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서 분류

선교사가 된 크리켓 선수, 찰스 스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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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5월호>

교회의 역사에서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은 사역자들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데가 있다. 왜냐하면 "세리"(마태), "의사"(누가), "어부"(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천막 만드는 사람"(바울, 행 18:3), "노예선 선장"(존 뉴턴), "구두 수선공"(윌리엄 캐리), "변호사"(찰스 피니), "야구 선수"(빌리 선데이), "건축 제도사"(클라렌스 라킨), "라디오 디스크자키"(피터 럭크만) 등 "신학"과는 전혀 무관한 "직업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옥석을 찾아내셔서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마치 각양각색의 악기들이 오케스트라로 모여 아름다운 교향곡을 연주하듯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개성을 십분 활용하셔서 그분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것이다. 『다양한 역사들이 있으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동일하니라』(고전 12:6).

사실 구원받고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온 성도라면 누구나 다른 성도들과는 구별되는 그만의 독특한 "쓸모"(고전 12:12-27)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전담 사역자"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고전 3:9)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 개개인이 다른 어떤 성도들로 "대체가 불가능한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 모두는 "우리의 주인께서 우리 각자의 몸과 은사와 재능을 24시간 내내 쓰고 싶어 하실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언제 전담 사역자로 부르시더라도 순종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본 글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일꾼들처럼 신학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전담 사역자로 부르신 또 한 명의 "믿음의 사람"에 관해 다루려고 한다.

찰스 토마스 스터드(Charles Thomas Studd, 1860-1931)는 1860년 12월 2일, 삼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에드워드 스터드는 경마 선수였을 뿐만 아니라 경마장을 건설하기도 했는데, 매년 열리는 경마 대회인 "그랜드 내셔널"(Grand National)에서 우승한 전적도 있었다. 아버지의 그런 사행성 짙은 직업이 어린 스터드에게 영적으로 좋은 영향을 끼쳤을 리 만무하다. 실제로 에드워드는 자기 친구에게 가진 돈 모두를 자신의 경주마에 걸라고 종용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런던에서 열린 D.L. 무디의 집회를 통해 구원을 받았고 이전의 삶을 완전히 청산했다. 경마를 완전히 그만두었으며, 극장에도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혼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는 일에 열성을 내는 등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구원에 관한 한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드워드의 집에 잠시 머물던 한 복음전도자가 이제 막 나가려던 C.T. 스터드를 붙들었다. "젊은이, 자네는 그리스도인인가?" 스터드는 말을 더듬는 듯하더니 "글쎄요, 아마 어렸을 때부터 그랬을 걸요."라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 복음전도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를 보게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네를 위해 죽으신 것을 알고 있는가?" 물론 스터드는 이 질문에 대해 긍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의 마음을 뒤흔드는 결정타가 날아왔다. "자네는 이 구절의 다음 부분, 그러니까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도 믿고 있나?" 잠시 머뭇거리던 스터드는 "아니요."라고 정직하게 대답했다. "구절의 반쪽은 믿고 나머지 반쪽은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관성 없는 태도가 아닌가?" 스터드는 자신이 코너에 몰렸다는 사실을 인지했고 남자답게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이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복음을 전하는 "구령자"는 구원의 문제에 관한 한 반드시 집요하고 꼼꼼해야 한다. 하마터면 한 명의 혼이 예수님에 대해 들었으면서도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해서 믿지도 못한 채 지옥으로 갈 뻔하지 않았던가!

의 일화는 C.T. 스터드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말하자면 스터드는 그 이전의 청소년 시절을 구원받지 않은 세상 사람으로서 보냈던 것이다. 실제로 스터드는 꽤나 유복한 가정 환경 속에서 영국의 대표 명문고교인 이튼스쿨에 입학했고, 16세가 되었을 때는 "크리켓"에 두각을 나타냈다. 크리켓은 야구와 비슷한 스포츠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인지도가 낮지만 세계적으로는 아주 인기 있는 팀 스포츠이다. 스터드는 19세가 되던 해에 팀의 주장이 되었고, 당대에 손꼽히는 크리켓 선수가 되었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그의 타격은 모든 "크리켓 볼러"(공을 던지는 투수)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고 한다.

