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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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그리스도의 군사” 다니엘 휘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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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11월호>

신약 성도였던 “누가”에 관해 전기를 쓴다면 몇 줄이나 쓸 수 있겠는가? 필자는 한 페이지조차 채울 자신이 없다. 이는 그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을 만큼 신약 교회사에서 비중 있는 인물이지만, 정작 그의 생애에 관한 정보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기록한 두 권의 책에는 “누가”라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입장”을 철저히 배제한 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사도들의 행적만을 기록하도록 성령 하나님께 쓰임받은 종이었던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없었기에 교만할 여지가 없었고, 그러면서도 늘 한결같이 “필수적인 인물”로 쓰임받으며 신실한 형제들과 끝까지 함께했던(딤후 4:11) “누가”와 같은 인생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점에서 누가를 쏙 빼닮은 신실한 일꾼 한 명이 있었는데, 그는 위대한 찬송 작곡가 “필립 블리스”와 절친한 사이이자 그의 전기를 쓴 인물이고, 또한 당대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 “D.L. 무디”와 인연이 깊은 “다니엘 웹스터 휘틀”(Daniel Webster Whittle, 1840-1901)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 사이로 가려진 그의 인생은 드문드문 단편적으로만 전해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무려 200편이 넘는 찬송시를 쓰게 하셨고, 그중 몇 편은 오늘날까지도 성도들이 즐겨 부르고 그 의미를 곱십게 하심으로써 그의 믿음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하신다. 찬송가 <영광을 주께>에는 그가 작사한 곡이 여섯 곡이나 실려 있다.

순회 설교자 “다니엘 웹스터 휘틀”은 1840년 11월 22일,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났다. “다니엘 웹스터”라는 이름은 우리에게도 꽤 익숙한 이름으로서 그는 성경을 드높인 그리스도인이었고, “정치가”였으며, <웹스터 사전>을 편집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런 이름이 “휘틀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붙여진 것은 이 집의 가장이 정치가 다니엘 웹스터를 매우 존경했기 때문이었다. 휘틀의 어머니 또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이렇듯 그는 경건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십 대 후반 무렵에는 그가 은행에 취직했고, 이즈음에 훗날 그의 아내가 된 “애비 핸슨”(Abbie Hanson) 자매를 교회 주일 학교에서 만나게 된다.




1861년 휘틀이 20대 초반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남북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일리노이주 제72보병연대 B중대의 소위로 배치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부대가 멀리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그는 떠나기 하루 전날 밤에 핸슨 자매와 “조용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휘틀은 수많은 교전 속에서 진급을 거듭하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했다. 한번은 미시시피주 서부 지역에서 벌어진 “빅스버그(Vicksburg) 전투”에서 수하의 지휘관이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그 대신 전선에서 부하들을 지휘하다가 오른팔에 총상을 입고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적 진영의 병원(수용소이기도 함)으로 이송된 휘틀은 팔꿈치 아래쪽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이후 어느 정도 고통이 잦아들었을 무렵, 그는 무료함을 달래고자 읽을거리를 찾았다. 그때 적군의 허락하에 갖고 있었던 배낭 속에 신약성경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휘틀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 성경은 많은 눈물로 그를 전장으로 떠나보내고 많은 기도로 그와 함께하신 어머니가 챙겨 주신 성경이었다. 휘틀은 마태복음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어 내려갔다. 당시 휘틀은 몇 차례 반복적으로 신약성경을 읽으며 구원받는 방법에 대해 명확하게 깨달았지만, 정작 회개하거나 구주를 받아들일 의향이나 계획이 없었으니, 곧 그리스도인이 될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의무병”이 휘틀을 깨웠다. “수용소 반대쪽 끝에 어린 소년병 하나가 죽어 가고 있소. 그 소년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거나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데려와 달라고 애걸하기에 마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소. 나는 악한 사람이기에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가 없어 당신을 깨웠소.” 잠에서 깬 휘틀의 대답은 이러했다. “하필이면 왜 나요? 나도 기도해 줄 수 없소. 나는 인생에서 기도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소. 나 역시 당신만큼이나 사악한 사람이오.” 의무병은 기가 찼지만, 그래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어쨌거나 함께 가 보자고 간청했고, 결국 휘틀은 17,18세 가량의 죽어 가는 소년을 마주하게 되었다. 소년은 고뇌에 찬 표정으로 휘틀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 죽어 가고 있어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저는 메인주에 있는 고향 집에서 착한 아들로 살았어요. 그러나 군인이 되고부터는 악하게 살았죠. 술을 마시고, 욕설하며, 도박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죽어 가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아직 죽음을 맞을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소년의 말을 듣고 있던 휘틀은 실제로 귀에 들리는 것처럼 또렷하게 자신 안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너는 구원받는 방법을 알고 있지 않으냐? 그대로 너의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라. 그리고 이 소년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어라.” 휘틀은 무릎을 꿇고 소년의 손을 잡았다. 비록 매끄럽지는 못했지만, 몇 마디 말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 후 자신의 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했고, 그 즉시 그분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했다. 그런 다음 휘틀이 그 소년병을 위해 기도하자, 소년병은 가만히 휘틀의 손을 꼭 붙잡았다. 휘틀이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을 때 그 소년병은 죽어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수심도 없이 평안만 깃들어 있었다. 훗날 휘틀은 “당시 하나님께서 그 소년병을 사용하시어 나를 구주께로 인도하셨고, 나를 사용하시어 그 소년병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죄를 용서받도록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간증했다.

