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그리스도의 용감한 군사들 분류

요한 웨슬리(John Benjamin Wesley, 1703-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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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7월호>

요한 웨슬리는 열아홉 명의 형제자매들 중에서 열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아마 잘 모르긴 해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출산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요한의 형제들 중 유아기에 살아남은 형제는 열 명뿐이었다. 요한의 아버지는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의 목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매우 헌신적인 어머니로서 자녀들을 기르는 데 열심이었다. 그는 런던에 있는 공립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724년에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학사학위를 받았고, 1727년에는 석사학위를 받았다.

1725년에 요한은 영국 국교회에서 집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로 짧은 기간이지만 설교를 했으며 연구원과 사회자로 일하기도 했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는 헬라어 강사로도 일을 했다. 1726년에서 1729년 사이에는 아버지의 목회 사역을 돕기도 했다. 요한은 1729년 11월의 어느 날인가부터 "신성회"(Holy Club)로 알려진 한 모임을 인도하기 시작했는데, "신성회"의 구성원들은 다 함께 성경을 읽었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했으며 주일마다 주의 만찬식을 가졌고 다양한 사역을 돕기도 했다. 그들의 헌신적인 섬김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들을 "메소디스트"(Methodist), 즉 "규칙을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들이 "감리교인답다"라는 의미였다.

1735년 10월, 요한은 그의 동생 찰스(Charles)와 다른 동료 두 사람과 함께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요한은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모라비안 목사 스팡겐베르크(Spangenberg)에게서 복음을 들었다(모라비안 교회는 교회의 권위와 의식과 주의 만찬 등을 중요시하는 교회로 알려졌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이 버림받은 죄인인 것을 몰랐으므로 그때까지 거듭나지 못했다. 다만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감리교에 속한 교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조지아 주 사반나에서 선교하면서 2년 넘게 복음 사역을 했고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1737년 12월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요한은 계속 설교를 했지만 많은 결실은 얻지 못했다. 그때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뭔가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그런 가운데 또 다른 모라비안 목사 피터 뵐러(Peter Boehler)를 만나게 되었고, 그는 요한과 그의 동생 찰스에게 복음을 증거했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에 요한은 모라비안 교회의 기도 모임에 참석하여 누군가가 마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들었는데, 그때 복음의 영광스러운 빛이 그의 마음을 채웠다. 그 순간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영접했다(동생 찰스는 요한보다 사흘 전에 먼저 구원을 받았다).

요한 웨슬리의 거듭남은 그의 설교를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그때부터 그는 조지 휫필드가 했던 것처럼 공중 집회를 열어 대중을 상대로 설교하기 시작했으며 그 기간은 약 1년 정도 되었다. 그 후로 그는 1740년까지 모라비안들과 만나서 그들과 함께 경배를 드렸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요한은 모라비안들과 교제를 끊었고, 1740년 여름에 처음으로 감리교학회(Methodist Society)를 출범시켰다. 감리교학회들은 거듭난 성도들의 모임으로 적어도 매주 한 번씩 모여서 기도하고 헌신했다. 요한은 그런 학회들을 방문하면서 순회설교를 했다.

그는 그때부터 매우 인기 있는 설교자가 되었고, 그가 다니는 곳은 어디든지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때 그의 아버지의 교회에서는 그가 설교하지 못하도록 했었다. 그러자 그는 교회 정원에 있는 아버지의 묘로 가서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또 한 번은 그웬납(Gwennap)에서 3만 명이 모인 가운데 설교하기도 했다. 그런 모임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요한을 위해 더 좋은 모임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는 일반 규칙을 정립하여 그들로 따르게 했고 소위 평신도 설교자들을 임명하여 설교하게 했으며 심지어 그들을 해외에 파송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이 모든 일들은 요한 웨슬리와 영국 국교회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했다.

요한은 1747년 초에 아일랜드에서 여러 개의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많은 혼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이키게 했으며,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정결한 생활을 하도록 강력히 권고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1775년에는 스코틀랜드에서 복음 전파를 감행했다.

요한 웨슬리는 1751년에 메리 바자이리라는 과부와 혼인했으나 그 혼인은 재앙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자녀도 없었고, 20년 후에 그녀는 요한을 떠났다.

1784년 요한은 필요한 법적 절차를 밟아서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성장하는 감리교를 만들었다. 그의 뜻은 아니었지만 그해 말 영국 국교회와 마지막으로 결별하게 되었다. 요한은 그가 선택한 지도자들로 감리교 운동을 전개하도록 임명하였다. 그때 알렉산더 마더(Alexander Mather)가 영국에서 사역하도록 임명되었고, 동시에 리차드 홧코트(Richard Whatcoat)와 토마스 바세이(Thomas Vasey)가 미국을 위해 일하도록 선임되었다. 또한 요한은 토마스 코크(Thomas Coke)를 그의 관리자로 임명하였다. 코크는 프랜시스 애즈버리(Francis Asbury)를 임명했고, 감리교 운동이 미국까지 확산되게 하였다.

요한의 사역의 범주로 말하자면, 그는 말을 타고 2만 5천 마일을 여행했으며 4만 2천 번의 설교를 했고 30권의 책을 썼다. 많은 글들을 썼으며, 설교문 200여 편을 번역했고 주석서와 찬송시들도 번역했다. 또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로 설교할 수 있었다. 웨슬리 신문(Wesley's Journal)은 그의 56년간의 사역을 다뤘다. 이런 사역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사람이 쓸 수 있는 글 중에서 가장 진을 빼게 하는 자서전적인 일이라고 말이다.

요한 웨슬리는 세상에 알려진 바로는 가장 활동적인 설교자였다. 1791년 3월 2일 그가 죽었을 때 감리교 운동은 118,000명의 회원이 넘었다. 요한 웨슬리의 유언은 "안녕히 계십시오!"(Farewell)였다. 믿음은 행동을 낳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시더라. 아멘』(마 28:19,20). 침례를 세례로 고치지 말라. 이대로 준행할 때 주님께서 그 성도와 함께 동행해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서 여섯 시간이나 매달려 계셨는지 그 의미를 아는 성도는 집이나 사무실에 앉아서 쓸데없는 일을 하며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는다. 요한 웨슬리의 섬김의 열정에서 배우라!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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