이 시기의 스터드는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고전 2:14)으로서 크리켓의 매력에 빠져 혼적으로만 열심을 냈을 테지만, 그가 크리켓을 통해 배운 것들은 후일 사역자로서 『선한 일에 진력하는』(딛 3:14) 데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크리켓은 경기 시간이 아주 긴데, 심지어 경기를 일주일씩 하기도 한다. 점수를 얻으려면 끊임없이 뛰어야 하고, 몸을 향해 공을 던져도 반칙이 아니기 때문에 공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인내심과 집중력으로 오랜 시간을 견뎌 내야 하고, 항상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끊임없이 뛰어야 하는 크리켓 선수로서의 경험은, 구원받은 이후 선교사로 헌신한 스터드에게 엄청난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들풀과 참새들도 돌보시는(마 6:30; 10:29)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이 세상에는 "우연"이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혹여나 하나님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일들이 펼쳐진다 해도, 주님께서 그 일들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의도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주의를 기울이면서 모든 일에 신실해야 한다. 만일 스터드가 그때 인내와 투지를 배우지 못했다면 선교사로서 성공하지 못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네 모든 길들에서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가 네 길들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스터드가 하나님께 헌신한 계기가 된 일화 또한 독특하다. 어느 날 그는 한 무신론자가 "만일 내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고 떠들어 대는 것들을 믿었다면, 나는 세상으로 나가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설교했을 것이다."라며 비꼬는 글을 읽었다. 스터드는 이 글을 읽으면서 잃어버린 혼들을 위해 인생 전체를 사용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다. 하나님께서는 "발라암" 같은 사람도 쓰셔서 위대한 예언을 하게(민 24:15-19) 하실 수 있는 분이기에, 한 무신론자의 글을 통해서도 그분의 종을 부르시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들이랴?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 같은 사람은 쓰시지 않을 거야."라는 식의 어리석은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렇게 헌신하게 된 스터드는 여섯 명의 동역자들과 함께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 선교에 동참했다. 세간에는 이들이 에든버러, 런던,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를 선교의 열정으로 휩쓸어 버린 "케임브리지 세븐"으로 알려져 있다. 1885년 2월 5일, 이들은 영국 각지를 거쳐 가는 항해를 시작했고, 항해 도중에도 많은 혼들을 주님께로 이겨왔다. 이때가 스터드의 나이 25세였다.

1885년 3월 18일, 중국 상해에 도착한 "케임브리지 세븐"은 각지로 흩어져서 각자에게 맡겨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갔다. 외국인을 배척하는 "자존심이 강한" 청나라 사람들에게 다가서기 위해 오죽하면 허드슨 테일러가 변발했다는 일화도 있거니와, 스터드 역시 마을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선교사들의 집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부수어 버린 지역에서 사역을 지속해 나가야 했다. 결국 그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해 냈고, 후일에는 그의 몫으로 아버지가 남긴 유산 전부를 중국 선교에 사용하겠다는 서류에 서명하기까지 했다. 모든 선교 사역이 그렇겠지만, 특히 중국 선교사들의 사역의 실상을 접하고 있노라면, 그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바위처럼 굳어 있는 완고한 마음을 깨뜨리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망치질"(렘 23:29)을 하되, "석공"처럼 "무릎을 꿇고 다가서서" 내리쳐야 하는 것이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오히려 자신의 영예를 버리고 종의 형체를 입으시어 사람들의 모습을 취하셨느니라. 그리하여 사람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에까지 순종하셨으니 십자가의 죽음에까지라』(빌 2:7,8).

이후 1888년에는 "프리스킬라 리빙스턴 스튜어트"라는 동료 선교사와 결혼했고, 둘 사이에서 다섯 명의 딸이 태어났는데 한 아이는 중국에서 죽었다. 스터드는 34세가 되던 해에 건강 문제로 인해 아내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고, 1900년까지 머물다가 다시 인도로 떠났다. 그 무렵 스터드는 7년 동안 어느 한 교회를 맡아 사역하게 되었는데, 그의 사위가 증언하기를 "이 교회는 주님께로 회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피해야 할 장소가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까지 어떻게든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아주 "부드러운 말들"만 늘어놓는 목사들이 진지하게 숙고하고 배워야 할 대목이다. 죄인들도 "충분히 견딜 만한" 설교를 늘어놓는 목사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다. 『불의한 사람은 의인에게 가증하고,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가증하니라』(잠 29:27).

이후 스터드는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갔는데, 당시 "벨기에령"이었던 콩고의 니앙가라를 비롯하여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많은 혼들을 주님께로 이겨왔다. 1917년에는 벨기에 정부가 그를 정부와 선교 사역의 가교 역할을 해 줄 사람으로 임명하여 학교들을 세우기도 했다. 1929년에 아내가 먼저 주님 곁으로 갔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31년 7월 16일에 스터드도 뒤따라갔다.

그는 "C.T. 스터드가 죽으면 어떻게 하죠?"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때는 입에 웃음을 한껏 머금도록 하세요. 우리 모두는 할렐루야를 외칠 겁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여전히 살아 계시니 다른 것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이 말처럼 스터드는 "할렐루야"를 그의 입술에 담고 주님 곁으로 갔다. 크리켓 경기에서처럼 "아웃"이 될 때까지 기회가 닿는 한 끊임없이 그리스도께 혼을 "득점해" 오기 위해 뛰었던 C.T. 스터드는 이런 좌우명을 품고 살았다고 한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을 위한 나의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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