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서 분류

선한 양심의 응답을 쫓은 메노 시몬스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3월호>

로마카톨릭이 유럽을 지배하던 암흑시대에, “유아 세례”를 받는 것은 마치 아기가 태어나면 탯줄을 잘라야 하듯이 지극히 당연한 관례였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하던 유아 시절의 세례를 무시하고, 이후에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여 믿고 구원받아 『선한 양심의 응답』(벧전 3:21)으로서 “성경적 침례”를 다시 받은 무리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재침례교도들”(Anabaptists)이었다. “재침례”는 로마카톨릭의 유아 세례가 비성경적임을 선언하는 행동이었기에 재침례교도라는 명칭 자체가 “반(反)카톨릭”이라는 뜻이었고, 결국 이들에게는 혹독한 박해의 위협이 뒤따르게 되었다.
물론 침례를 받지 않는다 해서 구원을 못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목숨을 걸고 침례를 다시 받으려 했던 까닭은 단 한 가지였으니, 곧 성경이 그들의 믿음뿐만 아니라 “실행”에 있어서도 최종권위였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이런 성경적 믿음을 실행으로 옮긴 재침례교도들을 이끈 사람 중 한 명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의 이름은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이다.


메노 시몬스는 1496년 지금의 네덜란드에 있는 “비트마르숨”(Witmarsum)에서 태어났으며, 당대에는 으레 그러했듯이 그의 부모 역시 카톨릭교도였다. 어린 메노는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라틴어와 헬라어를 익혔다. 그의 동기생 중 하나는 그에 대하여 “그는 멍청한 선생들의 말을 인용한다.”라고 폄훼한 적이 있는데, 메노가 걸었던 길은 소위 “엘리트 학자 코스”를 밟았던 루터나 에라스무스 같은 사람들의 길과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메노 시몬스는 28세가 되던 해에 교구 신부가 되어 그 뒤로 12년간을 시골 마을의 성직자로 살았다. 카톨릭교도로서의 메노의 일상은 “동료 성직자들과 함께 카드놀이를 즐기고 술을 마시는 등 쓸모없는 인간들의 생활 방식을 답습하고 쾌락에 빠져 있는 생활”이었다.


메노 시몬스가 성직자가 되기 전인 1517년에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자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서 성직자 생활을 하던 메노도 자연스레 로마카톨릭이 종교적인 전통으로 고수해 오던 교리들에 점차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그 의문은 자신이 나눠 주는 빵과 포도주가 정말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는지(화체설)의 문제에서 증폭되었다. 이때는 성직자가 된 지 1년 남짓 지났을 때였는데, 메노는 이런 의문이 처음 들었을 때 “사탄의 속삭임”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경을 거의 알지 못했던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 문제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롬 4:3, 갈 4:30)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성경을 건드려 본 적이 없었다. 혹시라도 성경을 읽다가 그릇된 길로 인도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이 “성경은 기록된 그대로 믿는 책이 아니라 자격을 갖춘 누군가가 해석해 주어야 하는 책이다.”라는 속임수에 미혹되어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사람”을 따라가다가 성경에 기록된 평범한 진리들을 빼앗기고 파멸하는 모습은(마 15:14)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메노는 성경을 읽어 나가면서 주의 만찬에서 나누는 빵과 포도주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 뿐,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의식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자신이 여태껏 속아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동안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카톨릭 교리에 대한 의문들도 자연스럽게 증폭되어 갔다. 그러던 중 “유아 세례”의 문제에까지 봉착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어떤 사람이 침례를 받다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일 메노가 개신교도들에게 가지 않고 재침례교도들에게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개신교도들 역시 유아 세례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 문제의 해답을 찾는 방법을 배운 메노는 이번에도 성경을 열어서 유아 세례가 비성경적인 교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로마카톨릭을 떠나지 못했고, 한동안 “로마카톨릭 안의 복음 전파자”로 살았다.
이렇듯 메노 시몬스는 화체설과 유아 세례가 비성경적인 교리임을 깨달았으면서도 여전히 카톨릭 성직자로서 미사와 유아 세례를 집전했다. 나중에 그는 이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하나님께 돌아서서 눈물로 한탄하며 은혜와 용서를 간구했고, 명성과 수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깨끗한 마음과 담대함을 간청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붉은 피의 공로를 통해 나의 불결한 행보와 무익한 인생을 자비롭게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또한 지혜와 정직함과 담대함을 주셔서 우리가 찬양할 그분의 높으신 이름을 선포하고, 거룩한 말씀을 변개하지 않고 설교하며,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시도록 그분의 진리를 분명하게 나타내 보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다.”

