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그리스도의 용감한 군사들 분류

밥 존스 시니어(Bob Jones, Sr., 1883-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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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8월호>

1. 밥 존스 시니어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그린빌(Greenville)에 있는 밥존스대학교(Bob Jones University)의 설립자이다. <킹제임스성경>을 초석으로 삼아 아메리카합중국(USA)이 탄생했을 때, 헌법과 영토는 위로부터 받았지만 국가를 구성하는 3대 축 가운데 하나인 국민은 종교의 박해를 피해 대서양을 건넌 양키들(Yankees)이었다. "양키"는 주로 백인을 가리키며, 이들이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주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를 직접 손으로 만드셨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창 2:7).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고 엉터리로 번역했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의 본문처럼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로 되었어야 하는데, 개역개정판은 하나님의 숨결인 영을 불어넣었더니 사람이 혼이 된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 있는 영이 되었다고 엉터리로 번역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 성경을 쓰는 자들은 인간이 몸, 혼, 영으로 되어 있다는 "삼분법"을 무시하고 인간이 몸과 영혼으로 되어 있다는 "이분법"을 가르치기에 신학과 교리가 첫 삽부터 엉망이 되고 말았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의 고린도전서 15:45에는 『따라서 이와 같이 기록되었으니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느니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느니라.』라고 바르게 되어 있는 반면,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은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 이 되었나니』라고 되어 있다. 혼은 없고 영만 두 번 나온다. 이 성경을 쓰는 목사들과 교인들, 신학교 교수들과 학생들은 모두 설익은 빵 같은 자들이다.

왜 내가 이 점을 먼저 부각시키는지 독자 여러분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 밥 존스 시니어는 미국이 낳은 설교자로서, <킹제임스성경>만이 미국인들에게 주신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임을 100% 믿은 선각자였다. 피터 럭크만 목사는 밥존스대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밥 존스 시니어 목사는 럭크만의 근면과 용기, 정직함,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믿음,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신앙 자세를 보고 그를 밥존스대학교의 교수로 임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럭크만 목사는 그곳 교수들이 성경에 대해 가졌던 자세 때문에 총장의 제안을 거절했었다고 그의 자서전에 밝혀 놓았다. 그들 교수들의 성경에 대한 자세란 "최초의 원본" 타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성령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신 성경은 최초의 원본뿐이라고 주장한다. 『선조 때부터 순수한 양심으로 내가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함은 나의 밤낮 기도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기억함이며,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를 몹시 보기 원함은 내가 기쁨으로 충만해지고자 함이라. 나는 네 안에 있는 가식 없는 믿음을 기억하노니, 이는 먼저 네 할머니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케 안에 있었고 네 안에도 있음을 확신하노라』(딤후 1:3-5).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케 안에 있었던 가식 없는 믿음이 디모데 안에도 있음을 기억한다고 썼다. 디모데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사용했던 성경은 최초의 원본이 아니었다. 바울이 최초의 원본으로 구원받고 가르치며 복음을 전했는가? 아니다. 물론 바울 자신도 성경 기록자였다(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밥존스대학교 교수들은 지금도 "원본의 영감" 타령을 하고 있다. 럭크만 목사는 그들을 평할 때, 설령 최초의 성경 원본이 지금까지 썩지 않고 남아 있어서 그것을 그들 앞에 내놓는다 해도 그들은 그게 원본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자들이라고 혹평했다. 나는 그런 밥존스대학교 교수들을 얼간이라고 평한다. 그들은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그런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잘 믿는다고 말하겠는가?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자들이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설쳐대면서, 밥존스대학교를 나왔기에 믿음과 지식이 출중하다고 여기고 있으니, 얼간이도 이런 얼간이들이 없는 것이다. 이 나라에도 몇몇 그런 얼간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개역성경이나 들고 다닌다.

피터 럭크만 목사는 밥존스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캠퍼스 한 귀퉁이에 있는 트레일러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는 밥 존스 시니어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그의 자서전에 썼다. 밥 존스 시니어는 미국이 낳은 그리스도인 챔피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럭크만 목사가 세운 펜사콜라성경신학원(Pensacola Bible Institute) 교실에 들어서면, 교실들 안에 걸린 액자들은 거의 다 밥 존스 시니어의 어록들이다. 한번은 그가 밥 존스 시니어의 서재에는 새벽 4시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이는 내가 럭크만 목사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보다 훨씬 더하다. 그의 어록 중에는 "순간을 위해 영원을 불태우지 말라."라는 어록도 있다.

