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그리스도의 용감한 군사들 분류

빌리 선데이(Billy Sunday, 1862-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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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6월호>

빌리 선데이 형제의 본명은 윌리엄 애슐리 선데이(William Ashley Sunday)이다. "빌리"는 어릴 적에 부모나 형제 혹은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애칭으로 불렀던 이름이다. 성년이 되어서도 어릴 때 이름을 그대로 쓰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인들 사이에서 흔한 이름인 "로버트"(Robert)는 어린 시절에 "밥"(Bob)으로 불리는데, 성장해서도 그 이름 그대로 불렸던 밥 존스 시니어(Bob Jones Sr.)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로버트 존스 시니어로 불러야 한다고 떠들어 댔지만, 그를 존경한 피터 S. 럭크만 목사는 강하게 반대했다. 지금에 와서 그분의 이름을 로버트 존스 시니어라고 부른다면 누가 그 이름을 알아보겠느냐고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빌리 선데이는 아버지 윌리엄 선데이(William Sunday)와 어머니 메리 선데이(Mary Sunday)의 아들로 아이오와 주 아메스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그리스도인 설교자가 된 이후 백만 명이 넘는 혼들을 주님께로 이겨온 뒤에 잠들었던 것이다. 이 열매들은 성령님의 역사로 주어진 것들이다. 따라서 세상 교회들이 등록 교인 몇 명, 출석 교인 몇 명이라고 주일 예배 주보에 공표하고, 게다가 헌금 액수까지 적어 넣는 것은 일종의 야바위 짓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빌리가 아기였을 때 그의 아버지는 남북 전쟁 중에 감염되었던 질병으로 인해 죽었다. 그 후 그의 어머니는 재혼했지만 2년도 안 되어 버림받게 된다. 그때 환경이 녹록지 않아서 어머니는 두 아들, 빌리와 그의 동생 에드워드를 군인들이 경영하는 고아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빌리의 나이는 12세였다. 2,3년 후에 두 형제는 농장이 있는 그들의 할아버지와 같이 살기 위해서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빌리는 그때 다른 계획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근처에 있는 마샬 타운이라는 도시로 가서 일자리를 찾으려고 애쓰던 중 그곳에 있는 한 가구 상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야구를 좋아하여 그 고장 야구팀에서 연습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빠른 변화구로 인해 그 팀에서 스타 선수가 되었다. 이 무렵 빌리는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과의 시범 경기에 출전하도록 승인을 받았다. 그는 달리기 경주에서 프레드 페퍼(Fred Pfeffer)를 15피트(약 5m)나 앞섬으로써, 프로 야구팀에서는 가장 빠른 주자가 되었다. 1887년 어느 가을날, 빌리 선데이와 그의 동료들은 선술집에서 술을 마신 후 시카고의 한 길모퉁이에 앉아 있었다. 그때 길 건너편에서는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여러 개의 악기로 찬송가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빌리는 그리스도인 어머니와 함께했던 주일학교 시절을 회상하며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젊은이가 큰소리로 "이제 퍼시픽 선교원(Pacific Garden Mission)으로 오라."라고 초청하면서, 빌리에게 선교원에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빌리는 일어나서 그의 친구들에게 자기는 죄에서 빠져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몇몇 친구들은 그 말을 듣고 큰소리로 비웃었고, 어떤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어떤 친구들은 그를 격려하기도 했다. 빌리는 선교원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했다.

