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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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의 표를 지닌 크리스마스 에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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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12월호>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를 들을 때, 세상 사람들은 황홀감에 젖을지 모르겠으나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이날 거리에서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노래하는 캐럴들이 울려 퍼진다. 그러나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들로 인해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에 대해 아주 무관심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12월 25일에 탄생하시지 않았다는 사실”(누가복음 2:8, 이 한 구절만 주의 깊게 읽었어도 알 수 있는 사실)조차 모르거니와 설령 안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그들에게는 크리스마스가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한 날”이지, “진리를 믿고 실행하기 위한 날”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을 위한 날이기에 “하나님”께서 끼어드실 자리도 없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날과 관련하여 절망감을 느끼고 있을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해 주시려는 듯,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인 1766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영국의 한 가난한 부부 사이에서 위대한 설교자가 태어나게 하셨다. 그 부부는 아이의 이름을 “크리스마스 에반스”(Christmas Evans, 1766-1838)라고 지었다.
크리스마스 에반스는 9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가 아들을 돌볼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에반스는 하는 수 없이 외삼촌과 함께 살아야 했다. 그런데 외삼촌은 술주정뱅이에 아주 잔인한 사람이었다. 에반스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천지에 그보다 더 “비양심적인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잔인했다고 한다. 에반스는 17세가 되도록 글을 몰랐으며, 주변 농부들의 종노릇을 하면서 겨우 목숨을 연명해 나갔다. 항상 그는 싸움에 휘말렸고, 한번은 싸우다가 칼에 맞기도 했다.
성장 과정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자주 느꼈던 에반스는 십 대 후반이 되었을 무렵 한 장로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지만, 그곳 담임목사는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던 에반스를 긍휼히 여기시어 당시 그가 머물고 있던 지역에 영적 부흥의 물결이 일어나게 해 주셨는데, 이때 에반스는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된다. 후일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경건치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유독 나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속되어 온 이러한 염려는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내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쉼을 얻기 전까지 말이다. 하지만 내가 구속주에 관해 조금씩 알아 가기 시작했을 때 온전한 안식이 뒤따라왔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이는 그것이 모든 사람의 마지막이며 살아 있는 사람이 그것을 자기 마음에 유념할 것이기 때문이라.』(전 7:2)라는 말씀처럼 에반스의 인생이 “최악의 인생”은 아니었다. 최악의 인생은, 인생의 마지막에 관하여 단 1초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자기만족만 추구하다가 지옥으로 가는 인생이다(눅 12:16-21).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혼을 네게서 앗아 가리니 그러면 네가 장만한 그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시니라』(눅 12:20).

구원받은 에반스는 세상 친구들로부터 성별했고, 이로 인해 배신감을 느낀 6명의 옛 친구들이 밤중에 귀가하던 그를 구타하여 한쪽 눈의 시력을 잃게 했다. 이로 인해 그는 평생 한쪽 눈에 『주 예수의 표』(갈 6:17)를 가진 채로 설교해야 했다. 그보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는, 그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기는 했어도 교리적으로는 문제를 안고 있었던 교회로부터도 성별하여 침례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20년가량 어두움 속에서 일자무식으로 살았던 에반스가 이렇게 올바른 성별의 행보를 해 나갈 수 있었던 첫 번째 원동력은 “성경 지식”에 있었다. 그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돈을 모아 성경과 초를 샀고, 밤마다 헛간에서 말씀에 열정이 있는 사람들과 만나 성경을 읽고 공부했다. 약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에반스는 드디어 모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을 포함하여 믿음의 선진들이 남긴 많은 글과 책들을 읽었다. 당시로 보면 마을 사람 열 명 중 한 명 정도만이 겨우 글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에반스의 이러한 변화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에반스의 믿음의 행보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원동력은 “선한 양심”(히 13:18, 딤전 1:5)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 하나가 있다. 조금씩 건전한 교리를 깨우쳐 가던 에반스에게는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침례교회로 성별했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유아세례”가 성경적인 것이라고 알았던 에반스는 그의 믿음을 반박해 줄 요량으로 성경을 샅샅이 살폈다.


“침례교회”는 본래 그 명칭이 “재침례교도,” 즉 로마카톨릭의 거짓 교리인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성인들에게만 “다시” 침례를 주었던(벧전 3:21) 무리에게서 유래했다. 에반스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유아세례에 관해 말씀하고 있는 구절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주의 깊게 성경을 정독한 후에 무척 실망했다. 단 한 구절도 유아세례를 증명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40구절 정도를 살펴보았지만, 그 모든 구절들은 ‘회개와 믿음에 관한 고백으로서의 침례’를 지지하고 있었다.” 에반스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후 “두아 강”에서 침례를 받고 침례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당시에는 사도행전 8:36-39의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강에서 침례를 받는 일이 흔했다. 그런데 변개된 성경들은 사도행전 8:37을 삭제함으로써 침례(세례)를 통한 구원이나 유아세례를 정당화하고 있다. 올바른 진리로 인도받고 싶다면 에반스처럼 정직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고 자기 생각을 버려야 한다. 반대로 미혹의 영에 놀아나고 싶다면 비뚤어진 마음으로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찾아다니면 된다(겔 14:1-11, 살후 2:11,12).