밥 존스 시니어는 훌륭하고 신실한 목사이자 교수였던 반면, 그의 아들(밥 존스 주니어), 손자(밥 존스 3세), 증손자(밥 존스 4세)는 <킹제임스성경>을 배격한 근본주의자들이다. 성경도 없으면서 성경을 가르친답시고 나서는 영적 바리새인들인 것이다.

3. 밥 존스 시니어는 1883년 10월 30일 앨라배마 주 데일 카운티(Dale County)에 있는 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윌리엄과 어머니 조지아 사이에서 12명의 자녀들 중 11번째로 태어났다. 밥 존스의 가정은 신실한 그리스도인 가정이었기에 그 역시 어린 나이에 복음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여섯 살에 자기 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1세에는 주님을 영접하고 거듭났다. 그는 거듭나자마자 설교를 시작했고 한 감리교회 주일학교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일찍이 교회 성도들은 그의 위대한 설교 내용을 메모하곤 했다. 13세 때 그는 자기 교회를 개척했고 1년이 채 안 되어 회원이 54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5세에 정식으로 설교 인증서(License)를 받았으며, 곧이어 목사 안수도 받았다. 그리고 16세에는 다섯 개의 교회를 순회하며 설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설교에 복을 주셔서 많은 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올 수 있게 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밥 존스 시니어는 앨라배마 주 그린즈버러(Greensboro)에 있는 서던대학교(Southern University)의 한 단과대학에 다녔다. 그 시기에 그는 목의 결핵을 포함해서 생명을 위협하는 건강상의 문제에 직면하였다. 하지만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치유해 주셨다. 1905년에 그는 버니스 세필드와 혼인했으나 열 달도 못 채우고 결핵으로 인해 그녀를 잃었다. 1908년에는 메리 스톨랜워크와 혼인했는데, 그녀는 밥 존스 시니어가 설교한 어느 한 집회에서 구원을 받았다. 1911년에는 밥과 메리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밥 존스 2세(Bob Jones, Jr.)였다. 1915년까지 밥 존스 시니어는 미국 전역에서 큰 집회들을 열었으며,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수백 명이 구원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곳에 있는 술집과 영화관들이 폐업하기에 이르렀다.

1916년에는 열두 개의 교회들이 뉴욕 글로버즈빌(Gloversville)에서 6주간의 집회를 지원했는데, 17만 5천 명이 참석했고 1,7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주님을 믿겠다고 결심했다. 같은 해에 오하이오 제인즈빌(Zanesville)에서는 약 26만 6천 명이 참석했으며, 회심카드(Convert card)에 서명한 사람이 3천2백 명이 넘었다. 밥 존스 시니어가 가장 좋아했던 집회는 1921년에 열린 집회였는데, 5천 명의 성인들을 상대로 설교했고 그중 2천여 명이 회심카드에 서명했다. 그날의 설교 제목은 "인간의 죄"(Sin of men)였다. 이러한 일련의 성공적인 순회설교는 1930년대와 1940년대까지도 이어졌고, 밥 존스 시니어의 설교로 많은 혼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왔다.

한편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올바른 성경으로 가르쳐야겠다는 강한 부담을 느낀 그는 1927년에 밥존스대학교를 설립했다. 최초의 학교 부지는 플로리다 주 파나마시티 세인트 앤드류 만에서 약 7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나중에는 학교가 테네시 주 클리블랜드로 이전했고, 그 후 다시 현재의 위치인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그린빌로 옮겨 왔다. 밥 존스 시니어는 미국 내와 외국에서 순회설교를 계속했다. 매년 약 4만 마일을 여행하면서 수천 명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곤 했다. 그는 1968년 1월 16일 밥존스대학교병원에서 주님 곁으로 갔다. 그의 마지막 말은 "메리 개스턴, 내 신발을 가져와! 나는 설교하러 가야 해!"였다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위대하게 쓰임을 받은 보기 드문 종이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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