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서 분류

아프리카 선교의 디딤돌을 놓은 로버트 모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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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2월호>

혹시 교회 두 개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본 적 있는가? 이러한 모습은 한국 교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한 단면이다. 이는 어떤 성경적 명분이나 복음 증거의 사명도 없이, “그저 옆 교회에 다니다가 불만을 품고 뛰쳐나온 사람이라도 좋으니 사람만 왔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교회들이 생겨났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이런 교회의 “사역자들”(?)은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받게 하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십자가의 원수들”(빌 3:18)이나 다름없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또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려지지 아니한 곳에서만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하였으니 이는 다른 사람의 기초 위에다 짓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 남의 양 무리를 탐내면서 남들이 수고해 놓은 일에 숟가락만 얹어 보려고 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다. 아직도 감을 잘 못 잡고 있다면, 본 글에서 소개하는 “로버트 모팻”에게서 “성경적 사역 방법”을 잘 배우기 바란다.

“아프리카의 선교사”요, “추장들의 친구”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진 “로버트 모팻”(Robert Moffat, 1795-1883)은 1795년 12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가난했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어린 모팻은 만 네 살 때쯤 강단 앞으로 나와 헌신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러나 가난한 가정 환경 속에 여러 일을 전전하면서, 아마도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은 흐려진 것 같다. 모팻은 십 대 초반까지 공부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그로부터 약 50년의 세월이 흘렀을 무렵 모팻은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며 아들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나는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는 목표는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빠져들었단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아멘!”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몰두했지. 물론 그러는 동안 내 손바닥은 많은 매를 맞아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단다. 선생님께서 혼을 내실 때면 아주 엄하셨거든.」 이 시기에 모팻은 바다로 가서 뱃일하다가 죽을 뻔한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고, 다시 학교로 복귀하여 라틴어, 기하학, 제철 도구 다루는 법 등을 배우기도 했지만, 잘 적응하지 못한 채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다.

열여섯 살쯤 되었을 때, 모팻은 정원사의 조수로 취직하여 스코틀랜드를 떠나게 되었는데, 아들을 배웅하러 나가는 길에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운을 뗐다. “내 아들 로버트,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네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단다. 나는 네가 이 엄마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엄마, 무슨 부탁인데요?” “네가 먼저 지키겠다고 약속하면 이야기하마.” “싫어요, 엄마. 엄마의 부탁이 뭔지 먼저 말씀하시기 전에는 답을 드릴 수 없어요.” “음... 로버트, 이 엄마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들’에게 어떤 잘못된 일을 요구하겠니?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않니?” “알아요, 엄마. 엄마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지만 제가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어머니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고, 이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어머니의 뺨을 따라 굵은 눈물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알았어요, 엄마! 엄마가 원하시는 게 뭔지 말씀해 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킬 테니!” “내 부탁은 네가 매일 아침 그리고 매일 저녁 성경 한 장씩을 읽는 거란다.” “엄마, 제가 성경을 읽는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물론 알지. 하지만 규칙적으로 읽지는 않지. 또한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을 향한 ‘너의 의무’로 생각하지도 않고.” 모팻의 어머니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네가 성경을 매일 읽겠다고 약속했으니 말이다. 내 아들아, 신약성경을 많이 읽으렴. 특히 복된 복음서들도 많이 읽고. 그러면 절대 방황할 일이 없을 거다. 또한 네가 기도하면 주님께서 직접 네게 가르쳐 주실 거다.”

이렇듯 모팻의 어린 시절을 보고 있노라면, 구원받고 헌신한 그리스도인 중에는 “정직한 고집쟁이” 출신들이 많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주님께서는 이런 모팻과 같은 사람이 빈말하는 “순종적인”(?) 사람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밝혀 주신 바 있다(마 21:28-32). 그런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거슬러 빈말을 하는 법이 없으므로 적어도 거짓말쟁이나 위선자는 아닌 것이다.

