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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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삶을 산 프랜시스 애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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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9월호>

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흔히 무지한 교인들은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미소 띤 얼굴에 부드러운 인상을 풍기시는 분” 정도로만 생각한다. 각종 비성경적인 그림에 묘사된 예수님의 모습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차분히 읽어 보면, 그러한 편견과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목수이셨던 데다가 머리 둘 곳도 없으셨으므로 “야전 군인”처럼 거친 인상을 풍기는 분이셨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미소보다는 슬픔과 눈물에 훨씬 더 익숙한 분이셨다. 『그는 모양도 우아함도 없으시니 우리가 볼 때에 그를 흠모할 아름다움도 없음이라. 그는 사람들에게서 멸시받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에 익숙한 사람이라』(사 53:2,3). 이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슬퍼하시고(마 26:37,38, 막 3:5) 우셨다는(눅 19:41, 요 11:35) 묘사는 매우 익숙한 반면, 기뻐하시고 웃으셨다는 이야기는 왠지 낯설기만 하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기뻐하셨다는 내용은 복음서를 통틀어 단 한 번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기들에게는 나타내셨을 때였다(눅 10:21). 이러한 점을 곱십어 볼 때, “고등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근대 철학과 이신론 등의 온갖 편견과 아집을 붙잡고 멸망해 가는 동안, “잘난 것 하나 없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인 일만큼 통쾌한 일도 드물다. 이런 역사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프랜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 1745-1816)였다.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1745년 8월, 영국 스태퍼드셔 주 버밍엄 근처에 있는 핸즈워스(Handsworth)에서 가난한 부부였던 조셉 애즈베리와 엘리자베스 애즈베리의 둘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독자”처럼 컸는데, 그가 겨우 세 살이었을 때 누나였던 사라가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딸의 죽음으로 인해 몇 년 동안 우울해했지만, 나중에는 이 일이 오히려 그녀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실로 어린 프랜시스에게는 복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슬픈 일을 당했을 때 프랜시스의 어머니처럼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께 나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라의 죽음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일에 대해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시기도 한다. cf. 사 57:1), 자신의 죄과로 인해 고난이 닥쳐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완고하게 하나님을 탓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계 16:21). 프랜시스의 어머니는 구원받은 이후 신앙에 관한 서적들을 읽고 기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대접하는 데도 힘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할 정도의 사람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프랜시스는 어린 시절이 한참 지난 청소년이 되어서야 어느 순회 설교자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어린 프랜시스는 예닐곱 살쯤 되었을 때 학교에 입학하여 성경을 읽을 수 있었지만, 하필이면 그를 잔인하게 구타하는 교사를 만남으로써 학교에 가는 것에 대해 심한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결국 불과 열세 살의 나이에 학업을 그만두고 근처에 있는 한 제철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제철소 주인은 그 이름이 “폭솔”로서 감리교도였는데, 프랜시스는 그의 아들 “헨리 폭솔”과 친하게 지냈다. 헨리의 영향을 받은 프랜시스는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웬즈베리(Wednesbury)에서 열린 감리교도들의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마침 그 집회에는 순회 설교자 “알렉산더 매더”(Alexander Mather)가 있었다. 매더는 “지금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십시오. 자신이 무력한 죄인임을 깨달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어떤 다른 자격 요건도 필요 없습니다.”라고 설교했다. 이 설교에 깊이 감명을 받은 프랜시스는 또 다른 친구였던 “윌리엄 에머리”와 함께 헛간에서 주님께 기도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예수 그리스도, 아주 은혜롭게도 그분의 보혈을 믿는 믿음을 통해 죄로 물든 나의 혼을 의롭게 해 주신 분”을 영접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는 그 마을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생애 첫 설교를 맨우즈(Manwoods) 근교의 어느 오두막 안에서 했다. 당시 그는 제철소 일을 그만두지 않은 채 매주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교했지만, 스물한 살이 되던 1766년부터는 전담 순회 설교자로 임명되어 스태퍼드셔, 글로스터셔, 베드퍼드셔, 콜체스터, 윌트셔 등 주로 영국 남부 지역에서 5년 동안 설교했다. 어린 나이의 사역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랜시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섬겼던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항상 활기가 넘쳤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제철소에서 일하던 시절, 하나님께서 그의 체력을 충분히 “연단시키셨기” 때문일 것이다. 1771년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프랜시스는 드디어 미국 사역에 자원하게 되었는데, 그 사역에 자원자를 모집했던 “요한 웨슬리”를 비롯해서 그 누구도 그가 사역에 있어서 큰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주가 말하노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이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이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라』(사 55:8,9).