드디어 메노는 그동안 머뭇거려 왔던 “성별”을 결행하게 되는데 “뮌스터 사건”(1534-1535)이 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얀 마티스(Jan Matthys)라는 사람이 독일의 “뮌스터”를 점령하고 그곳에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려고 했었다. 그가 이끌었던 무리는 교리상으로 보면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봐도 좋을 만큼 큰 오류를 지닌 집단이었지만, 유럽 전역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재침례교도들의 입장에서는 적어도 로마카톨릭이나 종교개혁자들보다 훨씬 나았다. 최소한 그 지역에서는 박해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교리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많은 재침례교도가 뮌스터로 몰려들었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국지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메노의 친형제와 그가 담당하던 교구의 몇몇 사람들은 이 반란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다. 또한 반란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망상적인 신앙을 품은 과격분자들뿐만 아니라 성경대로 믿는 재침례교도들까지 죽었고, 심지어 재침례교도들에게는 무력으로 국가에 대항했다는 누명까지 씌워졌으니 사탄의 세력들에게는 “일석삼조”의 효과였다. 성경대로 믿는 재침례교도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의 무력 앞에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않았다는 “성경적 간증”을 지니고 있었으므로(벧전 2:13-23, 메노 시몬스는 이 구절 중 일부를 인용하여 그 간증과 연관된 진리를 역설하는 글을 썼음), 이러한 간증에 손상을 입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당시 메노는 성경적 분별력을 상당히 갖춘 상태였기에 이러한 반란과 소동이 비성경적이었음을 비판하는 소책자를 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자들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모습을 보면서 강단 있게 믿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죽음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 그는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비록 오류 가운데 있지만,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는 이 ‘열성적인’ 자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교리와 믿음을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또한 그들에게 교황 체제가 얼마나 혐오스러운 것인지를 폭로해 준 사람들,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1536년 1월, 메노 시몬스는 로마카톨릭으로부터 성별했고, 곧이어 당대에 네덜란드 내에서 무력 저항을 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있던 재침례교도 무리에 합류하여 그들의 지도자 오베 필립스(Obbe Philips, 1500-1568)에게서 침례를 받았다. 이후 메노는 1년간 은거하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몇 편의 글을 썼다. 이 은둔 생활이 끝났을 무렵 재침례교도들은 그에게 그들의 목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메노는 “마지못해” 수용했다. 이는 그가 스스로 부족한 사람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몸도 약했고 겁도 많았으며 은사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남은 생애를 복음을 전파하며 양 무리를 돌보는 데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받아 주시어 재침례교도들의 역사상 가장 왕성하게 사역한 사역자 중 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그를 따라 헌신하게 하셨고(메노파, Mennonite), 뮌스터 사건 이래로 그 세력이 쇠락해 가던 재침례교도들의 믿음과 실행을 올바르게 세우도록 역사하셨다.

재침례교도 사역자가 된 그는 늘 쫓기는 몸으로서 아내와 아들 및 두 딸과 함께 6개월이나 1년을 주기로 거처를 옮겨야 했고 이런 생활은 18년간 계속되었다. 메노에게 2천 길더(guilder,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억 2천만 원)의 현상금이 걸렸고, 그에게 음식이나 쉴 곳을 제공하고 그의 책을 읽거나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섭리적으로 그를 보호하셔서 로마카톨릭이나 개신교 무리에게 붙잡히지 않게 하셨고 계속해서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게 하셨는데, 오히려 이러한 도피 생활로 인해 그의 설교와 글들은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질 수 있었다.


당대의 재침례교도 지도자들은 사역을 시작한 지 2,3년 정도 지났을 무렵에 대개 죽임을 당하곤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메노 시몬스가 늙어서 자연사할 때(1561년)까지 무려 약 25년 동안 그를 사용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항상 적들보다 한발 앞서 달아날 수 있었는데,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 하나가 있다. 한번은 재침례교도들의 집회에 참석한 어떤 사람이 돈에 매수되어 메노 시몬스를 팔아넘기기로 목숨을 걸고 서약했다. 그런데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자 그 배신자는 아예 관원들을 대동하고 나섰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는 작은 보트를 타고 수로를 건너고 있던 메노를 발견했는데, 어째서인지 그는 메노가 꽤 멀리 있는 반대쪽 물가에 닿을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그제야 그는 “저기, 메노 시몬스가 도망치고 있다!”라고 소리쳤고, 당연히 관원들은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라고 하면서 화를 냈다. 그에 대한 배신자의 답변은 이러했다. “혀가 묶여서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목을 내놓고 말았다.
수많은 박해의 시간을 이겨 낸 믿음의 영웅 메노 시몬스는 “믿음의 실행”에 있어서 갈등하고 머뭇거리고 한숨을 지었던 적이 있는바 『우리와 같은 성정에 속한 사람』(약 5:17)이었다. 그러나 그가 깨달은 말씀 앞에서 정직하고 투명하게 부복하자, 주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의 행보를 지키셨고 달려갈 길을 끝마치는 날까지 그를 사용하셨다.


이제는 많은 시간이 흘러서 “재침례교도”라는 이름에서 “재”(Ana)라는 글자가 더 이상 필요 없이 “침례교도” (Baptist)라는 이름만 쓰게 된 사람들, 특히 그들의 믿음처럼 성경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삼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Bible Believers)인 우리의 차례가 왔다. 확신하건대,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로서 『매사에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선한 양심』(히 13:18)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메노 시몬스처럼 빛나는 믿음의 행보를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BB

전체 92 / 2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