모팻은 성경을 읽는 것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렇게 한 지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문득 이런 질문이 뇌리에 스쳤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모팻은 대답할 수 없었고, 이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차라리 성경을 그만 읽으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하고 생각하다가도,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그러지도 못했다. 진퇴양난이었다! 모팻은 자신이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번민했으며, 자신이 지금 지옥으로부터 “단 한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모팻은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지 전혀 몰랐다. 자신의 행실을 고치면 어떻게라도 될까 싶어 그렇게 해 봤지만, 여전히 비참한 심경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팻에게 성경을 통해 조명해 주셨는데,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넓은 정원의 오두막에서 홀로 살았던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로마서”를 탐독하던 중에 나는 이전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던 그 많은 구절을 보며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구절이 다르게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것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나님의 책, 존귀하고 영원한 성경이 나에게 열려 있는 듯했고, 나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이루신 일과 죄인들이 하나님의 호의와 영원한 생명의 확신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일순간에 깨달았다. 나는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가진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이 되셨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다시 말해 성경을 정직한 마음으로 읽기만 해도, 언젠가 그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무렵 모팻은 감리교회의 회원이 되었고, 성경 지식과 믿음을 키워 나갔다. 그런 가운데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하나 더 일어났는데, 선교 사역을 위한 모임이 열린다는 플래카드를 우연히 보고 큰 열정을 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끓어오르는 열정을 받아 줄 선교 단체가 없었다. 이는 그가 대학을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팻은 이렇게 생각했다. ‘나에게는 짧게라도 뱃사람으로서의 경력이 있으니, 바다로 나가 이교도들이 있는 어떤 섬이나 해안에 내려 구세주를 알도록 가르치면 될 것이 아닌가?’ 목숨을 잃을 뻔했던 그 바다로 다시 나가겠다는 모팻의 결심을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던 것이다.

“모팻의 진심”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여러 도움의 손길들을 허락해 주셨고, 결국 “런던 선교 협회”(London Missionary Society)를 통해 남아프리카로 파송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길이 제대로 나 있지 않았고 그마저도 비가 오면 휩쓸려 가기 일쑤였으며, 위험이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더위와 추위, 사자, 자칼, 하이에나, 악어, 뱀 등의 야생 동물들 그리고 호전적인 원주민 등은 그곳으로 오는 “신출내기들”의 목숨을 빼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원주민들은 그곳으로 온 선교사들만 공격한 것은 아니었고, 자기들끼리도 내전을 벌였는데, 이는 복음을 전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모팻은 7년 동안 몇몇 지역에서 사역하다가 칼라하리 사막 남동쪽에 위치한 “쿠루만”(Kuruman)이라는 지역에 정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49년간 살면서 사역했고, 아프리카 제일의 “개신교 선교회”를 세웠다. 이곳에서 지낸 초기 생활은 매우 궁핍했는데, 모팻이 먹을 음식을 구하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든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종종 자기 복부를 끈으로 묶어 놓을 정도였다고 한다.

모팻은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 씻고 입는 법도 가르쳐야 했다. 모팻의 아내인 “메리 모팻”은 음식을 저장하는 법을 모르는 원주민들이 닥치는 대로 먹어 버려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말과 상식이 잘 통하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얼마나 복에 겨운 사역을 하고 있는지는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모팻은 아프리카의 광활한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부족을 상대했고, 이내 “츠와나어”(Tswana language)를 숙달했다. 1830년에는 누가복음을 츠와나어로 번역했는데, 모팻은 책도 없고 글자로 기록되어 본 적도 없는 츠와나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아예 <맞춤법 교본>도 제작하여 영국에서 출간했다. 그 결과 수많은 아프리카인이 회심했고, 1857년에는 “신구약 전체”가 “츠와나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이는 “아프리카어”로 신구약 전체가 번역된 “최초의 성경”이었다.

모팻은 56년간의 사역 기간에 단 한 번만 영국에 귀국했을 정도로 계속 아프리카에 머물면서 신실하고 부지런하게 사역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팻이 열정적으로 일구어 놓은 밭에서 그와 동역할 신실한 후계자들을 마련하심으로써 그의 신실함에 보답해 주셨는데, 그의 후계자 중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선교사요 탐험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도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은 모팻이 영국에 잠시 귀국했을 때 만났는데, 중국으로 가려던 리빙스턴에게 모팻이 “아프리카 선교 사역”을 강력하게 권했다고 한다. 후일 리빙스턴은 모팻의 딸 메리와 결혼하여 모팻의 사위가 되기도 했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하심이 놀라울 따름이다!

1883년 로버트 모팻은 하나님의 품에 안겼는데, 그의 장례식이 있고 난 뒤 <런던타임즈>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그 땅에 처음으로 갔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서, 디딤돌을 놓아 후계자들이 그를 뛰어넘는 일을 할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주어지는 “명예 훈장”이다. 그는 초기 선교 사역이라는 부담과 열기를 짊어지고 곧장 대의에 헌신하는 본을 보였는데, 그 땅이 마냥 불모지로만 남아 있지 않고 남아프리카에서도 좋은 씨가 싹트고 풍성한 열매가 맺힐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믿을 수 있도록 그 증거를 보여 준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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