당시 미국으로 건너갔던 영국국교회, 장로교, 회중교회 출신의 설교자들은 대부분 교육 수준이 높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계층이었으나 감리교 설교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물론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고등 교육을 받은 영국국교도 출신이었지만, 미국으로 건너간 대부분의 감리교 설교자들은 대장장이, 농부, 신발 만드는 사람, 목수 출신으로서 고등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고, 프랜시스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언변이 유창하지 못했는데, 어떤 사람은 그의 설교를 “산만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아마도 신경 쓸 것이 많고 순회 설교를 다니느라 공부를 거의 못해서 그럴 것이다... 일정한 체계를 갖추지 못한 설교처럼 그는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훌쩍 뛰어넘어 버린다.”라고 비평하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논리 정연하고 유창하게, 즉 “학자답게” 설교하는 것을 설교자의 필수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들어 쓰시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고전 1:26-29).


하나님께서는 고등 교육을 받은 바울(행 22:3)과 같은 수재들뿐 아니라 뽕나무 열매를 따던 아모스(암 7:14)나 물고기를 잡던 베드로와 요한(마 4:18-22)에게도 그분의 말씀을 맡기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교육 수준이나 말의 유려함과 관계없이 어떤 사람이라도 쓰실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성경 지식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피터 럭크만 목사조차 글과 설교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럭크만 목사가 글과 설교를 논리적으로 전개할 줄 모르는 설교자였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섬세한 펜으로 선이 딱딱 떨어지는 그림만 그리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투박한 목탄으로 마음속 깊은 곳을 울리는 그림을 그리시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강단에 선 설교자가 그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한, 아무리 “투박하게” 전달되는 설교라 할지라도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설교자의 말솜씨로만 판단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의 교만을 읽으셔서 설교자를 통해 준비하신 진리를 감춰 버리시고, 오히려 그럴듯한 언변을 늘어놓는 종교 사기꾼들에게(롬 16:18) 놀아나게 하신다. 실로 프랜시스 애즈베리나 피터 럭크만과 같은 설교자들의 열매를 교황을 위시하여 극단적 칼빈주의자들, 교회의 크기와 교인 수만을 중시하는 대형 교회 목사들의 열매와 비교해 보면, 성령 하나님께서 누구의 설교에 역사하셨는지 그리고 어떤 설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평생을 “순례자”로 살았다. 특히 “순회 설교자”로 활동했는데, 보통은 그렇게 하다가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지면 어느 지역 교회에 정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45년 동안 44만km 이상을 돌아다니면서 평균적으로 하루에 한 번씩 설교했다고 한다. 철저하게 “순례자의 삶”을 산 것이다. 그러면서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삶을 살았는데, 사실 그럴 수조차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가 미국 전역을 순회하다 보면 설교하는 지역의 어느 가정집에 며칠 동안 머물다가 떠나야 했는데, 이렇게 머물렀던 집만 해도 “수천”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사생활”이 거의 없는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프랜시스 애즈베리를 보다 더 가깝게 알면 알수록 사람들은 그를 더욱더 좋아하고 존경했다고 한다. 그는 보통 4시에서 5시 사이에 일어나 고요한 아침을 이용하여 한 시간 동안 기도했고, 먹고 입는 것에 있어서 검소했으며 집도 없었다. 한번은 그가 순회 설교를 돕는 한 동역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감리교 사역에 있어서 필요한 장비는 이렇게 구성된다네. 곧 말 한 마리와 고삐와 안장, 옷 한 벌, 시계, 휴대용 성경, 찬송가 등인데 그 이외의 것들은 방해만 될 뿐일세.”


사람들은 프랜시스 애즈베리를 미국 감리교회의 한 획을 그은 리더로서 평가한다. 그의 영향력에 관해 설명하는 한 자료에 의하면, 왕성하게 사역했을 당시의 그에게 편지를 쓸 때 “미국에 있는 프랜시스 애즈베리 감독에게”라고만 쓰면 주소 없이도 편지가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는 미국 최초로 주일 학교를 세웠고 4천 명의 설교자들에게 안수했다. 그들 대부분은 프랜시스처럼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1816년 어느 봄날, 일흔 살의 나이에 더는 말을 탈 수 있는 몸이 아니었지만,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미국 각지의 사역을 돌보고 있었다. 리치먼드(Richmond)에 이르렀을 때는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상태였지만, 그가 사랑하는 도시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야겠다고 결심한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오래된 교회의 책상에 앉아 베개에 의지하여 마지막 설교를 했고 그다음 행선지로 향하던 중 기력을 완전히 소진했다. 오랜 친구의 오두막으로 옮겨진 그는 이틀 뒤에 사랑하는 형제들의 전송을 받으며 하나님 곁으로 갔다. 그와 동행했던 한 형제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전했다.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그가 살아 있을 때의 모습처럼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확신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고 소망이 넘치는 모습으로, 바로 오늘, 1816년 3월 31일 주일 오후 4시에 주님 곁으로 간 것입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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