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서 분류

오바디아 홈즈 (Obadiah Holmes, 1610-1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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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10월호>

하나님께 쓰임받는 종들은 자신의 생애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있었음을 여러 가지 증거들을 통해 감지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세상 지향적으로 살았던 사람이 얼마나 고생하며 살았는지, 또 그런 가운데서 죽음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가 누구의 도움을 받아 풀뿌리로 연명하여 소생하게 되었는지 등의 좀 더 이색적인 삶의 전개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악인은 지옥으로 돌려질 것이요,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민족들도 그러하리라』(시 9:17). 『악인은 자기 얼굴의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으리니 그의 모든 생각에는 하나님이 없나이다』(시 10:4). 『주가 말하노라. 가난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 때문에 이제 내가 일어서리라. 내가 그를 비웃는 자로부터 그를 안전한 곳에 두리라』(시 12:5). 『주께서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보이시고 정직한 자에게는 주의 정직하심을 보이실 것이요, 순결한 자에게는 주의 순결함을 보이시고 완고한 자에게는 주의 완고하심을 보이시리니 이는 주께서 고난받는 백성들은 구원하시나 교만한 눈은 낮추실 것임이니이다』(시 18:25-27).

오바디아 홈즈는 교계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독자 여러분들도 신약 교회사에서 그의 이름을 한 번도 조우해 보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믿음의 용사들” 중에 왜 그의 이름이 등재되었는가? 이름이 알려진 일꾼들 대부분은, 자기가 쓴 자서전이나, 그를 알고 함께 동역했던 형제자매들이 그가 주님 곁으로 간 후에 그의 섬김의 행적들을 기록한 책을 통해 비로소 알려졌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게 된 경로나, 주님을 만난 후에 이전의 생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인생 역정을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만 드림으로써 자기 생을 하나의 전설이 되게 한 것, 또는 다른 성도들에게 본보기가 됨으로써 보여 준 지상 생명의 가치를 후대 사람들로 배우게 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러나 내가 자비를 입은 것은 이 때문이니, 곧 먼저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셔서 후에 그를 믿고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6). 여기에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어떤 성도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했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일을 기억해 주신다는 점이다. 『나도 모든 일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한 것같이 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노니 이는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전 10:33).

현대 교회들, 특히 이 나라 교회의 목사란 자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단 한 걸음도 떼지 않는다. 목사들이 모이면 구령을 얼마나 했다는 간증은 단 한마디도 없이 커피나 콜라를 홀짝거리면서 자기 교회에 모여든 사람 수와 그들에게서 걷은 헌금 액수나 자랑하고 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을 보라! 특히 사도 바울, 베드로, 요한, 야고보, 누가를 보라! 예수님은 어떠신가? 『이 말씀을 하신 후 약 팔일째 되는 날 주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시더라』(눅 9:28).

필자는 일부러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오바디아 홈즈 형제를 이달의 “믿음의 용사”로 선정했다.

오바디아 홈즈는 1610년 영국 맨체스터 주 디즈버리(Didsbury)에서 아버지 로버트와 어머니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홈즈 가정은 1638년 미국 뉴잉글랜드로 이주하여 처음에는 매사추세츠 주 살렘에 정착했다가 후에 레호보스(Rehoboth)로 옮겼다. 그는 레호보스에서 사는 동안 자유인의 신분을 얻었고, 동시에 한 시민으로서의 발언권과 투표권도 얻었다. 그 무렵 홈즈는 그곳에서 혼의 자유도 얻었다. 홈즈는 구원받은 후에 곧바로 침례교회에 속했다. 그는 종교적 자유를 찾아 로드아일랜드 주로 이사했고, 미국에서 첫 번째 침례교회였던 존 클라크(John Clark)의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1651년 홈즈는 존 클라크와 존 크랜달(John Crandall)과 동행하여 매사추세츠 주로 갔다. 그들은 윌리엄 윗터(William Witter)의 집에서 경배를 드렸다. 그들이 여행 중에 드린 그 경배는 미국 교회사에서 종교의 자유에 가장 크게 기여한 헌신예배 중 하나였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자신의 생애가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일에 참여한 성도 자신은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수년간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그 기간에 일정한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의 생활은 아무런 불편 없이 영위될 수 있다. 수년간 일에 열중하다 보면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가족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항상 그와 동행해 주셨음을 분명히 알게 해 주신다. 우리 교회 찬송가 <영광을 주께> 325장의 『주와 같이 길 가는 것』과 328장의 『주와 동행하는 것 영광이로다』는 바로 주님과 동행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성도들이 작사한 것이다.

1651년 7월 20일, 클라크 형제가 설교하는 동안 이들 세 사람은 체포되었고, 그들에게는 이런 혐의가 씌워졌다. 즉 “다른 사람들을 미혹하고 오도하여 그들의 잘못된 판단과 실행을 추종하게 한다.”라는 혐의였던 것이다. 오바디아 홈즈를 향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그 누구에게도 다시 침례를 주지 않겠다고 공언했으면서도 전에 침례(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었다. 따라서 전에 받았던 세례를 부인하게 만든 것이다. 그로 인해 전에 세례를 주었던 교회들은 교회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규례들과 행사들도 무효화되었으며, 유아에게 주는 유아세례도 부인하였다.” 그리하여 그 죄목으로 그들에게는 벌금이 부과되었다. 만일 벌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그들은 그에 준하는 채찍질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홈즈가 이 문제를 숙고해 보니, 벌금을 지불하게 된다면 그것은 범법을 시인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홈즈는 양심을 위하여 고통받는 것을 선택했다. 1651년 9월 5일, 홈즈는 보스턴에 있는 병영지로 이송되어 자기가 믿는 것을 인증하고 그의 피로 대신했다. 형을 집행하는 사람은 세 가닥의 가죽 끈으로 만든 채찍으로 홈즈를 있는 힘껏 30대나 내리쳤다.

홈즈는 그때의 실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자가 나의 등에 가죽 채찍을 내리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나의 육체가 쓰러질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직 지지 않으셨다. 따라서 그의 채찍질로 인해 주님께서 친히 들어오시기를 기뻐하시는 내 마음과 혀를 그릇이 넘칠 정도로 채우셨다. 내가 내지르는 목소리와 더불어 주님께 기도하오니, 주님께서는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시고, 나로 인해 실망하지 아니하셨음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해 주소서. 그러므로 이제 진실로 채찍들이 내게 내리쳐질 때 나로 하여금 전에는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임재가 영적으로 임하심을 알게 하소서. 그리고 외적인 고통을 내게서 잘 제거해 주시어 내가 잘 이겨 내게 하옵소서. 비록 슬플지라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하옵소서.’” 홈즈는 형장에서 풀려날 때 집행관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장미로 때리듯 하는 것 같았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존 헤이즐과 존 스펄은 홈즈가 채찍질을 당한 후에 그를 도왔다. 두 사람은 그에게 베푼 동정심으로 인해 체포되고 벌금을 물었다. 오바디아 홈즈는 뉴포트(Newport)에 있는 침례교회의 부목사가 되었다. 그와 그의 아내 캐서린은 10명의 자녀들로 복을 받았으며, 그들의 자손 중에는 아브라함 링컨의 가문에 속한 자도 있었다.

그 후 오바디아 홈즈는 1682년 10월 15일에 잠들었다. 『그들에게 자유를 약속하나 자기들 자신은 타락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정복을 당하면 그는 정복한 자의 종이 되는 것이라』(벧후 2:19).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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