할 수 있었고 각종 내전과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를 파송한 중국선교회는 신생 선교회였던지라 돈을 빌려 선교비를 지원해야 하는 형편이었고 제대로 된 역할을 해 주지 못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테일러는 당시 그의 누이에게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물 없인 성경을 읽을 수가 없구나."라고 심정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그는 "보내신 분의 일"을 잊지 않고 15개월간 열 번의 순회 설교를 다녔는데, 상해에서 약 20km 내외의 지역들이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1,800여 권의 중국어 신약성경과 2천 권이 넘는 책자 및 전도지를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배포했는데, 이는 당시 중국인 대부분이 문맹자였음을 감안하면 그가 그렇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지역들을 다녔는지를 잘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파에 신실했던 테일러에게 중국에서 그보다 먼저 사역해 왔던 다이어 양을 아내로 주셨다. 이후 동료 선교사인 파커 박사의 병원까지 맡게 되면서 더 많은 양무리를 돌보고 임무를 감당해야 했던 테일러 부부는 1년 만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고국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중국에 온 지 6년 만이었다.

그로부터 5년간 런던에서 지내며 의학 공부를 다시 시작한 테일러는 중국 영토에 대해서도 철저히 연구했는데, 그 과정에서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땅이 매우 광활하다는 걸 알고는 몹시 놀라기도 했다. 그는 다시금 중국인들에 대한 연민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동역자들을 찾아서 함께 중국으로 가라 !"는 하나님의 뜻을 점차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추수할 일꾼들을 구했는데(눅 10:2), 경험을 되살려 선교사가 파송되지 않은 11개의 성들과 몽고에 각각 두 명씩 총 24명의 사역자를 보내 주시라고 간구했고, <중국의 영적 필요와 요구>라는 제목의 책을 써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급했다. 이 책은 출간된 지 3주 만에 재판해야 할 정도로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를 읽은 래드스톡 경은 "친애하는 형제여, 하나님께 더 많이 요구하십시오! 100명의 일꾼을 주시라고 간구하세요! 주님께서 넘치게 채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이에 선교사를 모집하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한 테일러는 마침내 "중국내지선교회"를 창설했다. 이 선교회는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재정 후원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독특한 원칙을 세웠는데, 이것은 그동안 하나님의 공급하심만을 의지해 온 테일러의 믿음의 산물이었다. 그는 영국 전역을 종횡무진하면서 "중국 복음화에 대한 영국인들의 의무"를 역설했다. 한번은 어느 집회에서 "선교 헌금을 모금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묻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돈을 내는 건 가장 쉬운 일입니다. 흔히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한 명의 혼조차 구원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드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후원할 재정은 절대로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1866년 5월 25일, 허드슨 테일러의 그런 확신 속에서 세워진 중국내지선교회는 그를 포함한 16명의 선교사들을 상해로 파송했다. 많은 이들이 확실한 후원 기관도 없이 이역만리로 떠나는 것에 우려를 표했지만, 테일러는 "저는 자녀들까지 데리고 갑니다. 물론 그 아이들이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걸 잘 압니다. 어떻게 제 자식들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제가 자식들을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저의 필요를 아시고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합니다."라는 말로 모든 염려를 일축했다. 그의 말처럼 중국내지선교회는 주님께서 그들을 보살피신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테일러는 중국의 미개척 지역들을 위해 추수할 일꾼들을 계속 구했고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1887년에는 600명의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자 원했고 그중 102명이 최종 선발되었다. 그리하여 선교회는 테일러의 사후에도 1,300여 명의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었고, 별도의 요청 없이도 2천만 달러의 후원을 받아 한 번도 돈 걱정을 하지 않았다는 간증을 남겼다. 1932년 통계에 따르면 침례받은 중국인들만 해도 10만여 명으로 집계되었다.

허드슨 테일러가 얻은 열매의 비결은 단 하나, "참 포도나무" 안에 거하면서 끊임없이 그분을 의지하는 것뿐이었다(요 15:5).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열매를 맺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주님만을 신뢰하는 그의 확신에 찬 권면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어, 다음과 같이 우리를 열매 맺는 삶으로 초청하고 있다. "자신을 부인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평이한 인생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선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편하게 믿으려는 성도를 위한 '쉬운 그리스도'와, 주님 안에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살려는 성도를 위한 '고난의 그리스도'가 각각 계시는 게 아닙니다. 오직 한 분 그리스도만 계시는데, 당신 역시 그분만을 신뢰하면서 주님 안에서 더 많은 열매를 맺고 싶지 않으십니까?"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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