(휘틀이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을 때 소년병은 죽어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오직 평안만 깃들어 있었다.)


이 아름다운 간증에 몇 마디 부언하면, 그 누구라도 편견 없이 바르게 보존된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방법을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을 휘틀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신학교에서 많은 학위를 취득했거나 소위 “뛰어난 영성”을 가졌다고 하는 유명한 목사들 밑에서 신학을 배운 사람들이 정작 구원받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고, 그저 성경을 읽고 믿기만 했을 뿐인데 구원을 받고 구령까지 하는 경우도 그 못지않게 많은 것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해인 1865년, 휘틀은 소령 계급으로 전역했고, 군인을 존경하는 미국의 문화적 특성 때문인지 이후로 사람들이 그를 언급할 때면 종종 “휘틀 소령”이라고 불렀다. 시카고로 이주해서 한 시계 회사의 회계원으로 일을 하던 휘틀 소령은 군 복무 시절에 인연을 맺은 D.L. 무디와의 교제 속에서 “복음 전파 전담 사역”에 관한 영적인 부담을 갖게 되었고, 결국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필립 블리스라는 걸출한 찬양 인도자와 함께 순회 설교에 나선 휘틀은 미국 전역을 누비며 수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1876년에 블리스는 안타깝게도 열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 소식을 들은 휘틀은 곧바로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고, 블리스의 흔적이나 어떤 유품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3일 동안 그 사고 현장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그는 자신의 친구가 에녹처럼 사라졌다면서 매우 슬퍼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슬픔을 위로해 주시고자, 그 무렵 사역에 헌신한 “제임스 맥그라나한”으로 하여금 블리스의 사역을 이어받게 하셔서 휘틀과 동행하게 하셨다. 우리 귀에 익숙한 휘틀의 찬송 중에는 맥그라나한이 곡을 붙인 찬송이 많이 있는데, “나는 확실히 아네,” “담대한 주의 군사여” 등이 대표적이다.


1893년 휘틀 소령이 53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접어들었을 때, 한번은 그의 동역자이자 복음 전도자였던 “헨리 발리”가 “매시간 주님이 필요합니다”(I Need Thee Every Hour, <영광을 주께> 찬송 제목 - “주 음성 외에는”)라는 찬송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서 휘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매시간’이 아니라 ‘매 순간’ 주님이 필요합니다!” 이 말을 들은 휘틀은 그 즉시 “찬송시” 하나를 써 내려갔다. “매 순간 그분의 사랑 속에서 보호를 받고 / 매 순간 위로부터 오는 생명을 소유하네. / 영광이 비출 때까지 예수님을 바라보며 / 오 주여, 매 순간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주와 함께 못 박혔으니”라는 새로운 찬송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동역자들과의 사역과 교제 속에서 찬송을 작사한 휘틀은 찬송시를 쓰는 것에 관하여 이렇게 조언하곤 했다. “명료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찬송시를 쓰길 바랍니다. 의미 없이 운율만 맞춘 곡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좋은 찬송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어야 하며,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온전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좋은 찬송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어야 하며,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온전하게 전달해야 한다.)

휘틀의 사역 말년인 1898년에 미국은 또다시 전쟁에 휘말렸다(미국 - 스페인 전쟁). “죽음에 가까운 순간”이 역설적으로 얼마나 “영생에 가까운 순간”인가를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던 휘틀은 병영 안에서 군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실로 “휘틀 소령”다운 말년을 보내고 난 뒤, 그는 1901년 3월 4일 주님 곁으로 갔다.

다니엘 휘틀의 생애를 정리하면서 느낀 것 한 가지는 실로 그는 “티가 별로 안 나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수많은 믿음의 용사들 사이에서 그 이름이 크게 드러나지 않은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팔을 잃고 친구를 잃은 그 큰 상실감 속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신실한 믿음의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그의 생애를 추적하다 보면 “오른팔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다!
『전쟁에 임하는 자는 아무도 이생의 일들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이러한 자세로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군인 정신”이거니와, 휘틀이야말로 그러한 군인 정신의 “진정한 본”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서운함 때문에, 혹은 고난이나 상실의 슬픔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졌다면, “휘틀 소령”을 기억하자. 그리고 그를 본받아 그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마땅히 달려야 할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도록 하자.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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