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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 Adoniram Judson, 1788-18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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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3월호>

아도니람 저드슨 선교사는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헌신적인 선교사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몰든(Malden, Massachusetts)에서 아버지 아도니람 저드슨과 어머니 아비가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총명하여 세 살에 글을 읽는 것을 배웠고 열두 살에는 헬라어를 공부했다. 그는 로드아일랜드 주의 주도이자 항구 도시인 프로비던스에 있는 브라운대학교에 다녔는데,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많은 우등상을 받았다. 그가 브라운대학교를 졸업한 것은 1807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플리머스(Plymouth)에 있는 회중교회의 목사였으나, 젊은 아도니람은 연극 무대에서 작품을 쓰는 작가의 길을 열망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도니람은 그 지역의 한 여관에서 묵게 되었는데, 옆방에서 고통 중에 신음하며 죽어 가는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밤새도록 옆방 사람의 신음 소리와 때로는 숨이 막히는 듯한 소리를 들어야 했으며, 더구나 사람들이 오가는 발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옆방에 묵었던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접했는데, 그 죽은 사람이 자기와 함께 대학을 다니던 친구라는 사실을 알고서 큰 충격에 빠졌다.

바로 그날 아도니람은 집으로 돌아와서 즉시 사역에 입문하기로 결심했고, 1809년 5월에는 그의 아버지 교회에서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간증했다. 그는 앤도버신학원(Andov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을 공부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해외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도니람은 1812년 2월에 앤 하셀타인과 혼인했고, 그다음 날 몇 명의 대학 동료 설교자들과 함께 안수를 받았다. 그 동료들도 선교지에 문이 열리기를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 후 그들은 인도를 여행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아도니람과 그의 동료들은 인도를 여행하는 동안 침례교도(Baptist)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들의 결심은 회중교회들로부터 받는 모든 지원이 단절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1814년 그들이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필요한 지원을 침례교회들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도니람은 인도를 향한 문들이 닫힌 것을 알고는 버마 랑군(Rangoon)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 항해를 하는 동안 아내 앤은 병을 얻어 거의 죽을 뻔했고, 항해 중에 태어난 아기는 태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버마에 도착해 보니, 그들이 찾은 처소는 매우 불결했고 버마의 우상들로 가득 차 있었다.

버마 황제는 종교적인 가르침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아도니람은 자기가 아는 의학 지식으로 조금씩 황제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버마 국민을 위하여 신약성경 번역에 착수했으며, 아내 앤은 아이들과 여자들을 위한 학교를 시작하였다. 얼마 후 아도니람은 대중들에게 복음 전파를 시작했다. 그가 버마어로 처음 집회를 연 것은 1819년 4월 4일이었고, 2개월 후에는 그의 첫 번째 회심자를 얻었다. 그리고 이후 2년 동안 18명의 회심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동안 아도니람은 두 번째 아들을 잃었다. 그의 이름은 로저(Roger)였는데 지상에서 7개월을 살다가 하늘나라로 떠난 것이다. 아도니람 역시 병이 들어서 몇 개월 동안 병석에서 지내야 했다. 1821년 아내 앤은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2년 후인 1823년에 다시 버마로 돌아왔다.

아도니람은 버마 랑군에서의 사역을 몇 명의 새로운 선교사들의 손에 맡기고 황제의 요청으로 새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아바(Ava)로 향했다. 하지만 그 무렵은 물길이 바뀌는 때였다. 버마 왕국은 대영 제국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모든 백인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고, 이로 인해 모종의 가장 무서운 박해를 견뎌야 할 상황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1824년 6월 8일 아도니람 저드슨은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9개월간 차꼬에 채워진 채 심한 열기로 인한 열병과 배곯음으로 고통을 받으며 지내야 했다. 그동안 그의 헌신적인 아내 앤은 간수에게 가끔씩 뇌물을 주면서 남편에게 음식을 넣어 주곤 했다. 3주가 지난 후에 앤은 세 번째 아기를 팔에 안고 감옥에 왔다. 아도니람은 크게 격려를 받고 아내의 영예를 위해 24절의 시를 써서 헌사했다. 앤은 다른 많은 영국인 죄수들로부터도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그녀의 노력에 찬사를 받았다.

앤과 어린 딸이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을 무렵, 친절한 한 버마 여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들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앤은 회복되었고, 그녀의 끈질긴 탄원으로 1825년 11월 아도니람은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후 그들은 새로운 선교 본부를 세우려고 애머스트(Amherst)로 이사했다. 1826년 앤은 열병으로 쓰러져 37세의 나이에 하늘나라로 갔다. 아도니람은 애머스트에서 호피아 나무 밑에 아내를 묻었고, 3개월 후에는 딸도 그녀 곁에 묻어야 했다. 죽은 아내와 세 명의 아이들을 뒤로하고, 주님 안에서 다시 용기를 얻은 아도니람 저드슨은 하나님을 위해 돌진했다. 1827년에는 모울메인(Moulmein)으로 선교지를 옮겼으며, 1828년에는 코 타 뷰(Ko Tha Byu)를 주님께로 인도했다. 그는 노예였고 강도였으며 살인자였는데, 그런 뷰가 자기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불같은 열정을 지닌 복음전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1830년에는 정글의 야만족인 카렌족(Karens)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다.

아도니람은 다른 선교사의 미망인인 사라 보드먼(Sarah Boaedman)과 1834년에 혼인했다. 그들 둘 사이에서 향후 11년 동안 여덟 명의 자녀가 태어났지만, 그중 세 명은 아주 어린 나이에 죽었다. 그는 1834년에 구약성경 개정을 완성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것을 보았다. 1837년에는 신약성경 개정판이 나왔다. 그의 두 번째 아내는 1845년에 죽었다.

1845년 아도니람은 미국으로 휴가를 갔다가 이듬해인 1846년에 에밀리 처벅(Emily Chubbuck)과 혼인했다. 그들은 한 달 뒤에 버마로 돌아왔고, 1850년 선교 항해에서 그가 죽을 때까지 선교 사역을 계속했다. 그의 아내는 1854년에 죽었다.

아도니람이 하늘나라로 간 지 꼭 30년이 지난 후 버마에는 약 7천 명의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으며, 60개가 넘는 교회들과 한 개의 출판사 그리고 몇 개의 학교들이 세워졌고, 12명의 설교자들이 배출되었다.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러면 내가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계 2:10).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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