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나는 이렇게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되었다 분류

“선택된” 칼빈주의자에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6월호>

주님의 말씀에 “공부하라”(딤후 2:15)는 말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나에게, 아니 거듭난다(요 3:3)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던 나에게, 진리의 지식을 알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개인적으로 ’94년 8월 15일 거듭난 것을 하나님 앞에서 감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 진노의 자녀였기(엡 2:3) 때문이며, 자연인(고전 2:14)으로서 종교적인 열성만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지옥을 걱정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해 피흘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기에(롬 10:9, 고전 15:1-3)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이 나에게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장로교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장로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주일엔 TV도 안 봤고, 십원도 쓰지 않았었다.)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학생회에서는 열심있는 학생이었으며, 졸업 후에는 신학교에 들어가 칼빈주의와 장로교 교리를 배웠다. 군에서는 군종이라는 보직을 받아 군 교회에서 주일학교도 맡아 일했고 수요 예배 설교도 했으며, 제대 후에도 역시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전도사로서 일했다. 난 열심히 일했고 인정도 받았으며 신임도 받았다. 또 목회를 하시는 아버님 덕분에 안정된 목회는 거의 보장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많은 부분에서 모순됨을 알고 있었다. 아담의 성품을 단지 가리기만 했을 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아담의 본성이 여실히 나타남을 부인할 수 없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왜 구원받아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단지 내가 배운 칼빈주의 교리에 입각해서, 내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여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도 믿고, 전도사도 하고, 온 집안이 교회 다니는데...”라는 것이 나를 안심하게 했던 생각이었다.
신학교에서는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그 중 신약총론, 구약총론, 복음서 등 몇 과목만 제외하면 일반 대학과정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영어, 철학(골 2:8), 문학, 법학 등 성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과목들을 주로 배웠다. 이러한 신학교의 교육과정이 사역을 하는 데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은 당연했고, 오히려 성경을 읽는 데 의구심만 더해줄 뿐이었다. 때때로 성경을 읽으면서 의문나는 사항이 있어 교수들이나 목사들에게 질문하면, “이 부분은 우리의 구원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괜한 의문은 불필요한 것이다”, “불필요한 의심은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 등등의 대답만을 들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놀랍게도 나 자신도 학년이 높아갈수록 그러한 상황에 적응해 버려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질문을 받을 때 그 교수들과 똑같이 대답을 하게 되어 버렸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사람이란 이처럼 자기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들을 그렇게도 자신있게 설명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에게 걸리는 것은 칼빈의 예정론이었다. 나는 단순히 “‘태초 이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이 있다. 그들만이 구원을 받는다. 구원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난 선택된 자다. 어떻게 아는가? 지금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의문조차 갖지 않고, 예수님에 대하여 설교했고, 십자가, 보혈, 구속, 화목 제물 등을 지식적으로만 가르쳤다.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의문은 더욱 커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항상 두 가지, 즉 주 하나님을 잘 섬기면 조상에게 약속한 축복을, 이방신을 섬기면 이방인에게 주실 재앙을 주신다는 양자택일의 것을 제시하셨기 때문이다. 과연 모든 것이 “태초 이전”에 예정되었다면 양자택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이중 예정론”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성경에는 그런 말도 없고, 그런 설명도 없다. 그래서 이 부분을 명확하게 설명한 해답을 찾고자 노력했으나, 그 답을 찾기란 무척 힘들었다. 알미니안주의의 책을 읽었을 때 조금은 도움을 얻었지만, 그것도 역시 비성경적이론일 뿐이었다. 그래서 교회 청년들에게는 솔직히 예정론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4년 4월 경에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칼빈주의자인가?>란 소책자를 만나게 되었다. 빛을 봤다고 해야 되는 것일까? 성경으로 예정론을 조명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으로 난 됐다고 여겼다.
1994년 5월에는 <한글킹제임스성경>을 발견하고 무엇이 틀렸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구입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 성경 뒤에 있는 도표를 보고 놀라지 않았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우리가 읽고 있는 <개역한글판성경>이 사탄에 의해, 사탄이 사용한 손길들에 의해 변개된 성경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래도 어려서부터 아버님의 설교를 통해 성경의 무오성을 배워왔고 그 성경이 어떻게 우리 손에 주어졌음을 들었으며, 로마 카톨릭이 이단 중의 이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개역한글판성경>을 나의 최종 권위로 삼고 있었던 터라, 바로 그 개역성경이 변개된 성경이라는 것은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분개하고 화가 나서 확인하기로 했다. 이들의 말이 만일 근거 없는 말이라면, 이보다 더 큰 “이단”이 어디 있겠는가? 필자는 그때까지 이단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고, 뉴에이지 운동, 라에리만 운동 등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성경 문제를 비롯하여 학회지 <성경대로믿는사람들>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한글킹제임스성경>과 <개역한글판성경>을 비교해 보았다.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당시 나는 기존 교회들과 신학교들의 부패상과 목사들의 ‘다른’ 면들을 보고 있었고, 한참 <표준새번역>에 대한 시비가 크게 일고 있었으며, <개역성경>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다고 서로 싸우고 있었던 터라 성경변개와 보존에 대한 문제를 빨리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 것인가?
그러던 가운데 1994년 8월 15일, 필자는 드디어 거듭나게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함에 의해서였다. 칼빈주의가 나를 구원하지 못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구원해 주신 것이다.
그해 가을부터는 펜사콜라 성경신학원에서 수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궁금했던 수많은 질문들, 어린 아이의 구원, 구약 시대 이방인의 구원, 과연 상급이란 왜 있는 것인가 등의 질문들이 하나씩 해결됐다. 그에 따라 자연히 장로교 전도사의 자리는 너무도 힘이 들게 되었다. 주일 설교의 80% 이상은 오류임이 발견되고, 새벽 예배, 금요 철야 예배로 내 자신이 헛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95년 5월에 사임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믿는 것을 전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무관심 내지는 무시였다. 어떤 사람들은 미쳤다고 하고, 주위 분들은 내가 이단에 빠졌다고 하시며, 사역하던 교회에서는 이상한 소문들이 무성했고, 내가 진리를 가르쳤던 학생들은 모두가 불려가서 “재교육”을 받았는지 대부분 원래 무지했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그 성경, <한글킹제임스성경>이 있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나의 선택은 하나님 앞에서 잘했다 칭찬을 받을 것이다.
“선택된” 칼빈주의자에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크신 은혜에 이 죄인은 그저 감사드릴 뿐이다. BB

전체 92 / 1 페이지
RSS
번호
제목