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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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파의 거장 존 윌버 채프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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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7월호>

흔히 설교자들이 “에드워드 킴볼을 아십니까?”라는 말로 소개하곤 하는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의 “부흥의 계보”가 있다. 이를 간추리자면 이렇다. 젊은 주일학교 교사였던 에드워드 킴볼은 자신의 학생이었던 D.L. 무디를 주님께로 이겨왔다. 이후 무디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신실한 설교자가 되었고, 대서양을 건너가 영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F.B. 마이어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서 그의 사역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F.B. 마이어는 대서양을 반대로 건너와서 미국의 젊은 사역자였던 J. 윌버 채프먼의 마음에 전담 복음 전파자가 되어야겠다는 도전을 심어 주었다. 채프먼은 복음 전파를 전담하기 위해 동역자가 필요했고, 이때 빌리 선데이가 채프먼의 사역에 합류했다. 이후 복음 전파 사역의 바통을 이어받은 빌리 선데이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 모르드캐 햄의 사역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그리고 이 모르드캐 햄의 집회에서 구원받은 십대 소년이 있었으니, 바로 빌리 그레이엄이다. 비록 이 계보는 빌리 그레이엄이 배교함으로써 끝이 났지만, 분명 『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의 나무니, 혼들을 이겨오는 자는 현명하니라.』(잠 11:30)라는 말씀을 입증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예화임에는 틀림이 없다.

“에드워드 킴볼”이라는, 그 이름조차 생소한 한 사람의 열매가 얼마나 많은 영적 생명을 낳아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이 되게 했는지는 가늠할 수조차 없다. 어쩌면 내가 구령한 어떤 사람이 한국의 D.L. 무디가 되어 위와 같은 위대한 계보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복음을 들고 거리에 나서는 일이 참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 될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이 계보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존 윌버 채프먼(John Wilbur Chapman)을 소개하고자 한다.

존 윌버 채프먼은 1859년 미국 인디애나주의 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채프먼의 어머니는 감리교인이었고, 아버지는 그 집안 대대로 장로교인이었는데, 채프먼의 가정은 어머니를 따라서 감리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다 십 대 초반 무렵에 어머니가 하늘 본향에 간 뒤로는 아버지를 포함하여 어린 채프먼도 장로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이런 배경 탓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모두에 흥미가 있었던 채프먼은 오전에는 장로교 주일학교에, 오후에는 감리교 주일학교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 가운데서 오후 주일학교에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빙클리 부인이 교사로 있었는데, 채프먼은 유년 시절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가르침, 그리고 나의 주일학교 선생님(빙클리 부인)의 영향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던 중 어느 주일 오후에 누군가가 주일학교에 와서 일종의 강의를 한 후 아이들에게 일어나서 그리스도를 입으로 고백하라고 초청한 일이 있었다. 채프먼은 이때에 아마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일어선 것 같았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채프먼은 소심한 성격이었는지, 요지부동한 채로 머리만 굴리고 있었다. “왜 내가 일어서야 하지?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데다가 그분이 구원하실 능력이 있다는 사실도 잘 깨닫고 있는 것 같은데?” 이때 빙클리 부인은 눈물을 머금고서 돌아서서 채프먼을 똑바로 쳐다보며 일어설 것을 권유했다. 채프먼이 여전히 머뭇거리자, 빙클리 부인은 그의 팔꿈치 아래를 잡고 약간 들어올려서 그가 일어서도록 도와주었다. 채프먼은 이날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그때 내 감정이 어땠는지는 형용할 수조차 없다. 그날이 내가 구원받은 날인지, 아니면 그 이전에 이미 구원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날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인상 깊은 사건들 중에 하나가 일어났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여태까지 나는 이 일을 잊은 적이 없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 사람은 나의 주일학교 교사이셨다. 그분이 개인적으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에 나는 용기를 얻어 주일학교에서 나의 구주를 시인할 수 있었다.”