에반스는 그의 한쪽 눈을 잃던 날 밤에 꿈 하나를 꾸었다. 그 꿈에서 에반스는 불길 가운데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을 목도했고(살후 1:7-12), 주님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에반스, 너는 복음을 전파하려고 했으나 너무 늦었다. 이제 심판의 날이 임했기 때문이다.” 잠이 깼을 때 에반스는 그것이 꿈이었다는 사실에 깊은 감사를 드렸고, 이후로는 복음 전파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갖고 살아갔다.


사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살아야 할 “환상”(Vision)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당시 글을 모르던 에반스의 상황을 고려하여 꿈이라는 도구를 선택하셨겠지만, 글을 아는 우리에게는 그가 직접 경험한 꿈보다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벧후 1:19)이 있으므로 죄인들에게 닥칠 심판에 대해 입을 다물고 사는 인생에 관하여 더더욱 변명할 것이 없게 된다. 『만일 죽음으로 끌려가는 자들과 살해될 자들을 구해 주는 것을 삼가고 말하기를 “보라,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 어찌 주시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혼을 지키시는 분이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분께서 각자의 행위에 따라 보응하지 않으시겠느냐?』(잠 24:11,12) 그 이후로 에반스는 신실한 복음전도자가 되었고, 23세가 되었을 때는 침례교회들로부터 선교사로 파송되어 웨일스 북서쪽에 위치한 “린 반도”(Llŷn Peninsula)에 복음을 전하러 갔다.


그는 구원의 확신이 잠시 흔들렸던 기간이 있었지만, 믿음을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과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하여 자신이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이후로는 그의 설교가 전보다 더욱 강력해졌다. 많은 이들이 그의 설교를 통해 회심했으며, 사역 첫해에는 50명의 성도가 침례에 순종했다. 주일이면 32km 정도의 거리를 “걸어서” 이동하여 다섯 개의 장소에서 설교했고, “린”에서부터 남부 웨일스까지 쉬지 않고 순회 설교 여행을 다녔다.


한편 에반스는 “린”에서 “캐서린 존스”(Catherine Jones)를 만나 결혼했는데, 그녀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에반스의 사역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특히 1792년에 에반스가 웨일스 북서부의 한 섬인 “앵글시”(Anglesey)로 사역 장소를 옮기면서부터 아내로서 그녀가 보여 준 헌신은 더욱 빛이 났다. “앵글시”에서 에반스는 20년 동안 사역하면서 “연간” 17파운드(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아무리 많이 잡아도 26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연봉”) 정도밖에 받지 않았기 때문에, 캐서린의 주방에는 오트밀, 버터를 만들고 남은 우유, 감자 정도만 있었다. 그런데도 캐서린은 이 재료들을 가지고 대단한 요리를 만들어 냈고, 음식이 충분하지 않을 때는 남편에게 양보하기까지 했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하심과 아내의 헌신 그리고 에반스 자신의 부지런한 사역으로 인해 “앵글시 섬”에서도 많은 죄인들이 회심했고, 그가 사역하기 전에 열 곳에 불과했던 교회의 수가 단 2년 만에 두 배로 성장했다.

이후 다른 지역에서도 신실하게 사역했던 에반스는 1838년에 “스완지”(Swansea)에 있는 한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다. 설교 본문은 누가복음 24:47이었고, 제목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Beginning at Jerusalem)이었다. 「“주님,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야 합니까?” “그렇단다.” “왜 그래야 합니까? 이 사람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고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옆구리를 찌른 사람들을 만난다면, 주님의 얼굴에 침을 뱉은 사람들을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 모두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가 그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구주이고, 나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다고 말해 주어야 한다.”」
마지막 설교를 마친 후 에반스는 이제 곧 닥칠 죽음을 직감한 듯이 “이것이 저의 마지막 설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주의 금요일인 1838년 7월 19일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에반스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잘 계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계속하십시오!”
에반스가 그러했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성도는 박해를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딤후 3:12). 또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하고(딤전 6:8),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진 자유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전 9:19-22). 그리고 이러한 길을 끝마친 사람들의 마지막 조언은 늘 한결같았으니, 곧 힘들더라도 결승선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말라는 것이었다(히 12:1,2). “잘 계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계속하십시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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