그 후로도 그는 야구를 계속했으나 기회만 되면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 그는 시카고에 있는 제퍼슨 파크 장로교회(Jefferson Park Presbyterian Church)의 신실한 성도가 되었다. 얼마 후에는 많은 보수를 받고 피츠버그로 이적했고, 그 후에는 필라델피아로 이적했다. 1888년에는 헬렌(Helen Amelia Thompson)과 혼인하여 네 자녀를 두었지만, 그들 중 45세를 넘어서까지 산 자녀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자녀들은 딸 헬렌(Helen, 1891), 아들 조지(George, 1894), 아들 윌리엄(William Jr., 1902) 그리고 아들 폴(Paul, 1908)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빌리를 설교자로 부르셨으나 그는 야구팀과의 계약 때문에 필라델피아에서 3년간 묶여 있어야 했다. 그는 그 문제를 놓고 기도했는데, 주님께서 응답하시어 1891년 3월에 그는 계약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신시내티와의 연봉 5,000달러짜리 계약도 거절했으며, 야구로 유명해질 수 있는 인생 대신에 YMCA에서 일할 것을 선택했으니 월 83달러의 월급을 선택했던 것이다.

2년 뒤에 그는 윌버 채프먼(J. Wilbur Chapman)과 협력하여 사전 교섭인 역할을 하면서 평범한 동역자로 일했다. 그는 그 일을 채프먼이 목사직으로 돌아갈 때인 1895년 말까지 수행했다. 그 무렵 빌리는 아이오와 주 가너에 있는 어느 고장의 한 부흥회에서 설교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는데, 그는 채프먼으로부터 8개의 설교를 빌려서 가너로 출발했다. 그는 열흘 동안에 268명의 혼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에게 순회설교자로서의 전담 사역을 할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빌리 선데이는 1910년 이후 수년 동안 작은 마을들에서 순회설교를 했고, 그 후에는 그보다 더 큰 마을들에서도 설교했다. 통상적으로 작은 고장의 집회에서는 2,3백 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더 큰 고장들에서는 수천 명이 영접했다. 어떤 때는 그 시의 인구 중 20-30%의 주민들이 복음전도집회로 쏟아져 나와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많은 부도덕한 술집과 선술집들이 문을 닫았으며, 집회가 끝난 뒤에도 영적 열매의 여운이 수년 동안 증거로 남았었다. 상징적인 순회 집회는 약 5주 내지 6주간 계속되기도 했다. 빌리는 매년 이런 모임을 5회 내지 6회까지 수행했다.

그의 가장 큰 순회 집회는 1917년 4월 4일에서 6월 19일까지 계속되었던 집회인데, 이 11주의 기간에 약 10만 명의 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빌리를 위해 마지막으로 모금된 사랑의 헌금은 113,000달러나 되었다. 그는 그 모든 헌금을 YMCA와 적십자사에 주었다. 빌리 선데이의 순회 집회는 지역 교회 목사들과의 긴밀한 협력 속에 이루어졌고, 새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그 지역 교회들로 보내졌다. 예배당들도 커다란 목재로 만든 건물들이었으며, 특별히 순회 설교를 위해 설계되었다.

빌리 선데이는 아주 불같았고, 박력이 넘치는 설교자였으며, 설교단 위에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 아마 매 설교마다 1km 이상씩은 그렇게 했던 것 같고, 설교 시간도 약 한 시간이 걸렸다. 그의 유명한 설교는 술 판매를 반대하는 것이었으며, "물 실은 마차를 타라."라는 금주에 관한 설교는 무려 한 시간 반이 넘게 지속되었다. 하지만 모든 장미에는 가시가 있듯이 빌리는 자기 자식들의 문제가 세상에 부각되었을 때 매우 슬퍼했다. 심지어 아들 조지는 1933년에 자살했다. 후에 빌리는 자식들에게 친근했어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고백하며 자책했다. 빌리는 1935년까지 설교했고, 1935년 11월 6일 그가 73세가 되었을 때 시카고에서 주님께로 갔다.

그는 주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주님의 종으로 살았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들의 생애는 모두 이와 같은 간증들을 남기게 된다. 『자신의 육신에 심는 자는 육신으로부터 썩은 것을 거두고 성령에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쓰러지지 아니하면 때가 되어 거두리라』(갈 6:8,9). 거짓 목사들에게 속지 말라!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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