이 일화는 채프먼의 저작인 <개인적 접촉>(The Personal Touch)에서 소개되어 있는데, 이 책의 골자를 담은 한 부분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 특별히 쓰임받았던 사람들의 일대기를 공부하면서 놀랐던 점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거나 주님의 능력을 얻게끔 하시는 데에 거의 일반화된 법칙처럼 사용하시는 것이 바로 그들의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통한 개인적 영향력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혼들을 이겨오는 일에 있어 특별히 전담 복음 전파자들을 부르셔서 사역에 넣으신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누군가의 부모, 자녀, 남편, 아내, 친구는 물론, 직장 동료들과 종업원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을 구주께로 이겨오도록 애를 써야 한다는 책무에서 당신을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나 지식으로는 부족했던 부분을 우리 “개인”을 통해서 채우신다. 비대면과 익명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마지막 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진리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지식으로만 그분을 계시하시지 않고,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친히 내려오셨다. 사도 요한은 얼마든지 편지로 권면하고 소식과 지식을 전달할 수 있었지만, 종이와 잉크가 아니라 대면하여 말하는 기쁨을 택하겠노라고 썼다(요이 1:12). 그러므로 우리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다가가는 일”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과 같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입술을 사용하셔서 당신 옆에 앉아 있는 어떤 이에게 위대한 역사를 이루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채프먼은 그 후 사역자가 되려고 대학에서 공부했는데, 1878년에 D.L. 무디를 만났을 때 당시 흔들렸던 구원의 확신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었다. 무디는 그에게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느니라.』(요 5:24)라는 말씀을 읽게 한 뒤 이렇게 물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러자 채프먼은 대답했다. “그럼요.” 다시 무디가 묻기를 “그렇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하자 채프먼은 대답했다. “그렇다고 생각하다가도, 다시 두려워집니다.” 무디는 그런 그에게 “다시 읽어 보세요.”라고 하면서 같은 질문을 반복했고 채프먼의 대답도 반복되었다. 이때 무디는 “평정심을 잃은 것 같은 모습”으로 쏘아붙였다고 한다. “도대체 누구를 의심하는 것입니까?” 채프먼은 이때 자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확실한 말씀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무디는 다시 그에게 묻기를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라고 했는데, 무디의 질문은 동일했지만 이제 채프먼의 대답이 바뀌었다. “예,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채프먼은 그날 이후로 결코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채프먼은 이러한 일 외에도 무디로부터 사역의 많은 부분들을 배웠으며, 실제로 채프먼의 설교와 저작을 보면 무디의 말을 인용하는 모습이 자주 엿보인다.

1881년 채프먼은 22세의 나이로 복음 전파 사역에 부르심을 받았다. 1년 후에는 아이린 스테든 양과 결혼했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프먼의 인생은 그리 순탄하지가 않았다. 1886년 채프먼과 아이린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는데, 주님께서 그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아이린을 하늘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움과 낙심 속에 있던 그는 그해 노스필드에서 개최된 성경핵심강연회에 참석하여, 드디어 앞에서 언급했던 F.B. 마이어를 만나게 된다. 마이어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요? 그렇게 되고 싶은 ‘의지’가 없는 것 아닙니까?” 채프먼은 이때의 일을 이렇게 고백한다. “그 말은 내 사역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내 인생에 있어서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새로운 별을 본 것 같았다.” 이 일을 계기로 채프먼은 자신을 새롭게 주님께 드렸고 사역에 다시 정진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33세가 된 1892년, 채프먼은 목회를 잠시 내려놓고 복음 전파 사역에 전적으로 뛰어들었다. 1년쯤 지났을 때, 그는 무디의 세계적인 복음 전파 사역에서 핵심적인 설교자가 되어 있었다. 채프먼은 목회와 복음 전파를 오가며 두루 사역했고, 후일에 무디는 이런 채프먼에게 무디 성경신학원에서 부학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채프먼은 자신의 부르심이 복음 전파와 목회에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사양했다.

채프먼은 한 도시에 집중적으로 인력을 쏟아붓는 전략을 썼다. 예를 들어 1908년에는 21개의 설교자-합창대원 팀을 구성했고, 필라델피아를 42개 구역으로 나누어 이 팀들을 파송했다. 채프먼 자신도 찰스 알렉산더(Charles M. Alexander)라는 음악가와 함께 사역에 참여했는데, 이 사역을 통해 6주 만에 8,000명이 구원받았으며, 이러한 채프먼의 방법론을 “대규모 복음 전파”(Mass Evangel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채프먼은 정말로 왕성하게 사역했으며, 그 당대까지는 채프먼보다 더 많은 국가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사역자가 없었다. 그는 한국에도 와서 복음을 전한 적이 있다. 50,000회 이상의 설교를 하고 수많은 혼들을 주님께로 이겨온 채프먼은 인생 말년에 몸을 돌보지 못해서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겪었다. 누군가가 그에게 후회스럽지 않느냐고 묻자, 채프먼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에게는 내가 사역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후회해 본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사역자로서의 인생은 내게 있어 필연이었습니다.”

채프먼이 59세 되던 1918년, 그는 담석증으로 인해 긴급히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했고, 수술을 받은 지 이틀 만에 59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뒤로하고 주님의 품에 가서 안겼다. 그의 묘비명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채프먼은 죽어 잠자고 있지만 그로부터 10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서 여전히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늘에 찬송 소리 나던 그날」(<영광을 주께>, 162장)의 후렴에서 채프먼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살아서 나를 사랑하셨고, 그분은 죽어서 나를 구원하셨고, 그분은 묻혀서 내 죄를 멀리 가져가셨고, 그분은 부활하셔서 값없이 영원히 의롭게 하셨네. 그분께서 오실 그날, 오 영광스런 날이여!”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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